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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21. 08:01

방향제와 난

 

사무실 스팀청소를 한 뒤, 쾌적한 환경에 방점을 찍기 위해 집사람이 방향제를 사다 주었다. 나는 방향제와 난을 보면 군대 생각이 난다. 나는 군생활을 대전 계룡대의 육군본부에서 했는데, 작전처장 장군운전병으로 근무했다.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한 달 전 육군본부 장군운전병의 선발 방법이 바뀌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동원예비군을 총괄하는 동원예비군참모부장(별 두개)이 운전병의 운전실수로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 동승했던 동원부장 부인도 함께 죽었다. 사고를 낸 운전병은 남은 군생활을 남한산성 영창에서 보냈고, 그 당시 행보관(행정보급관, 원사)은 그 운전병 면회를 자주 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육군본부 수송대대는 장군운전병 선발 시스템을 육군훈련소(논산)에서 미리 선발해 훈련시키는 시스템으로 바꾸었는데, 그때 내가 처음으로 그 선발 시스템에 의해 선발 되어 제2수송교육단(대구경산)에서 3주 세단 운전병 훈련을 받은 뒤 육군본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자대 배치를 받은 후, 수송대대에서 두 달 정도 내무반 생활을 하며 장군운전병 실전 훈련을 받은 뒤 전역하는 선임 운전병을 뒤이어 장군운전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는데, 그때 나를 운전병으로 선발한 장군은 육사 26기 김창호 장군으로, 육본의 보직인 작전처장이었다. 작전처장 자리는 군부시대에는 하나회회원이 아니면 절대로 갈 수 없었던 보직이었다. 내가 군생활 할 때는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회 출신이 거의 군대 내에서 사라진 시점이었고, 이 자리는 작전 분야에 정통한 실력파가 오는 자리였다. 그래서 대령때까지 작전 분야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쌓았던 김창호 장군이 윤용남 참모총장에 의해 발탁되어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김창호 장군과 내가 육군본부 전입동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199546일 같은 날 육군본부로 전입되어 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전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했다. 물론 나는 1997417일에 전역했지만, 김창호 장군은 그 시기에 투스타로 진급하여 15사단장으로 전출되었다.

 

육군본부 장군 운전병은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한다. 보통 군대에서 장군에게는 운전병 외에 요리병과 당번병, 그리고 부관이 따라 붙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운전병 혼자서 그 모든 역할을 감당한다. 그래서 운전병 선발 시스템을 미리 뽑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똘똘한 놈 뽑아서 여러 가지 일을 감당시키려 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장군 운전병 선발 기준에는 몇 가지가 적용되었다. 첫째, 운전실력이 좋을 것. 둘째, 서울 강남에 살 것. 셋째, 학력이 좋을 것. 넷째, 집안이 건실할 것. (사실, 이렇게까지 잣대를 들이대며 운전병을 뽑아야 하나, 의문이다.)

 

둘째와 셋째 기준 때문에 내가 군생활 할 때의 운전병들은 그만그만한 곳에서 선발되어 왔다. 강남에 사는 친구들을 선발하다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 후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리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그리고 유학파 출신이 40명 정도되는 장군운전병들 중에 반수를 차지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우리들끼리 연고전 같은 것도 하고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끼리끼리 짝지어 놀고 그렇지는 않았다. 군대이다 보니, 사실 그러한 출신 배경들이 별로 무의미했다. 그리고 내 성격 상 끼리끼리 노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모든 장군 운전병들과 사이 좋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장군 중에서도 요직에 있는 장군은 운전병과 관사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데, 나는 요직인 작전처장 운전병이었기 때문에 장군 관사에서 장군과 함께 생활했다. 계룡대에는 육군본부 외에 공군과 해군 본부가 함께 있기 때문에 장군들이 많이 거주한다(그 당시 한 60명 정도). 그래서 따로 장군들을 위한 식당이 운영된다. 그 덕분에 관사에서 내가 직접 음식을 차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모든 살림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내가 매일 같이 한 것은 관사 청소와 근무복 다림질과 군화 닦는 것과 재떨이 비우는 것과 빨래였다. 그때 하도 매일 같이 다림질 하고 청소를 해대서, 나는 지금까지 다림질 하는 거랑 청소기 돌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히 재떨이를 비울 때는 마음이 좀 심란했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을뿐더러, 재떨이 비우는 일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이라 매우 생소했다. 우리 집은 술과 담배와 멀리 살았던 집이라 그랬던 것 같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관사의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었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샀던 물건이 방향제였다. 그리고 관사에서 화초를 키웠는데 그게 난()이었다. 그 당시에 군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은 난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통해 들어온 난을 관사에 가져다가 키웠는데, 20개 정도 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을 키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매주 2시간씩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푹 담가 놓아야 하고, 관리를 잘 해줘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관리한 난에서 꽃이 피는 날이면 장군이 그 향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 속으로, 입을 삐쭉이기도 했다. 난을 키우는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장군이 난 꽃의 향기만을 좋아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쁨은 자신의 수고로움의 끝에서 와야 제 맛인데, 남의 수고로움에서 온 기쁨을 가로채는 것은 별로 눈에 선해 보이지 않았다.

 

내 군생활은 매우 특별한 체험이었다. 그 당시 육해공 장군수가 430명 정도였으니까, 전체 일반 사병 중 장군 운전병 숫자는 매우 제한적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병으로서 아무리 벽돌을 쌓아도 닿을 수 없는 저 하늘에 있는 ’, 그 별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자리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특별히, 윗사람(상관)을 어떻게 보필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큰 조직이 돌아가는 법과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물론 군대의 자리와 내 목회의 자리가 달라 좀 안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장군운전병을 통해서 배운 것은 나에게 큰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군생활 하면서 장군을 모시느라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밤에 잠을 마음 놓고 자 본 적이 없다. 밤마다 자주 지휘통제실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서 보고해야 했고,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장군을 깨어드려야 했다. 나는 한 번도 알람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없었다.  그만큼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비염과 근육통증병을 얻어 나왔다. 나는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고생하고 있다. 군대에서 얻은 병이라, 그리고 이미 20년이 지난 후라, 군대에서 얻는 병 때문에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서 몸 건강히 있다 제대하는 것이 최고의 복인 것 같다.

 

나는 방향제와 난()만 보면 군대생각이 난다. 어떠한 물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물건은 때로 기능을 넘어 지난 세월에 대한 매개체 역할을 감당한다. 사람은 그냥 하염없이 옛생각에 잠기기 보다, 어떠한 물건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또는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옛생각에 잠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물건은 단순히 기능을 지닌 상품이 아니라, 때로는 추억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그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내 삶에 있어 방향제와 난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내 인생의 저 너머를 보게 해주는 타임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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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