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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12.18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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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7.12.04 기다리는 복
  5. 2017.12.02 하나님이 피난처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8. 15:53

예수가 온다

(요한복음 1:19-28)

 

2005년도에 출간된 <보랏빛 소가 온다>라는 마케팅 책이 있다. 마케팅 분야에서 반향을 일으킨 책인데, 그 책을 보면,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Remarkable”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Remarkable”두드러지게 눈에 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책 제목이 그것을 말해준다. “Purple cow”, 보랏빛 소를 본 적 있는가? 아마도 소 무리 속에 보랏빛을 띈 소가 있으면, 말 그대로 두드러지게 눈에 띌것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 살고 있는 기업, 또는 개인은 어떻게 해서든 ‘remarkable’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Remarkable’한 존재가 되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Remarkable’한 존재에 대한 갈망 뒤에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지 못하고, 희망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 마디로 인생이 순간순간 지옥 같다고 느낀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책에 보면, ‘세헤라자데라는 여인이 나온다. 그 여인의 임무는 왕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왕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다음 날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세헤라자데에게 밤이 오는 것은 죽음과의 사투였다. “왕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죽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일야화는 세헤라자데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지어낸 재미난 이야기이다. 천일동안 세헤라자데의 인생은 얼마나 지옥같았을까.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도 그에겐 기쁨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그 날’, 또는 그 시점’, ‘그 사람을 기다리며 가슴 졸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남자들은 대개 군대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하루 중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은 점호시간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 점호시간은 무엇 하나 꼬투리 잡아 얼차려하는 시간이었다. 가장 힘든 얼차려 중 하는 원상폭격(대가리박기)’이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치약 뚜껑을 머리에 놓아두기도 한다. 남자들에게 점호시간이 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오늘 말씀은 무엇인가 오는이야기이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 있는 기본적인 기다림은 통일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그런데, 유대인들 마음 속에 있는 기본적인 기다림메시아였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유대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 이렇게 묻는다. “네가 누구냐?” 이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의 신분을 묻는 게 아니다. 이것은 네가 메시아냐?’라고 묻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던 요한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네가 누구냐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다. 물로 세례를 주는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유대인들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요한의 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시아를 갈망한다. 누군가 와서 나를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 사람들이 끊임없이 엔터테인먼트를 갈망하는 이유는 누군가 나를 웃겨주었으면 좋겠다는 갈망 때문이다. 내 안에서 웃을거리를 찾을 수가 없으니, 밖에서라도 찾고 싶은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범죄도시>라는 영화가 히트를 쳤다. 영화에서 주연으로 나온 마동석은 그 영화를 통해서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마동석은 내가 살던 컬럼버스 조지아의 컬럼버스주립대학교를 나왔다. 나랑 동향사람이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 내용이 별거 없다. 아주 흔한 영화소재다. 강력반 형사들이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하는 영화다. 그런데, 왜 그 흔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할까?

 

그게 바로 메시아니즘의 한 단편이다. 사람들은 힘 센 누군가가 나와서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주기를 갈망한다. 영화에서 마동석은 천하무적 강력반 형사로 나오는데, 사람들은 메시아같은 마동석에 자신들의 갈망을 투영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범죄도시>같은 평범한 영화가 큰 인기를 끈 것을 보면, 요즘 한국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벨론 포로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했다. 옛날 다윗왕조 때와 같은 찬란한 왕조를 세우지 못하고, 그저 명맥만 유지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누군가 와서 자신들을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구원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집요하게 묻는 것이다. “네가 누구냐?”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인생이 위험하다. 사기꾼의 출현은 바로 그때 일어난다. 사기꾼은 상대방의 메시아니즘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안다. 사실, 사기꾼이 수완이 좋아서 사기를 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당하는 사람의 인생이 절박하기 때문에 사기꾼의 농간이 통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메시아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정직이고 신앙이다. 사람들은 쉽게 메시아를 갈망할 뿐 아니라, 쉽게 자기 자신을 메시아로 둔갑시킨다. 이러한 심리를 가장 잘 이용하는 사업이 할리우드이다. 요즘 미국의 영화 산업은 끊임없이 히어로를 생산해 내고,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계속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심리가 어떠한 상태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요한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23). 요한은 자기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도 표현하지 않고, 자기를 소리로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자신을 달이 아닌 손가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킬 뿐, 달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손가락이라고 말한 요한은 필연적으로 증언(소리)’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며, 진짜 메시아를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 27). 요한이 증거하는 내 뒤에 오시는 그이는 누구인가? 성경은 그를 가리켜, “예수라고 말한다. , 메시야가 온다. 그의 이름은 예수이다. 이를 합하면 이러한 문장이 된다. “예수가 온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구약의 말씀은 이사야서 61장이다. 이사야서 61장은 누가복음의 말씀에 다시 등장한다. 회당에 간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낭독한 뒤, 그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한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1-3)

