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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09.18 (중보) 기도 사역 1
  3. 2016.09.18 예수를 간구하는 기도
  4. 2016.09.18 보호와 보답을 간구하는 기도
  5. 2016.09.14 낙서 서른
  6. 2016.09.14 낙서 스물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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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6.09.14 낙서 스물 일곱
  9. 2016.09.14 낙서 스물 여섯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9. 26. 02:15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출 31:1-11)


회생활이 재밌고, 신앙생활이 깊어지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물론 성경을 정보 차원에서 아는 것으로만 그치면 안 되고, 성경과 나의 삶을 긴밀히 연결시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이 지루했던 기억이 있는가? 왜 그런가? 왜 그렇게 수업이 지루했는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수업 내용을 잘 못 쫓아가기 때문이다. 수업 내용을 잘 못 쫓아간다는 것은 수업의 내용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한 흥미를 느끼려면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신앙생활이 재밌고 깊어지려면,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잘 아는 일이 쉽지 않다. 분량도 많을뿐더러,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 않고, 게다가 우리 민족과는 별로 상관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중심으로 성경의 내용이 전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성경은 문자로 씌어 있기 때문에, ‘독서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조용히 앉아서 독서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선,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의 토대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생명은 그냥 그렇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그 어떤 것으로도 충만해질 수 없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시고 토대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혜이다.

 

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만나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깊게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성경은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 관심을 좀 갖자.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망이 있어야 한다.

 

성경을 알아가는 한 방법으로, 일단,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그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유심히 보면 된다. 하나님은 한 인물을 택하시고, 그 인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경배해야 하는 배울 수 있다.

 

창세기를 보자. 창세기 하면, 누가 생각나는가? 무슨 사건이 생각 나는가?

 

아담과 하와 창조기사

노아 홍수와 무지개 언약

아브라함과 사라 가나안 땅과 이삭 사건

이삭과 리브가 우물 판 사건 (우물 팔 때마다 물이 나왔다. – 대박사건 로또)

야곱과 레아, 라헬 장자권, 얍복강, 요셉에 대한 사랑과 비극

요셉 - 애굽에서의 고난과 성공

 

출애굽기를 보자.

 

출애굽 사건

모세, 아론, 여호수아

시내산 십계명

 

출애굽하면, 이것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그래도 교회 좀 다니신 분이고,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이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전혀 안 읽어 보신 분이다. 출애굽기는 출애굽 하는 이야기와 시내산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막이야기가 나온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24장까지가 출애굽 이야기, 시내산, 그리고 율법에 관한 기사가 담겨 있고, 25장부터 40장까지는 성막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 40장은 성막 봉헌이야기로 끝맺는다.

 

성막은 무엇인가? 성막(이동식 예배당, Portable Sanctuary) à 왜 이동식 예배당이 필요한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은 유목민족이었다. 소나 양을 키우는 것을 주업으로 살았는데, 소나 양을 키우는 사람들은 그들을 먹일 꼴()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은 출애굽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인 가나안으로 이동 중이다. 이동 중이기 때문에, ‘이동식 예배당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주하신다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다. 성막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성막은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말씀대로 지어졌다. 규격과 건축자재며 재질이 꼼꼼하게 율법의 형태로 모세에게 전해졌다.

 

성막과 관련해서, 꼭 알아야 할 인물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다.

 

교회 다니면서, 아브라함이나 모세, 여호수아 등은 잘 아는데,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여러분이 한 번 시험해 보시라. 교회 다니는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누군지 아냐고 물어보시라. 만약,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맞추는 분은 성경을 좀 진지하게 읽은 분이다. 그런데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교회 문턱만 드나든 분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에 관한 규례를 내리고, 그 규례대로 성막 지을 일꾼을 택하신다. 그 사람이 바로, 브살렐이다. “내가 유다 지파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2) 브살렐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건축 장인이었다. 기술자다. 하나님의 규례대로 성막을 정교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시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3-4).

 

브살렐과 더불어서 성막제작을 위해 택함 받은 사람이 있다. 오홀리압이다.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6).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제작을 위해서, 리더로 세움 받았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감당할 일꾼을 부르시는데,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이,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를 부르신다.

 

지혜로운 마음이 무엇일까? 무엇이 자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지 아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의 토대이시고 근원이신,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이 있는 자를 부르시고 쓰신다.

