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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18 예수가 온다
  2. 2017.12.18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8. 15:53

예수가 온다

(요한복음 1:19-28)

 

2005년도에 출간된 <보랏빛 소가 온다>라는 마케팅 책이 있다. 마케팅 분야에서 반향을 일으킨 책인데, 그 책을 보면,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Remarkable”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Remarkable”두드러지게 눈에 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책 제목이 그것을 말해준다. “Purple cow”, 보랏빛 소를 본 적 있는가? 아마도 소 무리 속에 보랏빛을 띈 소가 있으면, 말 그대로 두드러지게 눈에 띌것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 살고 있는 기업, 또는 개인은 어떻게 해서든 ‘remarkable’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Remarkable’한 존재가 되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Remarkable’한 존재에 대한 갈망 뒤에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지 못하고, 희망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 마디로 인생이 순간순간 지옥 같다고 느낀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책에 보면, ‘세헤라자데라는 여인이 나온다. 그 여인의 임무는 왕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왕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다음 날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세헤라자데에게 밤이 오는 것은 죽음과의 사투였다. “왕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죽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일야화는 세헤라자데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지어낸 재미난 이야기이다. 천일동안 세헤라자데의 인생은 얼마나 지옥같았을까.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도 그에겐 기쁨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그 날’, 또는 그 시점’, ‘그 사람을 기다리며 가슴 졸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남자들은 대개 군대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하루 중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은 점호시간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 점호시간은 무엇 하나 꼬투리 잡아 얼차려하는 시간이었다. 가장 힘든 얼차려 중 하는 원상폭격(대가리박기)’이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치약 뚜껑을 머리에 놓아두기도 한다. 남자들에게 점호시간이 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오늘 말씀은 무엇인가 오는이야기이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 있는 기본적인 기다림은 통일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그런데, 유대인들 마음 속에 있는 기본적인 기다림메시아였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유대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 이렇게 묻는다. “네가 누구냐?” 이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의 신분을 묻는 게 아니다. 이것은 네가 메시아냐?’라고 묻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던 요한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네가 누구냐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다. 물로 세례를 주는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유대인들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요한의 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시아를 갈망한다. 누군가 와서 나를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 사람들이 끊임없이 엔터테인먼트를 갈망하는 이유는 누군가 나를 웃겨주었으면 좋겠다는 갈망 때문이다. 내 안에서 웃을거리를 찾을 수가 없으니, 밖에서라도 찾고 싶은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범죄도시>라는 영화가 히트를 쳤다. 영화에서 주연으로 나온 마동석은 그 영화를 통해서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마동석은 내가 살던 컬럼버스 조지아의 컬럼버스주립대학교를 나왔다. 나랑 동향사람이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 내용이 별거 없다. 아주 흔한 영화소재다. 강력반 형사들이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하는 영화다. 그런데, 왜 그 흔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할까?

 

그게 바로 메시아니즘의 한 단편이다. 사람들은 힘 센 누군가가 나와서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주기를 갈망한다. 영화에서 마동석은 천하무적 강력반 형사로 나오는데, 사람들은 메시아같은 마동석에 자신들의 갈망을 투영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범죄도시>같은 평범한 영화가 큰 인기를 끈 것을 보면, 요즘 한국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벨론 포로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했다. 옛날 다윗왕조 때와 같은 찬란한 왕조를 세우지 못하고, 그저 명맥만 유지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누군가 와서 자신들을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구원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집요하게 묻는 것이다. “네가 누구냐?”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인생이 위험하다. 사기꾼의 출현은 바로 그때 일어난다. 사기꾼은 상대방의 메시아니즘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안다. 사실, 사기꾼이 수완이 좋아서 사기를 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당하는 사람의 인생이 절박하기 때문에 사기꾼의 농간이 통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메시아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정직이고 신앙이다. 사람들은 쉽게 메시아를 갈망할 뿐 아니라, 쉽게 자기 자신을 메시아로 둔갑시킨다. 이러한 심리를 가장 잘 이용하는 사업이 할리우드이다. 요즘 미국의 영화 산업은 끊임없이 히어로를 생산해 내고,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계속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심리가 어떠한 상태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요한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23). 요한은 자기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도 표현하지 않고, 자기를 소리로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자신을 달이 아닌 손가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킬 뿐, 달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손가락이라고 말한 요한은 필연적으로 증언(소리)’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며, 진짜 메시아를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 27). 요한이 증거하는 내 뒤에 오시는 그이는 누구인가? 성경은 그를 가리켜, “예수라고 말한다. , 메시야가 온다. 그의 이름은 예수이다. 이를 합하면 이러한 문장이 된다. “예수가 온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구약의 말씀은 이사야서 61장이다. 이사야서 61장은 누가복음의 말씀에 다시 등장한다. 회당에 간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낭독한 뒤, 그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한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1-3)

 