 

성경은 온통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성경 속에서 메시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것은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성경의 메시아가 바로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증언이 참된 증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 말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인생, , 생명)을 다른 무엇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에게서 건 사람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요즘 기업이나 요즘 사람들은 ‘remarkable’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어떠한 기쁨도, 희망도, 감사도 없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그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가. 자기 자신을 눈에 띄는 존재로 서게 하려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고, 얼마나 인생을 거기에 소모할 것이며, 성공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 것이며, 실패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삶을 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remarkable’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 피곤한 인생을 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예수에게 걸었기 때문이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함께 봐야할 서신서의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특별히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성경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제로 깔고 있다. 메시아가 올 것이다. 메시아가 왔다. 메시아가 다시 올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전제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무엇도 말이 안 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억지로 기뻐하거나 소망하거나 감사할 수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막 기쁘거나 싱글벙글한 사람은 교회 오면 안 되고 병원에 가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병원에 가지 않고 교회에 온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소망하고) 범사에 감사하는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밑도 끝도 없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메시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걸어 둔 메시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 예수가 온다. 예수는 오고 계실 뿐 아니라, 이미 오신 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기뻐하고 감사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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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8. 15:48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시편 62:1-12)

 

성경의 풀네임은 성경전서라고 한다. 앞의 두 글자만 따서 성경이라 부르기도 하고,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따서 성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이든, ‘성서든 모두 성경전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라는 말을 고집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성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마치, ‘성경성서가 따로 있는 듯이 말이다. 그것은 성경전서에 대한 큰 오해다.
(
한국 교회는 기독교예수교로 크게 나뉘었다는, 웃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와 예수가 서로 싸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도 답답해서 그것 때문이라도 빨리 오실 듯 하다.)

 

동양문화에서 ()’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위키백과)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는 성경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발전한 것이 성경공부이다. 성경공부를 안 하는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닐 정도이다. 개신교회는 성경에 죽고 성경에 산다. 그런데, 성경공부가 발전하면서 잃어버린 전통이 있다.

 

요즘엔 성경공부를 하면서 눈으로 읽으며 밑을 그어가면서 성경을 읽는다. 그러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오면 노트를 한다. 그런데, 원래 경은 소리를 내어 낭독하는경전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 좋다. 예로부터 경전은 그렇게 하면서 마음에 새겼다.

 

구규(九竅)라는 것이 있다. 사람 몸에 있는 9개의 구멍을 말한다. , , , , 그리고 항문과 요도가 그것이다. 눈으로 읽으면 2개의 구멍만 작동하지만, 낭독을 하면 7개의 구멍이 작동한다. ()경은 그렇게 사람 몸의 온 규(구멍)을 작동시켜 뇌와 온 몸에 파동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은 몸을 흔들면서 암송해야 한다. 성경이 산문체가 아닌 운문체로 여전히 보존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낭독과 암송, 그리고 흔들며 읽은 습관이 사라진 것 때문에 교회가 말씀을 잃고 굳어져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 성경 독서법)

 