 

성서정과에서 이번 주에 살펴보게 되어 있는 디모데전서의 말씀 중,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는 자.” 이렇게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는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 것과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을 족한 것으로 알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는 자족할 줄 알기 때문에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때문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따라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안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과 영생을 취하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자는 1) 선을 행하고 2)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3)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4) 너그러운 자가 된다. 브살레과 오홀리압처럼 자신의 재능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자가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 받아서 부자가 될까? 잘 먹고 잘 살까? 만사가 형통할까?’만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탐욕의 눈으로 세상 만물을 쳐다보는 속물들과 다를 바 없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왜 성막 제작자로서 택함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갈망하는 자, 그런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다. 택하셔서 당신의 일꾼 삼으신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 받아서 돈 좀 잘 벌어볼까? 출세할까? 만사가 형통할까?’ 이런 데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가?

 

브살렐과 오홀리압,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의 일꾼이니, 얼마나 일이 아름답게 진행되겠는가. 이들 외의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가 성막 제작에 전념하여, 출애굽기 40장에 나와 있는 대로, 성막 봉헌식을 갖는다.

 

성막 봉헌식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40:36-38).


뭔가?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이 만든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심을 받았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종종 길을 잃는 우리들, 어떻게 해야겠는가? 지혜로운 마음으로 성막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막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다는 것이다. 성막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살핀다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자, 광야 같은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고, 삶의 목적지(가나안)까지 안전하게 가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다른 데 한 눈 팔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 전념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지닌 자들이 되자. 그렇게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가 되어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생각을 모으고 교회를 세워 나가면, 왜 주께서 사도행전의 부흥의 역사를 우리 교회에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는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6-47).

 

우리 모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집중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가 되어 주께서 피로 값주고 세우신 교회를 잘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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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9. 18. 08:14

(중보) 기도 사역

(디모데전서 2:1-7)

 

그리스도인에게 단순히 기도는 필요한 것을 아뢰는 청탁이 아니다. 기도는 사역(ministry)이다. 사역이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이어서 (ongoing)’ 하는 것이며, 성령을 통하여 위탁 받아 교회 공동체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기도의 사역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기도를 철저하게 성령의 사역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기도 사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어떠한 사람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3년 간의 신앙교육 과정을 마쳐야 했는데, 3년 동안 매일 같이 아침 저녁으로 기도에 참여해야 했다. 그런데, 그 기도 시간에 기도를 드릴 수 있는 (offer)’ 사람은 오직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신앙교육 받는 자들은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세례 받은 자가 드리는기도를 지켜 보았다.

 

세례 교육자들은 그처럼 세례 받은 자가 기도 드리는것을 지켜보면서 기도에 대하여 배웠고, 지켜보는 동안 나도 얼른 세례 받아서 저렇게 기도 사역에 참여 해야지라는 열망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원래 이렇게 거룩한 사역이고, 성령의 사역이고, 열망의 사역이다.

 

디모데전후서는 교회를 위한 서신이다. 교회와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알려주는 지침서이다. 교회는 독립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혼자서 따로 주님을 위해무엇을 하는 지체가 아니다. 교회는 주님 안에서’, 주님에 의해무엇을 하는 지체이다. 교회는 철저하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다. (‘종속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감이 좋지않아 반감이 생길 수 있으나, 그것은 종속이라는 말에 대한 이 세상에서의 경험이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아버지에 대해서 매우 좋지 않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거리낌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한 반감은 이 세상에서의 불의한 경험 때문일 뿐, 그 단어가 지칭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러한 불의한 경험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봐야 한다. 세상에서 누군가의 종이되는 일은 속된 말로 더럽고 치사한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녀로 인정하시고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에 대하여 말해준다. 본격적인 가르침이 시작되는 디모데전서 2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한글 성경도 그렇고, 우리가 자주 보는 영어 성경(NIV, NRSV)도 그렇고, ‘첫째로 (First of all)’로 번역하고 있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가장 중요한 것은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 사역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above all or the most important thing is…)’기도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모든 이들은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 ‘저 사람은 나의 원수이기 때문에 기도를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충분히 깨닫지 못한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믿음이 적은 자이다. 그리스도의 몸(지체)가 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처럼 모든 이들을 위해기도해야 할 운명 (또는 사명)’에 처해진 자이다.

