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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01.2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1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2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진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뜻과,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선하다(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어떠한 이유에서 건 미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개념이 생긴다. 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언어로 다시 옮기자면, 죄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해 보자.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지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는 선악의 판단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다.

 

(어제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자백을 강요하고 있어요!” 이 뉴스를 접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페이스북에 한 마디 남겼다. “그러면 자신이 한 짓은 민주주의인가?”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이 된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선은 '내 욕망의 성취'일 뿐이며 욕망이 성취되지 않고 좌절되면 그것이 악이다. 죄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사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판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과 악이 사사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선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규정한다. 이제 인간은 악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게 바로 죄이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나온다. 몹시 배고픈 여유가 길을 가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여우는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따먹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서 결국 그것을 못 따먹었다. 여유는 포도 따 먹는 것을 단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일거야!”)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따먹고 싶은 맛 있는 포도였다가, 자신에게 불리하고 따먹지 못하게 되니까 신포도가 되는 것이다. 포도는 그대로인데,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위치냐에 따라서 그 포도의 선과 악이 갈린다.

 

결국 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처음 본 것은 자기들이 벗은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보였다는 뜻이다. , 자기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나스키소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 이야기에서 나르시스즘이 생겨났다.

 

(나르키소스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 우물에 빠져 죽는다. (이 외에도 여러 판본이 있다. 그것이 우물에 비친 모습인 것을 알고, 굶어 죽었다는 판본, 또는 자살했다는 판본) 나르키소스의 뜻은 또는 무감각이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은 모습이고, 자기 이외에 타자 또는 사물에 대하여 무감각해진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해져 자기 자신 밖에 안 보인다.)

 

죄에 빠지면, 즉 선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애에 충만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불화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핑계가 그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거니셨다. 그들이 죄 짓기 전에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는 행위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가 그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즉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핑계를 댄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죄를 전가 시킨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핑계를 댈까? 자기애 때문이다. 자기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선과 악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선과 악의 판단이 사사로워진 것이다. 자기는 선하고, 남은 악해 보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은 선하게 판단하고, 남은 악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는 잘못 없고, 남이 잘못한 것이다.

 

이게 참 비극이다. 왜 그런가? 아담과 하와가 어떠한 관계인가?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잠이 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보고 아담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결혼식 때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죄가 들어가니까 아담에게서 하와가 분리된다. 이들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게 된다. 아담은 자기 살겠다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아내를 팔아 먹는다. 이런 현상이 하와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신은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뱀은 악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듯이,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31절에서도 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죄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부정하게 한다. 죄는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든다.

 

죄는 결국 불화를 조장한다. 죄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모든 것이 불화가 조성된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와와 뱀, 즉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구원이란, 화해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화해란 다른 말로 해서, 자기애 때문에 자기 자신만 보던 눈을 나 아닌 다른 피조물(타자)에게로 돌리는 것, 피조물을 넘어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구원이란, 화해란,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물으실 때 숨어서 자기 자신만 보는 게 아니라,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서 그들을 돌보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 공과 3과에서 묻는)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은 위치 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 정보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구글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불화 가운데 있냐, 화해 가운데 있느냐.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 있느냐, 나 몰라라 하고 있느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뵙고 있느냐, 숨고 있느냐.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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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고린도전도1:10-18)

 

에큐메니컬 주일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

 

요즘 굉장히 이 용어가 오해 받고, 잘못 쓰인다. 복음주의의 반대인 것처럼 쓰인다. 그래서 복음주의 진영(WEA)과 에큐메니컬 진영(WCC)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복음주의는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보수주의고, 에큐메니컬은 예수 외에 다른 것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2013 WCC 총회가 한국 부산에서 열렸을 때 한국의 보수교단에서는 WCC 총회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해고 무지에서 비롯된 웃픈일이다.