성경은 온통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성경 속에서 메시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것은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성경의 메시아가 바로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증언이 참된 증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 말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인생, , 생명)을 다른 무엇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에게서 건 사람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요즘 기업이나 요즘 사람들은 ‘remarkable’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어떠한 기쁨도, 희망도, 감사도 없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그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가. 자기 자신을 눈에 띄는 존재로 서게 하려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고, 얼마나 인생을 거기에 소모할 것이며, 성공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 것이며, 실패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삶을 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remarkable’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 피곤한 인생을 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예수에게 걸었기 때문이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함께 봐야할 서신서의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특별히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성경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제로 깔고 있다. 메시아가 올 것이다. 메시아가 왔다. 메시아가 다시 올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전제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무엇도 말이 안 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억지로 기뻐하거나 소망하거나 감사할 수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막 기쁘거나 싱글벙글한 사람은 교회 오면 안 되고 병원에 가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병원에 가지 않고 교회에 온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소망하고) 범사에 감사하는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밑도 끝도 없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메시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걸어 둔 메시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 예수가 온다. 예수는 오고 계실 뿐 아니라, 이미 오신 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기뻐하고 감사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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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8. 15:48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시편 62:1-12)

 

성경의 풀네임은 성경전서라고 한다. 앞의 두 글자만 따서 성경이라 부르기도 하고,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따서 성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이든, ‘성서든 모두 성경전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라는 말을 고집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성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마치, ‘성경성서가 따로 있는 듯이 말이다. 그것은 성경전서에 대한 큰 오해다.
(
한국 교회는 기독교예수교로 크게 나뉘었다는, 웃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와 예수가 서로 싸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도 답답해서 그것 때문이라도 빨리 오실 듯 하다.)

 

동양문화에서 ()’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위키백과)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는 성경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발전한 것이 성경공부이다. 성경공부를 안 하는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닐 정도이다. 개신교회는 성경에 죽고 성경에 산다. 그런데, 성경공부가 발전하면서 잃어버린 전통이 있다.

 

요즘엔 성경공부를 하면서 눈으로 읽으며 밑을 그어가면서 성경을 읽는다. 그러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오면 노트를 한다. 그런데, 원래 경은 소리를 내어 낭독하는경전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 좋다. 예로부터 경전은 그렇게 하면서 마음에 새겼다.

 

구규(九竅)라는 것이 있다. 사람 몸에 있는 9개의 구멍을 말한다. , , , , 그리고 항문과 요도가 그것이다. 눈으로 읽으면 2개의 구멍만 작동하지만, 낭독을 하면 7개의 구멍이 작동한다. ()경은 그렇게 사람 몸의 온 규(구멍)을 작동시켜 뇌와 온 몸에 파동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은 몸을 흔들면서 암송해야 한다. 성경이 산문체가 아닌 운문체로 여전히 보존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낭독과 암송, 그리고 흔들며 읽은 습관이 사라진 것 때문에 교회가 말씀을 잃고 굳어져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 성경 독서법)

 

오늘 말씀 같은 경우도 그냥 눈으로 읽고,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에 밑줄만 친다면, 오늘 말씀이 가진 위력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실제로, 몸을 흔들며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낭독하면 그 울림이 완전히 다르다. 마음에 뜨거움과 확신이 스며든다. 눈물이 나고 힘이 난다. 하나님이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며 나의 울부짖음을 옆에서 들어주시는 분처럼 느껴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얼마나 힘 있는 말씀인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어 댄다. 그럴 때, 갈대처럼 흔들리는 영혼을 향해, 큰 소리로 이 말씀을 낭독하면, 영혼이 잠잠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기는 것이다. 심비는 마음 속에 있는 비석이다. 오장육부에 말씀이 새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심비에 말씀을 새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대로, 암송과 낭독이다.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9절이다. 9절 말씀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가르쳐 준다.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한국어 성경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Lowborn men are but a breath, the highborn are but a lie, if weighed on a balance, they are nothing; together they are only a breath”(NIV). 번역하면 이렇다. “태생이 천한 사람도 입김이고, 지체 높게 태어난 사람도 거짓이다. 그들을 저울에 달아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 하나의 입김에 불과하다.”(사역).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모두 입김보다 가벼운존재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가난한 사람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와 박힌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음을 더 잘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가난한 자보다는 부유한 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인 듯 하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10). ‘포악, 탈취이러한 단어는 부유한 자가 가진 권력(power)’를 말한다. 대개 권력을 쥐면,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위대한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

(얼마전 발표된 뇌과학자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뇌파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의지한다는 뜻이다.)

 

고대시대는 태생이 비천한 자와 태생이 고귀한 자의 구분이 명확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그들의 귀에 더 잘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처럼 태생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와 우리처럼 선진국에서 평균이상의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더욱더 암송하고 낭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자기가 구원이고 피난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칭 메시아가 즐비한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구원이고 피난처로 삼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명확하게 들어야 하는 말씀은 8절의 말씀이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8). 그리고 셀라가 나온다. 충분히 멈추어 서서 새겨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Trust in him at all times, O people, pour out your heart to him, for God is our refuge.”(8). 모든 시간, 언제든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께 네 마음을 쏟아 놓으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토하고 있는가. 우리의 영혼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 다른 것에 마음을 쏟아 놓으니, 우리의 영혼이 잠잠하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영혼에 큰 소리로 외쳐보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영혼아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으라! 하나님만이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시라! 권능이 하나님께 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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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