오늘 말씀 같은 경우도 그냥 눈으로 읽고,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에 밑줄만 친다면, 오늘 말씀이 가진 위력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실제로, 몸을 흔들며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낭독하면 그 울림이 완전히 다르다. 마음에 뜨거움과 확신이 스며든다. 눈물이 나고 힘이 난다. 하나님이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며 나의 울부짖음을 옆에서 들어주시는 분처럼 느껴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얼마나 힘 있는 말씀인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어 댄다. 그럴 때, 갈대처럼 흔들리는 영혼을 향해, 큰 소리로 이 말씀을 낭독하면, 영혼이 잠잠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기는 것이다. 심비는 마음 속에 있는 비석이다. 오장육부에 말씀이 새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심비에 말씀을 새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대로, 암송과 낭독이다.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9절이다. 9절 말씀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가르쳐 준다.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한국어 성경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Lowborn men are but a breath, the highborn are but a lie, if weighed on a balance, they are nothing; together they are only a breath”(NIV). 번역하면 이렇다. “태생이 천한 사람도 입김이고, 지체 높게 태어난 사람도 거짓이다. 그들을 저울에 달아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 하나의 입김에 불과하다.”(사역).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모두 입김보다 가벼운존재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가난한 사람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와 박힌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음을 더 잘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가난한 자보다는 부유한 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인 듯 하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10). ‘포악, 탈취이러한 단어는 부유한 자가 가진 권력(power)’를 말한다. 대개 권력을 쥐면,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위대한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

(얼마전 발표된 뇌과학자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뇌파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의지한다는 뜻이다.)

 

고대시대는 태생이 비천한 자와 태생이 고귀한 자의 구분이 명확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그들의 귀에 더 잘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처럼 태생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와 우리처럼 선진국에서 평균이상의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더욱더 암송하고 낭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자기가 구원이고 피난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칭 메시아가 즐비한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구원이고 피난처로 삼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명확하게 들어야 하는 말씀은 8절의 말씀이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8). 그리고 셀라가 나온다. 충분히 멈추어 서서 새겨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Trust in him at all times, O people, pour out your heart to him, for God is our refuge.”(8). 모든 시간, 언제든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께 네 마음을 쏟아 놓으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토하고 있는가. 우리의 영혼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 다른 것에 마음을 쏟아 놓으니, 우리의 영혼이 잠잠하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영혼에 큰 소리로 외쳐보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영혼아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으라! 하나님만이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시라! 권능이 하나님께 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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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2. 08:58

위로

(이사야 40:1-11)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대림절을 보내면서도 각자 기다림의 내용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건강의 회복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자녀를 기다리고, 어떤 이는 합격(입학, 입사)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당첨을 기다리고, 특별히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절박한 것을 기다린다. 물론 그 절박한 것이 실제로 삶에 유익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오늘 말씀은 위로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 강력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우리가 포로 생활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포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포로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지금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산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을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복음(기쁜 소식)을 들었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복음을 안 들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이것은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은 구원의 길에 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구원의 길은 묘연했다. 무엇이 구원의 길인지에 대하여 명확히 몰랐다. 그나마 유대인들은 율법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이 자기 의를 증진시킨다는 데 있다. 율법을 지키다보니까, 율법을 지킨 자기 의가자기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장 어귀에서 서서 크게 기도했다. “주여, 저는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저들(세리와 창녀)과 같지 않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이것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권력을 쥔 자가 권력 없는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많이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좋은 직장(직업)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강력한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다. 아니, 새롭다기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올바른 구원의 길을 여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구원의 길은 자기 의(업적 의)’가 아니라, 믿음이다.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면서도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칭의를 말한다. 칭의란 어떠한 업적을 쌓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과는 상관 없이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여전히 자기 의(업적 의)’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쓴다. 고등학생들은 수능평가를 받는다. 그 평가의 결과를 통해서 갈 수 있는 대학이 정해진다. 고등학생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코피 터지도록 공부한다. 그 일에 성공한 학생은 기뻐하지만, 그 일에 실패한 학생은 실망하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한다.

 

대학을 입학 한 후에 청년들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 자기를 증명하지 못하면 원하는 직장, 선망의 대상인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청년들은 청춘을 반납하고 스펙을 쌓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 청년들은 결혼을 포기한다. 단순히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좋아서가 아니다. 결혼을 하려면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평가를 받아 합격해야 하는데, 서로가 가지고 있는 평가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정보 회사가 분류한 등급을 보면, 그 평가기준에 인간은 없고 외모, 학력, 직장, 집안 등스펙만 있다. 그러한 평가기준을 뛰어넘어 행복한 결혼에 도달할만한 청춘이 얼마나 될까.

 

삶의 곳곳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업적의)’를 통해 구원에 이를 것을 요구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평가기준을 통과해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자기의(업적의)가 증명되어서 구원에 이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셨다고,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고 기뻐하며, 그런 하나님의 위로를 칭송한다.