 

에큐메니컬의 진정한 의미는 복음을 위해’ (분열된) 교회가 연합하고 일치를 이루자는 뜻이다. 공산당처럼 커다란 한 덩어리 조직을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다. 연합기구를 만들어서 무슨 조직처럼 힘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효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고스란히 지키며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교 율법과 전혀 상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문화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유학 와서 에모리에서 수업 듣는데, 재채기 하면 옆 사람이 왜 그랬슈?”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왜 그랬슈가 아니고, ‘갓 블레슈였다. 미국인들은 재채기 하면 영혼이 날아간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갓 블레슈해준단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재채기를 시원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채기는 힘차게 해야 제 맛이다. 이처럼, 문화가 다른 사람한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분리된 교회가 안디옥 교회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모교회이지만 유대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한 분파로 머물지 않고,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의 종교가 된 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그러한 일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다. 일부러 분열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유대인들 중심의 복음서이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 중심의 복음서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의 복음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들(헬라철학)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용어들이다. (로고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 없이 많은 교회의 분열이 있었다. 그 중에는 곱틱교회와 영지주의 교회도 있다. 곱틱교회는 쉽게 이집트교회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는 곱틱어를 썼는데, 그 때문에 고틱교회라 불린다. 이들은 단성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는, 예수는 100% 인간, 100% 신이라는 주장이다. Vere homo, vere deus라고 한다.

 

영지주의 교회의 실체는 이집트의 나그함마디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데, ‘나그함마디 문서는 복음을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 문서를 말한다. 이집트 곱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사해문서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발견 중 하나라고 불린다.

 

그 이후, 교회는 계속 분열한다. 가장 유명한 분열은 1054년에 있었던,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교회 간의 분열이다.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이다. 그 당시, 동로마제국의 교회와 서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어떻게 발출하느냐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한다고 주장했고, 서로마제국는 성령이 성부와 그리고 성자로부터발출한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이 수 없는 나머지, 서로의 교회는 서로를 파문한다. 즉 서로 이단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 1517년 로마가톨릭교회는 또 한 번의 분열을 겪는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태동인 종교개혁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 되는 해인데,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 중이다.

 

개신교는 그 이후에 엄청난 분열을 겪는다.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가 생겼고,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주의(우리가 잘 아는 장로교)가 생겼고,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교파가 바로 영국의 성공회이다. 앤 볼린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헨리 8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캐서린과 이혼한다. 그것을 교황청이 인정해주지 않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여 만든 교회가 성공회이다.

 

영국의 성공회 신부로서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를 변화시킨 메토디스트 무브먼트(Methodist Movement)를 일으킨 존 웨슬리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회다. 원래, 존 웨슬리는 메토디스트 무브먼트를 영국 성공회에 남아서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하나의 교단이 되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발달되어 있다.

 

한국에 개신교는 1884-5년에 들어왔는데, 미국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함께 인천 제물포 항을 통해서 들어왔다. (누가 먼저 땅을 밟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정황을 미루어 보아, 아펜젤러 목사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펜젤러 목사는 결혼한 상태여서 부인과 함께 왔다. 미국의 Lady First 문화를 생각할 때, 아펜젤러가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을 것이다.) 아펜젤러는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갔다.

 

이 둘이 서울에 세운 첫 교회가 각각 새문안교회(장로교)와 정동제일교회(감리교)이다(1887). 그후, 한국 감리교는 분열을 안 하는데, 한국 장로교는 수도 없이 분열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WCC 가입 문제로 예장통합(장신대)과 예장합동(총신대)이 나뉜 것이다. 그 후로,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200여개 넘는 교단으로 나눠져 있다.

