'2015/09'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5.09.25 동심처럼 예쁜 꽃
  2. 2015.09.24 야곱의 축복 I
  3. 2015.09.20 J의 달밤
  4. 2015.09.03 아버지의 마음
  5. 2015.09.02 8월의 구름
풍경과 이야기2015. 9. 25. 22:35

어느날, 이웃집 고양이가 우리집 화단에 침입해 땅을 파댔다.

아이들은 땅 파고 있는 고양이를 창문으로 봤다.

며칠 뒤, 우리집 화단에 이렇게 예쁜 꽃이 피었다.

갑자기 핀 꽃을 보며 예쁘다며 어쩔줄 몰라 하는 아이들이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이 꽃 누가 심은거야?"

엄마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큰 아들 건유가 "나는 알아"라며

"이 꽃은 바로 지난번 땅 파던 고양이가 그때 심어놓은 거"라 한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 꽃은 이토록 동심처럼 예쁜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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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9. 24. 04:35

야곱의 축복 I

ㅡ도덕성과 영성ㅡ

창세기 64

(창세기 49:1-7)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복음성가로 만들어져 교회의 예배 시간에 널리 불려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이다. 말씀도 유명세를 타는 말씀이 있다. 대개 예배(또는 예전)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씀은 유명세를 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예전)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그들은 종교개혁의 내용을 예배(예전)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했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에 바탕을 둔 찬송가를 많이 지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는 종교개혁을 더 효과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다. 그 중 대표되는 찬송가가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이다.

 

야곱의 축복은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것만큼 달콤하지만은 않다. 이 말씀은 복 많이 받아라고 외치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예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여기에는 축복뿐만 아니라, 저주, 심판 그리고 약속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곱이 아들들을 모두 모아놓고 죽기 전에 풀어놓는 넋두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온 생의 영적 능력을 담은 예언적 유언이다. 아버지 야곱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성경에서 예언이란 점치듯이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이다. 점치는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미래, 즉 자기 자신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둔다. 자기의 미래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가 중요하다. 점치는 사람들은 숙명론에 빠지지만, 예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린다.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인데,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지리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나아갔던 모세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의 축복이 야곱의 인생 말년에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와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동일한 수준에 서 있어야 한다. 이들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빚어지지 않았다면, 대언하는 자나 그 말씀을 듣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둘 중 하나만 모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대언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분히 빚어졌다는 뜻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들에게 대언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2). 여기에는 반복법과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어법이 사용되는 이유는 지금 야곱이 전하고자 하는 예언이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들어야한다. 그런데 이 듣는다는 행위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 귀만큼 허술한 것도 없다. 인간의 귀는 절대로 혼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귀는 마음과 함께 작동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문제는 그래서 지리의 차원(거리의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인 것이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을만한 도덕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인간의 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험난한 세월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시점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도덕성과 영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결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전달되는 야곱의 자녀들이 장자 르우벤과 두 형제 시므온과 레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에게 전해지는 예언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야곱의 축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장자가 갖는 특권은 대단했다. 장자는 아버지의 권위를 그대로 불려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보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도 두 배를 더 받았다. 장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예이고 특권이었다. 르우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야곱은 장남 르우벤을 이렇게 평가한다.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3).

 

여기까지만 보면 르우벤은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아버지 야곱의 말은 가슴 아프다. “…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니리…” 탁월해야 마땅한 사람이 탁월하지 못하게 될거라는 예언이다. 왜 이렇게 르우벤은 순식간에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됐을까?

 

야곱은 르우벤이 이렇게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을 우선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르우벤이 물의 끓음 같았다고 말한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선다는 뜻인데, 르우벤의 인생에 있어 그러한 일이 있었다. 야곱은 비유적으로 설명한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르우벤과 빌하(야곱의 부인 중 한 명)의 간통 사건이다.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

 