(10여년 전에 실제로 그러한 말을 하는 모 방송사 여자 아나운서의 신앙고백을 본 적이 있다. 몇 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메이저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된 그녀는 그 당시 사랑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주신다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간증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포로생활 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무엇인지 보라. 포로생활을 하면서 그 포로생활을 잘 견디고 이기라고 거짓 위로를 주지 않으신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흑인노예 제도가 있었을 당시, 흑인노예가 편만했던 미국 남부지역(특히, 조지아, 앨러바마)의 목사들은 주일 설교를 할 때, 흑인노예들에게 주인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것이 위로인가?

 

흑인노예들에게 진짜 위로는 노예제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백인들)과 평등한 인간대우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위로란 포로생활을 잘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위로가 아니라, 포로생활 자체를 끝내는 것이 위로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참된 위로가 선포되고 있다.

 

우리가 이 대림절에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거짓 위로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위로를 주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자기의(업적의)’가 아니라, ‘칭의(은혜로 구원 받는다!’를 선포하시고, 그 길을 여신 분이다. 그 분의 선포는 이 세상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보라고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우리를 참 자유케 하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깊은 죄, 원죄는 자기 집중이다. ‘자기 집중이란 자기 스스로를 세상에 증명하려는 습성을 말한다. 자기의 존재 가치, 구원의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하느라 피곤한 삶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고, 무엇이든지 우리는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잔인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복음은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잘 증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짜 위로가 아니다. 복음은 새로운 나라(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증명하느라 생명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는 나라이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11).

 

이사야는 하나님을 젖먹이는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엄마를 찾는 이유는, 세상과는 달리, 엄마 앞에서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쓸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엄마 품을 그리워 하는 것이고,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는 것이다.

 

평가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는 존재인지 아닌지 스스로 증명해 보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느라 지치고 피곤한 여러분! 자의든 타의든, ‘자기의(업적의)’에 사로잡혀 포로생활을 하느라 죽을 것같이 지치고 힘든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으시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는,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증명하느라 지치고 힘들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은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이다. 그러니, 삶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느라너무 생명을 소진하지 마시라. 스스로 증명하라고 상대방을 다그치지도 마시라. 그저 사랑으로 감싸주시라. 은혜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위로를 날마다 묵상하시라. 특별히 교회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느라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라.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격려하고 위로하시라.

 

마지막으로, 최근 만난 멋진 문장 하나를 여러분과 나누며 말씀을 마치려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다.”

(이병률 시, ‘사람이 온다중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기도문


주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너무 힘든 우리들,

세상의 요구에 스스로 증명하느라 생명을 소진하여 

피곤하고 지친 우리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다.

더이상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더이상 스스로를 증명하느라 생명을 탈진시키지 않아도 되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어서 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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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4. 15:18

기다리는 복

(마가복음 13:24-37)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다. 교회력은 대림절(Advent)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점은 기다림이 근본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기다린다. 그 순간을 재림(파루시아)’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완성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사랑과 의는 매우 부분적이고 완전하지 못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사도 바울이 사던 시대의 거울은 청동거울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거울처럼 형상을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 그래서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는 그처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의를 희미하게 경험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는 사랑과 의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보는 것처럼, 전체를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보니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 이상,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각 사람마다 기독교인이 된 경위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어릴 적에 우연히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누군가의 전도로, 누군가는 스스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를 결혼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경우도 있다.

 

교회에 몸을 담게 된 경위가 어찌되었든,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오늘 말씀은 성전파괴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전이 파괴되었고, 왜 자신들이 포로가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했다. 그때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유대인 신앙공동체는 포로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 성전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성전을 건축한 뒤, 그들의 신앙공동체를 회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피어난 희망은 메시아의 도래였다.

 

스룹바벨 성전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헤롯대왕에 의해서 흡수되어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거대한 성전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AD 70년경, 그 거대한 성전은 로마군대에 의해서 파괴되고 만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 성전파괴사건을 환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성전이 또다시 파괴되면서 그 사건을 놓아두고 신학적 분석이 들어갔다. 왜 성전이 파괴되었을까? 이번에는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와는 다른 해석이 들어갔다. 소위, 헤롯성전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거부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형성되면서 굉장히 중요한 해석의 틀이었다.