 

개괄적인 역사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분열되었는지 살펴보았지만, 교회의 분열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대표적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크게 네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이들 파벌은 모두 특징이 있다. 바울파는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 철학 사상에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볼로파는 학문적 성향이 강해서 철학과 수사학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이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좋아했을 것이다.) 게바파는 유대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율법 전통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는 쉽게 말해 중도파, 또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파였을 것이다. 특정 인물에게 속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그룹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은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하는 삶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으로 볼 때는 가장 정통 같지만, 성향으로 볼 때는 이단적인 경향이 가장 강한 분파이다. 직통계시 같은 거 하는, )

 

이러한 분파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근본적으로 시끄러웠다. 교회가 시끄러운 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제다. 그러니, 교회가 시끄러운 것 가지고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오히려, 안 시끄러운 게 이상한 거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낙담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너무 낙담하지 말고 너무 시험에 들지 마시라. 원래 사람이 모이는 곳은 다 시끄러운 법이다.

 

다만, 에큐메니컬 주일을 맞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얻었으면 좋겠다.

 

고린도교회의 분열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핵심은 이거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따라해 보자.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게 인간인가? 우리가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니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공산당원인가? 우리가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 모시는 북한 주민인가? 도대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일차적으로, 이들의 분열은 단순히 파벌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 정경으로 채택된 복음서도 4개나 된다.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복음서도 엄청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 문서(나그함마디 문서)도마복음서이다. 중국집에 가면, 짬뽕 먹고 싶은 사람이 있고,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어야 하니까, 우리가 함께 중국집 가면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하나로 통일해서 먹어야 하는가?

 

본문에서 쓰인 분쟁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스키마이다. 이는 , 간격, 분열, 불화를 뜻한다. , 어떠한 이슈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하는 것(불화)’이 문제인 것이다. 중국집 갔는데, 짬뽕 먹는 사람이 짜자면 먹는 사람보고, 짜장면 먹는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어? 이 상종 못한 놈!”이러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쓰인 합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다르티조이다. 이것은 원문에서 분사 완료 수동태의 형태(과거의 한 시점 표현)로 쓰여졌는데, 이는 그들이 분쟁 이전의 온전했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을 바라는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합하라라는 말은 짬뽕 먹을지, 짜장면 먹을지 통일해서 한 가지만 먹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리고 이것은, 서로 양보해서 그냥 모두 짬짜면먹으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짬뽕 먹는 사람은 짜장면 먹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짜장면 먹는 사람은 짬뽕 먹는 사람 인정해 주라는 뜻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먹느냐는 것이다. 중국집 가서, 짬뽕 먹는 사람이나, 짜장면 먹는 사람이나 왜 그것을 먹는가? 짬뽕을 좋아해서? 아니면 짜장면을 좋아해서?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중국집 가서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먹는 이유는, 배고파서이다.

 

, 그리스도인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아주 근본적인 것, 십자가의 도 때문이다. 에큐메니컬이란 그런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는 것이다.

 

엘까미노 리얼에 있는 옛날 짜장면집에 가서 우리 모두가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서로 묻는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묻는 거 자체가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국집에 왜 왔겠는가? 식당에 왜 가나? 배고프니까 가는 거다. 그런데, 밥을 먹다 보니, 김 집사가 내가 먹는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가서 따진다. ‘당신 왜 짬뽕 안 먹고 짜장면 먹어? 정말 웃겨? 웃기는 짬뽕이네!’ 그러면서 둘이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갈라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물어보자. 교회에 왜 왔는가? 교회 와서 서로에게 여기 어쩐 일이세요?’라고 물으면 정말 이상한 것이다. 교회에 왜 왔는가? 오늘 말씀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의 도때문에 우리 모두는 교회에 온 것이다.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연합하고 일치하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것이 주님의 뜻 아니겠는가?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은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이념처럼 생각하지 말라. 복음주의 진영, 에큐메니컬 진영, 이런 큰 개념을 생각할 것도 없다.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고 협력하고 양보하고 용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문제다.

 

짬뽕 좋아하시는 분?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 짬뽕 좋아하시는 분들만, “짜장면 맛있게 드세요!”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들만, “짬뽕 맛있게 드세요!” 다 같이 따라해 봅시다. “우리, 탕수육 같이 시켜 먹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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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