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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5. 10. 8. 05:37

야곱의 축복 II

ㅡ주권자와 장자, 그리고 그리스도인ㅡ

창세기 64

(창 49:8-28)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리 예언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예언을 이루는 일은 절대로 아무런 노력이나 어떠한 시련 없이 그냥 성취되지 않는다. 야곱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뜬금 없이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어가는 삶의 여정은 험난하다.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과 이삭의 삶의 여정, 무엇보다 야곱의 삶의 여정이 그것을 말해 준다.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고, 인내와 고통의 연속이다. 그 험난한 삶의 여정 가운데서 그들을 지켜 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들은 일찌감치 걸어가야 할 그 길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주의 길을 가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주의 길을 가는 자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주의 길을 가는 일이 쉽지 않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 오직 바라 볼 것이 하늘 밖에 없다는 것은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기도 하다.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하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 앞에 놓쳐 있는 어려움을 알았다. 그 어려움을 막연히 안 것이 아니라 모든 오감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주의 구원이 없다면 결코 걸어갈 수 없는 길, 주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기어코 갈 수 있는 그 길. 야곱은 열 두 지파를 이루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해 갈 자녀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빌고 또 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자녀들의 발등에 불빛이 되어주는 건 그 무엇보다 아버지의 당부와 삶이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부모님을 떠 올리며, 그분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생각해 본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은 앞으로 맞이 하게 될 어려움 앞에서 무엇보다 아버지의 구원의 간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열 두 아들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품어야 할 기도문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긴 말로 우리의 형편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한 마디만 하면 된다. “여호와여, 나는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문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우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이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강한 손을 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 드릴 수도 없고, 기도의 응답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으며, 희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이다.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녀를 양육한 부모는 그 누구보다 자녀에 대해서 잘 알 수 밖에 없다. 야곱은 어려움 가운데 열 두 자녀들 낳아 키우며 그들 각자의 성격과 성향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열 두 아들들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축복은 뜬 구름 잡은 축복이 아니라, 바로 모태에서부터 살펴본 자녀들의 성격과 성향을 토대로 한 매우 구체적인 축복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8).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야곱의 축복 중에 유다와 요셉에게 한 축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역대상 저자는 야곱이 유다와 요셉에게 한 축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2). 성경은 유다를 주권자, 요셉을장자로 각각 부른다.

 

주권자장자는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복음서와 (바울과 일반) 서신서는 예수를 주권자(주님)’장자(맏아들)’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권자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과 장자 요셉에게 내려진 축복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주권자이시며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야곱은 유다가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축복한다.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일은 매우 영예로운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구원사역)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나 찬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삶에 어떠한 이로운 영향을 실제적으로 베푼 대상에 대해 찬송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예배자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이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으로서 찬송 받으시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찬송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구원사역)을 최선을 다해 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 베푼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함과 더불어 그의 제자들(a follower of Christ)을 찬송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이 땅에서 찬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좀 더 편안한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이 땅에서 칭찬 받고 있는가? 사람들의 호감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물론 복음의 속성상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심판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복음이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하게 전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굳이 여러 가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재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 되신 이유는 그의 신분이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자동적으로 찬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은 그 찬송의 대상에게서 어떠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송 받으시는 이유는 그의 십자가 사역 때문이다. 그의 십자가 사역이 없었다면, 그에게 과연 부활이 있었을까? 부활이 먼저가 아니라, 십자가가 먼저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부활을 믿고, 자기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줄 아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희생은 자기 연민이나 의협심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의 은총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남들 위에 군림하는 주권자(주님)이 아니라, 남을 위해 생명까지도 내어놓는 섬기는 주권자였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그리스도인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다. 군림하는 자가 받는 찬송은 억압된 찬송이지만, 섬기는 자가 받는 찬송은 자유한 찬송이다. 그리스도인은 찬송 받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찬송 받는 것이다.

 

야곱은 주권자로서의 유다에 대한 축복뿐만 아니라, 풍성한 소출에 대한 축복도 한다. 빈곤한 자는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적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돈으로만 그 가치를 평가 받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이나, 야곱의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를 말하지 않는다.

 

야곱은 유다에게 다름과 같은 축복을 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을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1-12). 포도나무가 얼마나 지천에 널려 있으면 나귀나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매겠는가. 포도주가 얼마나 풍성하면 빨래를 포도주로 하겠는가. 포도주가 얼마나 풍성하면 그것을 매일 마셔 눈이 포도주처럼 붉겠는가. 우유가 얼마나 넘쳐나면 그것을 매일 마셔 이빨이 다 하얘질 정도가 되겠는가.

 

포도나무와 포도주, 그리고 우유를 통한 비유의 축복은 모두 유다에게 임할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풍성함은 하나님이 유다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징한다. , 이 풍성함은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계신다는 징표가 된다. 풍성함을 단순히 물질적으로만 환산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 안 되는 징표일 수 있으나, 유다 지파에서 나온 다윗의 이야기나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진짜 풍성함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다에게 임한 풍성함을 가장 잘 표현한 신약의 말씀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우었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4:11-13).

 

사무엘 상하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는 바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그 말씀과 일치한다.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나 풍성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 보았다. 복음서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생명의 양식이셨지만,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는 늘 하나님 안에 머무셨다. 이것의 그의 풍성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함은 세상이 말하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의 풍성함이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자는 가난할지라도 풍성한 자요, 하나님 안에 머물지 못하는 자는 부자라 할 지라도 빈곤한 자이다. 유다가 받은 풍성함의 축복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어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거라는 축복이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자는 언제나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사야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43:1-2).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유다에게 내린 야곱의 축복과 같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이것은 유다에게서만 나타나는 축복이 아니라, 이제 살펴볼 요셉에게도 나타나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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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