 

바울은 기도의 종류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네 가지로 나눈다: 간구(deesis 디시스, supplication)는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간구하는 기도이다(an appeal for a a particular need). 기도(proseuche 프로슈케, prayers)는 보통 탄원기도를 지칭한다. 탄원기도가 무엇인지는 시편이 잘 보여준다. 시편의 대부분이 탄원기도이다. 억울한 것, 나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탄원기도이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이다. 도고(enteuxis 엔튝시스, intercessions)는 긴급하고 담대한 요청의 기도를 말한다. 흔히 중보기도라 부른다. 예를 들어,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긴급하게 드리는 기도이다. 감사(eucharistia 유카리스티아, thanksgiving)는 은혜에 보답하는 고마움을 표시하는기도이다. 우리가 주께 드리는 기도는 이 범주 안에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거나 자신의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기도한다면서 하나님께 삿대질 하면서(또는 욕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덴마크의 유명한 실존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가 그랬다. 그는 어렸을 때 하도 힘들고 어렵고 사업이 안 되서 언덕에 올라 하나님께 삿대질 하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 사업이 너무도 잘 돼서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그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불경스럽게도 하나님께 욕하고 삿대질 한 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아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사건 때문에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 미카엘은 평생 우울하게 살았고, 그 우울 기질이 막내 아들이었던 쇠렌 키에르케고르에게 물려졌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런 동일한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은 심각하게 자신의 기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다면, 우리는 함부로 하나님 앞에서 불경스러운 기도를 드릴 수 없다.

 

2절 말씀에는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기도 사역이 나온다. 바울은 기도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기도하라고 권면한다.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2). 언뜻 보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일종의 아부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한국이나 미국이나 국가조찬기도회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실행되고 있다. 거기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기도를 통해서 관계를 잘 맺어 놓아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그들에게서 이익(유익)을 취하고자 하는 처세술이 엿보인다. 그러나 2천 년 전 로마제국 시대의 맥락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은 단순히 처세술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이고 로마제국(특별히 황제)에 대한 신앙적 도전이다.

 

주전 510년 경에 세워진 로마는 원래 제국이 아니라 공화국이었다. 두 사람의 집정관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한 체제를 유지해 오다, 주전 4~-50년 경, 우리가 잘 아는 율리우스 시저 때에 그 체제가 무너지고, 로마는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형태로 통치체제가 바뀐다. 시저가 죽은 후, 시저의 신격화가 진행되는 데, 이는 황제를 통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였다. 로마는 점차적으로 황제의 신격화를 진행하는데, 마침내 황제는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이 땅에 임한 구원자(메시아)’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인 황제의 보호 아래 들어온 모든 이들은 다른 누구가 아닌 황제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문의 말씀처럼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위하여기도하는 일은 로마황제의 보호 아래 있는 제국의 백성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제 에게기도해야지,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반역이고 이단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반역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황제(왕들이나 고관들)에게 기도하지 말고, ()위하여기도하라고 한다. 이것은 그 당시 매우 파격적인 기도의 혁명이다. 잘못하다가는 로마당국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기도의 혁명이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다른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게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5).

 

이것은 개신교가 가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할 때 쓰이는 기도신학(말씀)이다. 가톨릭 기도 전통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에게 드리는 기도가 있다. 개신교에서는 바로 이것이 가톨릭의 이단적 요소라고 지적한다.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어야 하는데, 가톨릭은 마리아를 기도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떤가? 기도 신학 측면에서 보면 가톨릭이 이단인가 아닌가?)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가톨릭은 이단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톨릭의 신학을 깊이 알지 못하는 데서 온 오해이다. (나는 가톨릭의 대변자가 아니다. 다만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고 싶은 성실하고 정직한 개신교 목사일 뿐이다.) 우선 가톨릭 기도 신학에 있어서, 마리아는 기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도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일까? 마리아가 구주 예수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에게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겸손의 표현이고 청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죄인으로서 겸손한 마음에 직접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뢰지 못하고,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부끄럽게 청탁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마리아를 통하여 기도를 아뢰는 가톨릭의 기도 신학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았다면, 부족하지만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도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차마 주님께 직접 아뢰지 못하고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아뢰는 그 겸손한 마음은 배워야 한다. 담대함과 뻔뻔함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다. 우리는 누구 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국가조찬기도회처럼 기도처세술처럼 오용하면 안 된다. 기도는 처세술이 아니라, 신앙고백이요 성령을 통한 교회의 사역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기도 사역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계속수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자기 자신을 대속물(ransom)로 내어 주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도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 받아, 하나님의 뜻(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기도는 단순히 무속신앙인이 하는 것처럼, ‘비나이다 비아니다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기도란,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어 하나님의 뜻(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이루는 일을 계속 (ongoing)’해서 하는 교회의 중차대한,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으며 끝낸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아멘.