 

대인들은 자신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를 거부했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헤롯성전을 로마군대의 손을 빌어 없애시고, 새로운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온 세상에 계시하시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방인)을 모으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거부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유대인을 만나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모른다.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 하며 친절히 대해주라. 그들 덕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을 히틀러가 알았다면, 홀로코스트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 (오늘은 그 주제를 설교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불신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후, 다시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 하나, 어떤 민족이든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일에 동참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참으로 신비롭다. 유대인의 불신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를 기다리면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가. 기다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지 않고, 산 자처럼 산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산 자처럼 산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거나, 시간을 하릴없이 흘려 보내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임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삶, 희망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는 부지불식 간에 이루어진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른지, 밤중일른지, 닭 울 때일른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35). 고대 사회에서 떠났던 사람이 되돌아 오는 시점이, 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등의 시간은 마땅한 시간이 아니다. 그런 때 온다는 것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강조이고 수사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깨어 있는가?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저 좀 깨워 주세요!”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사도 바울도 이 말을 쓰고 있는데, 특별히 에베소서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는 말과 더불어 깨어 있으라는 말을 쓴다. 그 당시 술에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 당시 술은 디오니소스(바쿠스) 신을 섬기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술 취한다는 것은 잡신의 스피릿을 내 안에 들이는 일이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혼란케 하는 나쁜 영을 물리치고,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흠 없이 보존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라는 뜻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우리의 영은 어떠한 영인가? 우리는 깨어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떠한 잡신에게 내어주고 있는가? 요즘은 모두가 spirit of money에 사로 잡힌 듯하다.

 

나는 골드러쉬 주(Gold Rush State)인 캘리포니아에 이사와서 그것을 더 강력히 경험하고 느낀다. 모든 게 다 돈이다. 그런데, 교회가 좋은 것은 교회는 세상의 스피릿과 반대로 흐른다. 세상은 봉사를 하면 돈을 받는데, 교회는 돈을 내고 봉사한다. 이것은 매우 이 세상을 전복시키는 행위이고, 이 세상의 spirit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spirit의 실천이다.

 

우리가 세상의 spirit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깨어 있기위함이다. 세상의 스피릿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스피릿, 성령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를 놓치지 않고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자.

 

 

기도

 

희망의 주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완전한 사랑과 의를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희미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 주님의 사랑과 의를 경험하고 실천하고 있지만,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의를 완전히 경험하고 실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

깨어 있는 일에 실패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더욱더 힘쓰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이시고 희망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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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2. 09:23

하나님이 피난처

(시편 461-11절)

 

시편 46편은 세 연으로 나뉜다. 연을 나누는 일을 셀라가 한다. 셀라는 잠시 멈추어 듣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쉼없이, 질주하듯이 들으면 안 되고, 들으면서 잠시 멈추어 마음에 새기며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광고, 정보(commercial, information)’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셀라는 단순히 잠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내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충분히 멈추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 얼마 전, 유럽에서 번지 점프를 하려던 여자 청년이 도우미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추락사 한 일이 있었다. “No”“Now”로 알아 들어서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긴장하니까, 의사소통이 서로 잘 안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어렵고 괴로운 일이 닥치면 긴장하게 되어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가 많다.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셀라의 정신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시편 46편의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는 말씀이다.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이외의 시편의 말씀들도 마찬가지) 큰 힘이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이다.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하려고 마음 먹고 95개조 반박문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회적 분위기가 종교개혁을 갈망했고, 그의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당시 유럽은 교황, 그리고 기독교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상황이라 교황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다른 사상을 이야기하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면 교회권력에 의해 처형되던 시대였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당겨지고 난 뒤, 마르틴 루터는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다. 종교개혁의 뜻에 동참한 힘 있는 제후들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위클리프 같은 그의 선배들처럼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시편 46편이 유명한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이 시편을 바탕으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시편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성서학자로서 시편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아마도 그는 학문적으로 주석을 쓸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시편 46편에 근거한 찬송가를 지었을 것이다. (큰 환란 가운데 있으면, 말씀이 주는 위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씀에는 참으로 능력이 있다!)

