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 02:08

골로새서

 

1. 복음은 살아 있다 (1:1-8)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다. 이 교회는 에베소에서 만난 에바브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다.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기에 권위가 그만큼 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염려해서인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에 두고 있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을 보면 수신자 그룹이 자신에게 얼마나 신뢰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는 수준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여주었던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는 간단하게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만 소개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기까지 이른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의 사도됨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상 골로새서에서 보이는 사도 바울의 자기 소개는 자신의 권위를 좀 더 설명해야 할 상황에 처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여지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사도라 불렀지만 자신과 동역하고 있던 디모데나 에바브라에게는 사도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사도는 통상 예수님께 직접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붙여지는 칭호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이는 일은 늘 문젯거리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바울이 자기 자신에게 사도의 호칭을 붙인 이유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사도는 없다. 사도들의 증언만이 있을 뿐이다. 사도들의 증언은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들의 증언에 따라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씌어진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증언이 진리인지 아닌지 가려내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된 계기는 이단사상 때문이다. 바울 서신의 대부분이 모두 비슷한 계기로 씌어졌다.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별히 유대교의 율법에 바탕을 둔 이단사상이 골로새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교회에 들어온 이단사상의 특징은 할례를 강조하고, 율법에 규정된 음식과 절기 및 안식일 준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왜 이단사상인가를 알려면 유대교 율법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하여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을 통해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둔다는 말은 부활의 초점에서 예수라는 실존 인물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승격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단사상을 물리치려면 올바른 그리스도론(기독론)을 정립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정체성이 흐려져 교회가 세상에서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 받는 경우를 살펴보면
, 기독론이 흐려졌을 경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을 습관처럼 입에서 내뱉고, 예수의 사역의 트레이드 마크인 십자가를 부적처럼 여기 저기 달아 놓아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물면 교회는 흔들린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골로새 교회가 이단사상에 흔들리고 있다는 말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하면 이렇게 흔들리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신앙이 흔들릴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어두운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는 그들을 성도라고 부름으로써 격려하고 있다. ‘성도는 인격적인 탁월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역과 예배를 위해 구별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인격이 탁월하다고 해서 그를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격이 탁월한 사람은 성인은 될 수 있어도 성도는 될 수 없다. 성도가 될 수 있는 길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과 당신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 따로 불러 세운 사람에게 성도라는 칭호가 붙여지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사귐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골로새 교인들을 일컬어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한다. 신실함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 사람의 신실함이 드러나게 된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지금 신실함을 보여야 할 때인 것이다. 실신함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지만, 이단사상에 의해 고난에 처해진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있어 이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골로새 교회는 기도 제목이었다
.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잘 지어져 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믿음과 사랑이 충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의 인격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복음의 속성 때문에 그렇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다. 하늘의 기쁜 소식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복음도 살아 있다. 히브리서 4 2절도 그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사용한 언어를 풀이해 보면 그것이 더 분명해 진다. 바울은 복음이 열매를 맺어 자란다”(6)고 표현했다. ‘열매를 맺어라는 말은 복음의 내적 에너지를 암시한다. 즉 복음이 씨를 갖고 있는 식물처럼 본질적으로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유기체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확장을 의미한다. 복음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간다는 뜻이다. 누룩으로 인해 빵이 부풀려지듯이,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이, 그렇게 복음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유기체이고 생명체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복음이 뿌리 내린 곳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약속에 대한 소망이 자라난다. 바울은 에바브라에게서 골로새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들었던 것이다.

          
복음의 유기체적인 속성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 신앙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경험된다. 복음은 부활을 보여주지만, 현실은 죽음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씨앗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씨앗은 그저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음의 속성을 깨달은 사람에게 씨앗은 더 이상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하지 않다. 그는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를 보고, 새소리를 듣는다. 복음을 받아 든 성도는 현실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살아낸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1. 17. 02:15

신명기 22 1-4–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야만 하나? - 경제활동은 보장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다
. 즉 경제활동이 가장 근본이다. 경제활동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강요되는 헌신은 모두 폭력이다. 경제활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 간에 서로의 경제활동에 대해 보장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사명이 있는 곳에 경제적인 보상이 있기도 하지만
, 경제적인 보상이 있는 곳이 사명지(
使命地)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찬송가 중 가장 은혜로운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을 가장 왜곡시키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찬송이다. 부름 받았다고 해서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서 경제적인 활동이 보장되어야 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곳에 가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믿음이 형편 없는 것처럼 매도되는 것은 신앙의 폭력이다. 한국 교회에 이러한 폭력이 얼마나 많이 가해지고 있는가?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폭력은 어디다가 하소연 할 데도 없다. 모든 것을 믿음의 부족 탓, 기도의 부족 탓으로 돌리는 신앙의 형태는 분명 지양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지 생명을 빼앗거나 하찮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러 오지 않으셨다.