르우벤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흑역사였지만, 이 사건이 가지고 온 여파는 잔인했다. 우선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리고 빌하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동생들인 단과 납달리와도 관계가 소원해졌다. 무엇보다 장남으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동생들에게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판 사건 때의 일이다. 요셉을 죽이지 말자는 르우벤의 말을 귀담아 듣는 동생들이 없었다. 결국 그 사건에서 르우벤은 소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실질적 장자의 축복이 동생 요셉에게로 돌아갔다. 장남에게 돌아가야 할 두 배의 축복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도 르우벤 지파는 별 볼 일 없는 지파로 역사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스르르 사라진다. 르우벤 지파는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 강 동편에 자리를 잡아 정착한 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나 왕 또는 예언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지파로 그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르우벤은 도덕적이지도 못했고 영적이지도 못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한르우벤은 결국 물의 끓음 같지선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서는 바람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도덕은 인간의 삶을 얽어 매는 족쇄가 아니라 삶을 지켜주는 안전띠이다. 도덕은 삶을 질주하고 있는 인간들이 서로 부딪쳐 치명적인 사고를 내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안전거리이다. 도덕성과 영성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아서 서로를 분리해 낼 수 없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부모의 물건(소유)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언 28:24).

 

다음으로 이어지는 야곱의 축복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함께 내려진다. 이 둘이 따로 예언을 받지 않고 함께 받는 이유는 이들이 무엇보다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보복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5). 여기서 이들이 형제라고 언급되는 이유는 엄마가 같은 형제’(실제로 이들은 엄마가 같은 형제이다)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떠한 일을 위해 한 통속이 되어 동맹또는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평가하는 단어는 매우 과격하다. ‘이라는 말과 폭력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것은 이들의 행동을 매우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용어이다. 이들은 자신의 여동생 디나가 강간 당한 것에 대하여 복수하기 위해 둘이 한 통속이 되어 무자비한 폭력을 저질렀다. 비도덕적인 일을 당한 것이 비도덕적인 일을 수행하게 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과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의 수단을 쓰는 것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못박아 말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6절 전반부). 그들의 모의와 그들의 집회는 도덕성과 영성을 벗어나는 모의와 집회였다. 그들의 모의와 집회는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는폭력 그 자체였다. 폭력에 사로 잡힌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폭력을 저지르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땅(나라)에 발 붙일 곳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도덕성과 영성을 잃고 폭력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에게 내려진 예언은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것이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 한 통속이 되도록 놓아두면 안 된다. 이들이 서로 모여 모의하고 집회를 갖게 하면 안 된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서로 떼 놓아야 한다.

 

야곱의 예언은 성취된다.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48개 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21), 다른 지파처럼 기업을 물려 받아 그곳에서 모여 살지 못한다. 신명기서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바, 모세가 각 지파를 축복할 때에 시므온 지파가 빠진다. 그리고 결국 시므온 지파는 자기에게 할당된 기업을 지켜내지 못하고 유다 지파에 흡수된다. 이렇게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예언대로 다시는 서로 연합하지 못하게 된다.

 

야곱의 축복은 야곱의 사사로운 복 빌어 줌이 아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며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예언자로 거듭났다. 야곱의 아들들도 험난한 세월을 그냥 허송 세월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아버지의 예언(축복)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다.

 

만약 그들이 예언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아들들을 모아놓고 축복한답시고 저주와 심판을 퍼부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저주와 심판을 퍼붓고 있는 아버지의 말씀을 곱게 듣고 있을 아들들은 더더군다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예언했고, 아들들은 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아버지의 사사로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덕성과 영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폭력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가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묵상하게 하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축복안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예언) 안에 거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저주와 심판 같아 보일지라도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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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9. 20. 00:32

J의 달밤

 

달 밝은 밤

나는 분명 발가벗고 바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무도

나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미스터리가 아니다

곁눈질조차 없던 그 거리에서

나는 뚝 뚝 녹아 내리는 달빛을

온 몸에 받으며

달빛 뒤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슬픈 일이다

미안해서 슬픈 게 아니라

잊혀지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 소풍 오는 천사들은 없었다

나에게 눈길을 주던 그 처녀는

장님이 되어버렸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그 청년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상대방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때

인간은 비로소 늙는다

 

달 밝은 밤 발가벗은 채로

나는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하나

얼마나 더 부끄러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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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9. 3. 05:10

아버지의 마음

창세기 63

(창세기 48:8-22)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대동하고 아버지 병문안을 간 요셉은 두 아들이 그들의 할아버지 야곱에게 축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죽음을 앞 둔 사람일 것이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마음만큼 간절한 마음은 없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이다. 죽음을 앞 둔 아버지 야곱의 축복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을 넘어선 현실이었다.

