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시각과 청각의 미학에서 촉각과 후각의 미학으로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신앙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개신)교회에서 매우 부정한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교회 와서 또는 매체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매체를 통해 듣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 있다. 원래 매체를 거치면 매체 건너편에 있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의식은 그렇게 인식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TV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존재를 유명인(celebrity)으로 인식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러워한다.

 

롤랑 바르트는 미학을 논하며 미학의 요소를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한다. 미학에는 촉각이나 후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만 접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아름답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각과 후각으로 하는 것이다.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점점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 있는 관계는 애잔할지는 몰라도 현실성이 없다. 타자의 존재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넘어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갈 때 온전히 파악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 연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불협화음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의 실체를 맞닥뜨리며 그 존재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에게서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에 불과하다. 귀만 커져 마음이 완고할 뿐 아니라, 박해와 핍박을 한 시도 못 견디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취약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학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가톨릭의 예배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미사(Mass)에 참석해 사제가 들어올리는 빵과 포도주를 보며, 사제가 읊조리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제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 행위를 더 많이 보고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루터는 중세의 그러한 미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가 아닌, 촉각적이고 후각적인성도의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루터는 미사(특별히 성만찬; 개신교에서는 미사를 예배라 한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내어 주신 몸을 끌어 안아 그 안에서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 강조했다. 성도의 교제는 멀리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땀 냄새를 맡는 것이다.

 

현대(개신)교회의 신앙인들은 매체를 통해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보고 듣는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를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설교 듣는 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는 설교 동영상은 본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부득이한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의 영적 조화를 돕기 위한 봉사의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듣는 행위는 청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작용이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5). 이 말씀에서 보듯이, ‘듣는 행위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지, 귀만 쫑긋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겠으나, 성경 자체가선포되고 기록된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말씀을 잘못 해석하느니 그냥 읽는 게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신앙은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보고 듣는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신앙생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 안고, 사느라 거칠어진 성도의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피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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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6. 12. 17. 12:47

그리고, 비가 왔다

 

시선이 마주치기 전까지

구름은 움직이지 않는다

엄마는 신발을 들고

아가는 엄마를 든다

목인사를 건네며

바삐가는 바람에게

길을 묻는다

낙엽이 대신 대답한다

친구가 오지 않아 슬펐던 가을은

장마같은 눈물을 남기고 떠나갔다

가늘어진 목구멍 사이로

저녁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산등성이에 다다른 하늘은

구름과 시선을 맞춘다

 

등을 더듬는 구름아

그건 산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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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17. 12:45

불신과 믿음의 변증법

(마가복음 5:35-6:6)

 

오늘 말씀은 믿음과 불신이 충돌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본다. 믿음은 한계(불신, 죽음, 친숙함)를 뛰어 넘어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는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 그 사이에 낀 혈루병 여인, 그리고 다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회장당 야이로는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을 고치는 장면을 보고,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얼른 가시면 우리 딸이 죽지 않을거야.’ 그러나, 가는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저 절망에만 휩싸였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곁에선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 “두려워하지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à 절망적인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이 위로가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기억해 두면 좋은 말씀이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였다.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떠드는 것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훤화함으로 번역되었던 단어이다. 그리고 영어로는 ‘commotion’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두려울 때, 정신적인 동요나 흥분이나 소란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 사람의 마음을 예수님이 봤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계 상황에 부닥쳤다. 그들은 더 이상 그 뒤나, 그 이후를 못 본다. 절망은 그때 다가온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 절망이다. 그들은 야이로의 딸에게 임한 죽음을 보고, 절망했다. 그 뒤나, 그 이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적 혼란을 느끼며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봤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 여기서 떠들며 우느냐는 왜 시끄럽게 우느냐는 뜻이 아니다. 이는 왜 너희들이 한계 상황에 부닥쳐 그 뒤를 보지도 못하고,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왜 그렇게 절망하며 안절부절 못하느냐는 말씀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정말 멋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보셨다.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다. 좀 일이 안 되면, 좀 일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하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지만,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을 비웃는다. 그들의 비웃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그들의 불신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비웃음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경험했을 뿐이다. 그들이 경험한 한계는 죽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 때문에 불신에 쌓인다. 그들의 불신은 그렇게 얼토당토한 것만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이것은 먹을 게 없으면 굶어야 했던 노인 세대와 먹을 게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는 젊은 세대와의 간격보다 더 큰 간격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렸을 때는 먹을 게 없어서 굶었어. 손자: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드시지 왜 굶으셨어요?

 

이러한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한계를 경험한 자들에게 박힌 불신과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행하실 거라는 믿음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40절 말씀을 보자.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은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사…” 그렇다.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들이 바로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이었다. 아이의 부모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간절함이 있게 마련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벌이실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을 간절히 믿었다. (우리도 우리 교회에 대하여, 부모와 제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드디어, 불신과 믿음의 간격이 메워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예수님의 이 한마디이다.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일은 단순히 죽은 소녀를 살게 해서 그의 부모를 기쁘게 하고,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다. 12살 먹은 여자 아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지만, 그는 머지 않아 다시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궁극적인 복음이 될 수는 없다. 12년 사나, 120년 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다른 게 뭐가 있는가? 우리에게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과 믿음 사이를 메워주는 궁극적인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다음 전개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활동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고향으로 간다. 우리는 거기가 나사렛이란 동네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은 놀란다. 그런데, 그들의 놀람은 믿음의 놀람이 아니라 불신의 놀람이었다.

 

예수에 대한 의문의 서술들이 펼쳐진 후, 마지막에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단어가 등장한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배척하다는 믿음과 반대되는 반응이다.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의 직업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고향 사람들은 그와 어려서부터 함께 컸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6:4).이는 다른 곳에서 존경 받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고향에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친숙함이 모욕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다. 친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가를 몰라볼 때가 많다. 특히 가족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가장 인정을 못 받는 부류가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은 참으로 특이한 집단이다.

 

또한 가족 외에, 나와 더 친숙한 부류가 있다. 누구인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어떠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말라. ‘못해요, 안돼요하던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을 때 어떤 일을 감당하게 될지, 아무도, 나 자신도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의 한계를 보았다. 그 한계는 불신을 가져왔다. 그것은 죽음친숙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개의 한계는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죽음에 친숙하거나, 또는 친숙해서 죽어 있거나,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토록 깨어 있으라!”고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친숙하거나, 친숙해서 죽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깨워보자. , 죽음의 한계(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갇히는 것)에 부닥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친숙해져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죽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면, 그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Do not be afraid any longer, only believe.” 그러면, 분명,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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