본문에서는 서로 간의 경제활동을 보장해줘야 하는 의무가 명기되어 있다
. 여기서 나귀는 부유한 이웃의 소유를 말하고, 의복은 가난한 이웃의 소유를 말한다. 부유한 이웃의 소유라고 이것쯤 하나 없다고 그가 굶지는 않겠지하면서 몰래 취하면 안 되고, 가난한 이웃의 소유라고 이까짓 것하면서 하찮게 여기면 안 된다. 상대적 가치를 가지고 보면 안 되고, 절대적인 가치로 봐야 한다. 내가 임의대로 판단하면 안 되고, 원칙대로 판단해야 한다. 자신의 소유가 중요하듯이, 부유한 이웃의 소유나 가난한 이웃의 소유나 모두 소중한 것이다.


특별히 길에서 발견된 짐승이 누구의 것인지 몰라 주인을 찾을 때까지 보호해야 하는 규례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적극적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 보호 기간 동안 짐승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을 유지하는데 일정한 비용이 들어간다. 보호 기간 동안 짐승의 먹이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짐승을 보호해야 한다는 규례는 희생 없는 사랑의 실천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 따뜻한 명령이고 규례다
. 이 세상의 원리와는 다르게 공평하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규례다. 내 소유가 소중한 만큼 이웃의 소유도 소중한 것이다. 그 소유가 부유한 사람의 것이든 가난한 사람의 것이든 상관 없다. 서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보호하고 돕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 이웃 사랑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7. 23. 09:03
 신명기 21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라!


신명기
21장은 5개의 규례를 담고 있다. 1) 미결 살인 사건 대속 규례, 2) 포로를 아래로 삼을 때의 규례, 3) 장자 상속권 보장 규례, 4) 패역한 아들에 대한 징벌 규례, 5) 사형수의 시체 처리에 관한 규례가 그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실정법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법을 문자적으로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의 법대로 산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때 그 시대에 적용됐던 것들을 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결 살인 사건만 해도 그렇다. 요즘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미결되는 살인 사건은 없다. 죽인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암송아지를 잡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석해 내야 할 것인가?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5개의 규례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지기 위한 장치들이다. 살인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이다. 부정한 것을 성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의식을 치러야 하는데, 범인을 알 수 없으니 범인을 대신하여 성결 의식을 치러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도록 한 것이다. 성결 의식을 대신 치러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눈 여겨 보아야 한다.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21:3a).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무책임 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데 필수요소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아파트다. 그러나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중 하나가 쓰레기에 관한 것이다. 주차장이나 아파트 입구에 종종 쓰레기가 널려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누군가 대신 치워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결국 쓰레기를 치우는 건 아파트 관리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쓰레기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는 입주자들의 무책임 때문이다. 물론 아파트 관리인이 최종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가벼운 것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쓰레기는 오가는 가운데 치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삶의 모습 하나만 보아도 요즘 시대가 얼마나 무책임한 시대인가 알 수 있다.

 

이 외의 장자 상속권이나 패역한 아들의 처리 문제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규례들이다.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에는 질서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그 질서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지만, ‘질서자체는 어느 관계에서든지 존재하는 법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질서는 그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가정의 질서, 교회의 질서, 사회의 질서, 자연의 질서 등 질서가 허물어지면 그 공동체는 허물어진다. 본인이 곧 법이고 질서인 존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어디 있는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산다는 것은 책임질서를 존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책임질서가 얼마나 잘 지켜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안녕과 평화가 보장될 것이다. 나는 책임 있게 행동하는 사람인가? 나는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인가?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행복한 것이 아니라, 책임과 질서 가운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행복한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