 

죽음을 앞 둔 아버지와 죽음의 끝까지 가보았던 아들의 대화에는 이 세상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베어있다. 베토벤이 작곡했음 직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그린 한 편의 서정적인 교향곡을 보는 듯하다. 요셉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9).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소개한다.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은 그 자식에 대한 기대와 양육의 질을 바꾼다.

 

이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자식은 나의 생물학적 작용을 통해서 내가낳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자식은 철 없던 한 때 불장난으로 난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자식은 아무런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실수로 낳은 짐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일단 생명이 태어나면, 그 생명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므로, 그 생명을 잉태한 부모나, 그와 똑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 땅에 온 모든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온 힘을 다해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요셉에게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식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랬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임한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부모는 자식의 축복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자식이 예의를 갖추어 온전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은 성경에서도 약속이 있는 계명으로 나타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20:12).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전통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의 전통이다.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한국의 정신 문화에서 는 그 중심에 있었다. 유학에서 강조하는 사람됨의 핵심은 ()’인데, 공자의 논어에 의하면 그 인을 이루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이다. 논어의 위정편에 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에 대한 이런 이야기까지 나온다.

 

어떤 사람이 관직에 있지 않은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경]에 이르기를 효도하고 오직 효도하여 형제들에게 우애롭게 대하고 정치에 이것을 배풀어라라고 했으니, 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느냐?”

<출처: 김원중 옮김 [논어], 글항아리>

 

유학의 ()’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아가페)’과 비교할 수 있는데, 이를 기독교식으로 풀어 설명하자면, 사랑을 실천하는 바탕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게 잘 안 되면, 하늘의 복을 받기가 쉽지 않다. 동맥이 막혀 있는데 어찌 건강할 수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축복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어찌 하늘의 복이 시원하게 임하겠는가. 혹시,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의 문제를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젊은 이들이 부모(또는 나이 많으신 어르신) 공경하는 일을 등한시 하는 이유는 그들을 공경하는 일이 남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오직 부모를 위한 일, 어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일들은 자신들을 귀찮게만 할 뿐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효를 행하는 것(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섭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성장해 살다가, 결국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다(생로병사). 생명은 모두 늙는다. 생명은 모두 죽는다. ‘늙어감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효를 행하는 것은 남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제 곧 늙게 될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더군다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현저하게 늘어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노년의 삶은 그 어느 시대에서보다 길어졌다. 옛날에는 노년의 삶이 별로 길지 않았다.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옛날에는 노년에 들어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인간이 누리는 복 중에, 장수의 복이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수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

 

노인 우울증의 대부분은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를 당하기 때문에 온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인으로서의 공경을 받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노인 자살의 수를 늘려가는 요인이다. 이러한 노인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노인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잃어버린 사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이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31).

 