 

시편을 지어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혹독했다. 시편 46편에 나타난 그들의 혹독한 상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자연재해와 전쟁이 그것이다. 지금도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속수무책이다.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운석과의 충돌 등은 지구의 생명체를 엄청나게 위협한다. 과학의 발달은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쟁의 위협은 세계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불감증 때문에 그렇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전쟁의 위협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어제도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해서 전 세계가 발각 뒤집혔다. 특별히 미국이 북한의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 전역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전쟁은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거나, 피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겪는 재앙 중 최악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이것은 엄청난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견인해 주는 견인차와 같은 신앙고백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신앙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두 가지의 일을 볼 수 있다. 첫째는 5절 말씀에 나온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마르틴 루터도 자신이 지은 찬송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돌로 쌓은 성이 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성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다. 우리는 흔히 돌로 든든한 성을 쌓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자체가 성(, fortress)이신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적용하여,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새벽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논리다. 물론, 그렇게 적용해도 은혜되는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새벽에도우신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신비를 나타내는 말이다. 새벽은 생명이 고요하게 잠자는 시간이다. 그리고, 새로운 날이 오기 바로 직전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른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언제 키가 크는가? 절대로 낮에 활동할 때 눈에 보이게 크지 않는다. 키는 잠 잘 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 때 큰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기의 아이들이 내 키가 클까를 걱정하지 않고 잠 자리에 드는 것처럼, 신앙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올까’, 걱정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난 아이의 키가 부지불식 간에 큰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새벽에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막막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장 잘 하지 못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 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를 바라신다. 성경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그것도 아주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말이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때 있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남유다는 끊임없이 앗수르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끝내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그의 부하 장수 랍사게를 보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데, 그 일 때문에 히스기야는 어려움을 당하고, 랍사게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데까지 이른다. 전쟁의 위협 앞에 히스기야와 남유다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히스기야 시대 때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와 남유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19:6-7).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 랍사게의 군대는 물러가고,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가 시해당한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이르렀지만 홍해에 막혔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됐다. 앞으로 가면 물에 빠져 죽고, 뒤로 가면 애굽 군대의 칼에 죽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 그리고 벌어진 일은 이렇다. 홍해가 갈라졌고, 이스라엘은 그곳을 건넜고, 애굽 군대는 홍해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스라엘이 한 일은 말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말도, 무기력을 드러내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기대지 않고, 하나님 자체가 성이신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성을 쌓는데 모든 힘을 쏟아 붙는다. 그러한 일은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 목격하는 일이다. 각 나라와 각 개인이 (power)’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는가. 대표적인 강대국, 미국, 중국, 러시아는 서로 군비경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은 북한이 그 경쟁에 뛰어들어 핵탄투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다.

 

세상은, 국가나 개인이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안전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군사(, power)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조차도 자신들이 힘을 키우는데,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 자체가 성이시고 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리 들어도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셀라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46편이 엄중하게 선포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도다”(7,8). , , 수레, 이것은 고대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것을 무력화시키신다는 것이다. , 그러한 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각 나라는, 각 개인은 자신들을 지켜줄, , , 수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전투기, 항공모함, 핵미사일,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꺾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꺾으실 것을 왜 만들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다 쓸데 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난처시다. 이 신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실천했던 성경의 인물 중 하나는 에스라이다. 에스라서 821-23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하나님)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8:21-23).

 

에스라는 페르시아(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의 인물인데, 2차 예루살렘 귀환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데리고 바벨론(페르시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신앙고백을 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니 귀환할 때에 혹시 모를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줄 보병과 마병이 필요 없다고.

 

보통 사람 같으면 왕에게 자신들의 보호를 요청하며 보병과 마병을 함께 보내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이 신앙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므로, 보병과 마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에, 에스라는 귀환하는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라고 하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난처를 구비하면서 사는가. ‘비 오지 말게 해 주세요’, 기도하러 오면서 우리는 반드시 우산을 챙긴다. 우리 신앙의 웃픈현실이다.

 

하나님이 피난처이시다. 이것이 우리 귀에 들려야 한다. ‘셀라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토대여야 한다. ‘새벽에도우시는 하나님, 구원을 주지 못하는 엉뚱한 데 삶을 허비하지 말고가만히 있어하나님의 도우심(구원)을 실제 삶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하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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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