 


예수를 간구하는 기도

 

당국자들(고관들)에 의해서 상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세상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들에 핀 백합화를 돌보시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아시며,

모든 만물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신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이 지구를 위하여, 이곳에 생명을 내린 모든 것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잃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 슬피 우는 자와 핍박 당하는 자의 복된 소식이신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주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시 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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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9. 18. 08:11

예수를 간구하는 기도

 

당국자들(고관들)에 의해서 상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세상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들에 핀 백합화를 돌보시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아시며,

모든 만물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신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이 지구를 위하여, 이곳에 생명을 내린 모든 것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잃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옵소서.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 슬피 우는 자와 핍박 당하는 자의 복된 소식이신 예수여,

우리 안에 오셔서 주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시 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6. 9. 18. 08:10

보호와 보답을 간구하는 기도

(룻기 2)

 

보호하시고 보답하시는 주님,

룻처럼, 보아스처럼 우리도 결단하나이다.

전쟁의 소문과 거룩한 윤리의 상실만을 목격하는 세상에서

희망을 잃어버리기 쉬운 연약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보아스처럼 하나님께만 마음을 둔 경건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자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감사와 찬양의 언어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행동이 감사와 찬양의 언어에서 맺는 열매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우리들의 순종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거룩한 희망을 만들어 내는 줄로 믿사오니,

룻과 보아스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폭우와 장마 속에서 할퀴인 가슴에 쓰라린 마음을 부둥켜 안으시며

우리를 다독이시는 주님,

주께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겠사오니,

신앙의 열매가 잘 익고 잘 여물게 하옵소서.

우리는 보호하시고 보답하시는 주님의 백성이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9. 14. 12:52

현실에는 두 가지 현실이 있다. 한 가지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저항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가령, 노화나 죽음 같은 것이다. 이것은 받아들여야지 저항하면 안 된다.

 

저항해야 하는 현실은, 가령, 불의나 악 같은 것이다. 이것은 저항해야지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하여 받아들이면 인생은 그때부터 바람 잡는 인생이 되고 만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9. 14. 12:52

무엇이든지 '놀이' 그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 그것은 욕망과 욕심이 된다.

욕망과 욕심은 자기 자신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자기를 파괴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놀이' 안에 머물러 있게 하라.

하나님의 창조도 놀이였을 뿐이니...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9. 14. 12:51

상대방의 시간과 노동은 돈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야 한다.

그래야 거기에서 서로 만족하는 달콤한 열매가 맺힌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9. 14. 12:50

'나 자신'이 되는 일은 참 피곤한 일이다.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즘 시대의 구호는 한 개인을 끊임 없는 자책과 자학으로 몰아 넣는다. 자책과 자학으로도 '나 자신'이 되지 않을 때, 한 개인은 결국 우울증에 걸릴 수 밖에 없다. 현대인의 지병, 우울증. 여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자책과 자학으로 몰아세우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 외에 다른 적이 없는 현대인의 삶의 자리. 그래서 현대인은 늘 외롭고 피곤하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피로사회, 67)

 

정말이지, 피곤해죽겠다.

 

이 피로에서 해방되기 위해 제시되는 것은 '무위의 피로'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사상과 기독교(또는 유대교)의 안식일 사상이 엿보인다. '쓸모 없는 것의 쓸모', '놀이의 시간', 결국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다움의 세상은 '사색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탈피로사회 또는 '오순절적 피로사회'이다. 이런 사회는 '그 무엇 때문'에 지치는 게 아니라, '그 무엇을 향해' 지치는 피로사회이다.

 

'나는 너때문에 지쳤어!'라는 말과 '나는 너를 향해 지쳐있어'라는 말의 뜻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에너지(영감)를 빼앗긴 상태이지만 후자는 에너지(영감)가 솟는 상태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피곤한가? 왜 피곤한가?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16. 9. 14. 12:49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지 말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삶은 곧 사랑이므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은 죄이다.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일은 의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사는 일은 구원이다.

죄는 아픔을 만들고

 의는 슬픔을 만든다.

그러나 구원은 기쁨을 만든다.

그래서 구원은 기적이다.

그 기적은 하나님만 베푸실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은 너도 살고 나도 살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사는 자는 구원 받은 자이다.

이미 천국을 사는 자이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