늙어간다는 것은, 늙었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만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의 모진 풍파를 모두 견뎌냈다는 뜻이다. 그들은 존재에의 용기를 선택한 자들이고, 삶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들이고, 존경 받아 마땅한 면류관을 머리에 쓴 자들이다. 노인들의 백발은 액면가 그대로 흰색이 아니라, 그 안에 황금을 감추고 있는 영화의 면류관이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어른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야곱은 아들 요셉과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베풀만한 영화의 면류관을 머리에 쓴 아버지요 노인이었다. 야곱이 베풀고자 하는 축복은 부끄러운 축복이 아니라 당당한 축복이었다. 야곱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들 요셉에게 그의 아들을 나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축복하리라고 말한다. 아들 요셉은 이렇게 당당한 아버지를 인정하고 있다. 요셉은 아버지가 축복하려고 하자 아버지 앞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는 길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을 때 그것만큼 복된 인생도 없다. 세상에서 인정 못 받았어도, 자녀에게 인정 받는다면 그 어떤 인정보다도 값진 것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리 큰 인정을 받았어도, 자녀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면 무슨 위로함이 있겠는가.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을 때, 하늘의 복은 자녀들에게 시원하게 임하게 된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베푸는 축복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한 가지는 장자 므낫세와 차남 에브라임에게 손을 얹을 때 팔을 엇바꾸어 얹는 것이다. 원래는 므낫세가 장자이므로 야곱의 오른손이 므낫세의 머리 위로 향해야 하고, 에브라임은 차남이므로 야곱의 왼손이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야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팔을 엇바꾸어 오른손을 에브라임 위에, 왼손을 므낫세 위에 얹는다. 또한, 야곱은 형식적으로 봤을 때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베풀고 있으나 그 내용 면에서는 요셉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얹고 비는 야곱의 축복은 이후 제사장이 복을 빌 때 쓰는 형식의 전조가 된다. 야곱의 축복 기도문 형식은 유대교 의식에서 그대로 사용된다. 야곱이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직접 보자.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를 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야곱의 하나님은 뜬구름 잡는 하나님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길러주신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이토록 구체적이다.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건지신(redeem)’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어에서 가알이라는 말이다. ‘가알은 성경의 고엘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고엘법이 나오는데, 이는 어떤 사람이 빚을 지거나 노예가 되었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 돈을 대신 지불하고 풀려나게 해주는 율법(제도)이다.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엘법의 수혜자는 룻기서의 주인공 모압여인 이다. 룻은 고엘법을 잘 알았고, 또 그 율법을 경건하게 지키고자 했던 보아스에 의해서 건짐(redemm)’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그를 어려움에서 건져줄친족이 없었다. 형 에서와의 관계나 외삼촌 라반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가알(건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야곱에게는 그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줄존재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았던 하나님은 실제로, 야곱의 신앙 고백과 같이, 야곱은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이것은 야곱의 절절한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야곱은 두 아들을 데리고 병문안 온 아들 요셉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할 야곱의 신앙 고백이다.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야곱은 평생 요셉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한국의 유명한 희극인 송해 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데, 그 가슴을 파면 거기서 죽은 아이가 나올 것 같다.” 이처럼, 야곱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요셉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자식들까지도 그리하고 있다. 이 어찌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축복을 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요셉은 아버지가 실수로 그렇게 하는 줄로 알고 아버지 야곱에게 오른손을 므낫세에게, 왼손을 에브라임에게 얹으시라고 정정해 준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19).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것이 아버지의 영력이요, 이것이 아버지의 권위이다. 아버지는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더군다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게다가 하나님의 기르심과 건져주심 가운데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신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야곱이 차남인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은 것은 자신의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가슴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야곱도 차남이었다. 장남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를 제치고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장자의 복을 받았다. 야곱이 살아온 세월은 바로 이것을 깨닫는 세월이었다. 눈이 안 보이고 병들어 죽게 될 초라한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으나, 야곱이 평생을 걸쳐 모진 인생의 고난 속에서 얻은 것,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겨주고 갈 유산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버지 야곱의 마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었다. 이런 아버지가 내리는 축복은 허공을 가르는 허언이나 요행을 바라는 공염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축복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을 넘어선현실이다.

 

야곱은 이렇게 축복을 마무리 한다.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20-21). 훗날, 야곱의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에브라임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 시기에 여호수아를 배출하는 등 이스라엘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요셉은 세겜 땅에 묻히게 되고, 결국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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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5. 9. 2. 01:26

8월의 구름

 

8월의 끝자락,

표정 없이 부는 바람을 따라

눈을 들어 바라본 하늘,

8월의 구름은 슬프다

 

누군가의 여름이 가고 있다고

아주 뜨거웠다고

그러나 흔적조차 사라질 거라고,

8월의 구름은 체념에 홀린 듯

해지는 지평선 너머 어디론가

영영 흘러간다

 

떠나며 그가 남겨 놓은

색 바랜 나뭇잎 한 장

시들은 꽃잎 두 장

그리고 식어버린 바람

 

이제,

또 다른 전설이 시작될 거라고

빨갛게 물든 석양이

심장을 쓰다듬을 때

 

나는 우두커니 서쪽 하늘을 바라보다

그가 남긴

한 장의 나뭇잎과 두 장의 꽃잎을

식어버린 바람에 날리며

뜨거웠던 태양을 향해

심장을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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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