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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6. 14:50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누가복음 2:25-33)

 

작년에 한창 화재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 선교사 두 명이 있었다. 소록도에서 평생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과 마가레트(70) 수녀다. 그들은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피다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다

 

그들은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았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 왔을 땐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이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 봐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땅이 되었다. 두 사람의 방문 앞에는 그들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한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신문 기사에서 발췌 및 편집)

 

존경스러운 사랑의 삶을 사신 이 두 분들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사랑에 대한 이런 찬양이 생각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

 

어떤가? 사랑은 이런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것에 머무는가? 이것은 굉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오해할 요지가 있다. 사랑을 도덕으로 생각할 요지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적인 삶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Love is eternal. No matter how short it was. That's the mystery of love." - Reverend Junsik Chang *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 장준식 목사

 

* 이것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한 후배의 문병 중에 내가 말씀을 전하며 한 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후배에게사랑의 영원성이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후배는 이 문구를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기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오늘 말씀을 보자. 유대인은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난지 팔 일 만에 할례 받으러 성전에 간 것이다. 그때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하신 구원을 보는 장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래서, 도덕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한 아기가 태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 교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은 상대방에게시간을 기꺼이 내주는 행위요, 상대방의 시간을 침범해도 된다고 허락 받은 일종의 자격증이다. 그러므로 남의 시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 상대방의 시간에 침범하려면 먼저 그를 사랑하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의 시간에 침범하는 것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범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은)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원을 경험하게 한다. 즉 초월을 일구어 낸다. 초월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통로이다.

(요즘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라.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부인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또는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친구나 이웃이 있는가?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얼마나 많은 미움 가운데 사는가.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합일의 상태로 인도한다. 영생 (하나님의 생명), 영원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말에서 (spirit)’은 하나님을 말한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다가선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 사랑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한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실천한다. 물론 우리의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때론 성공하고, 때론 실패한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의 사랑의 삶을 보면 그냥 멋지기만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엄청난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목원대학교를 세우신 Charles Stokes(도익서 박사)의 사모님(이명은, Marilyn Stokes)이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선교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늘 고향이 그리워서 갈등하고, 삶의 환경이 힘들어서 갈등하고, 그렇게 인간적 갈등 가운데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은퇴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도 똑 같은 고백을 한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기까지 하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어두운 면이 보이는데, 그것을 껴안고 보듬어 주는 일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릴 적 사랑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라.

 

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잘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맡겨주시고 만나게 해주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잘 해주는 일은 굉장히 힘들고 어렵다. 그런데 사랑하면, 그 사람의 필요가 보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해줘야 하는지 보이고,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나는 부교역자들에게 늘 이런 주문을 했었다. ‘교회 일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일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담임목사를 사랑해 달라.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보일 거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일 하려 들지 마시라.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면, 문제가 생긴다.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남이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꼴보기 싫고,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기대했던 리워드가 안 오면 시험에 든다. 교회에서 일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를,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시라. 사랑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눈에 보인다. 그리고 유익을 구하지 않기에 시험에 들 일도 없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려고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했다. 예수님이 무어라 하시는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한 가지가 무엇인가? 사랑이다.


가인(농부)과 아벨(목자)의 제사 중,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는가? 가인은 곡식 바치고,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대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무 것이든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리면 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아니냐의 문제, 사랑으로 제사(예배)를 드렸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가인은 자기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리워드가 안 오자, 동생을 죽인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동생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열심이 결국 살인으로 간다. 그렇다고 뺀질 대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WORK’ 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로 가르쳐 주신다. 큰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큰 아들이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고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되,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 뉘우치고 갔으니,”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사랑은 말이 아니라 ‘WORK’ 이다. 여러분의 시간과 몸을 주는 행위가 사랑이다.

 

사랑은 ‘WORK’ 이다. 사랑은 시간과 몸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성육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다(대속).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을 먹는다. (살모사, 사마귀 등)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있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시가 있다.


꽃에 해 둔 메모

- 김용과 김경주의 만남


오래도록 너무 많은 별을 보아서 불행한 꽃,

그 꽃에 해 둔,

웃는 얼굴이 유난히 슬펐던

한 사내의 메모,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여야 한다.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슬픔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신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가?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사랑하다, 눈물 글썽이며 세상을 떠나는 자가 되자.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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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