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1. 21. 02:24

시편 4 - 평안히 눕고 자는 믿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은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하다. 요즘 사람들이 흔하게 겪는 병 중 공황증라는 것이 있다. 근거 없는 불안감이나 심리적인 두려움으로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는 정신장애이다. 이 병의 원인이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가 이 병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공황증에 걸리면 평안히 눕고 잘 수 없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스트레스 또한 참기 쉽지 않다. 결국 스트레스가 공황증을 낳고, 공황증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된다. 악순환이다.

 

시편 4편의 시인도 정황상 공황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인생들로 표현되고 있고 대적자들로 인해서 시인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이로 인해 시인은 곤란한 상황(distress)에 처해 있다(1). 이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린다. 공황증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기도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기도라는 말보다 울부짖음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기도가 꼭 형식을 갖추어야 하고 적절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절박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외마디 비명도 하나님 앞에서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시인은 기도 중에 대적자들인 인생들에게 그 어떠한 욕설이나 저주는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근거해서 그들에게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육신은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망가진다. 죄와는 상관 없이 우리의 육신은 자주 아프다. 또한 죄의 유혹에 이끌려 죄를 쉽게 지기도 한다. 흙으로 되돌아 가야 할 먼지 같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대적자들에게 시인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말과 행동을 삼가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뢰하라는 권고를 한다.

 

5절에서 표현되고 있는 의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말한다. 내 마음대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말한다. 제사(예배)를 드릴 때 내 마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흔히 예배 후에 자기의 마음이 기쁘고 흡족하면 은혜 받았다라고 말하지만, 예배를 통해서 내가 은혜 받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흡족하시고 기쁘신 것이 중요하다.

 

시인이 갑작스럽게 제사를 운운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하여 참된 회개와 참된 신뢰를 보이는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선 사람은 결코 누구를 해하려 들지 않는다. 시인의 대적자들이 하나님께 의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결코 더 이상 대적자들이 아니라 친구일 것이다. 결국 이는 시인이 원수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는 충고이고 권고인 셈이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회개와 신뢰는 분명 기쁨을 불러 일으킨다. ‘곡식과 포도주같은 외적인 요인으로 오는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 온다. 기쁨의 근원은 곡식과 포도주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생처럼 먼지와 같이 사라져 버릴 곡식과 포도주가 어떻게 기쁨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기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기쁨이, 하나님에게 근거를 둔 기쁨이 시인을 평안히 눕고 자게 한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공황증에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대한 참된 회개와 신뢰는 우리를 평안히 눕고 자게 하는 능력이 있음에는 틀림없다.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8).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1. 13. 12:49

시편 3편 - 절망에서 희망으로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적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적 질만한 사람과 적을 지게 되면 그나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고 살면 되니까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늘 얼굴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과 적을 지게 되면 곤란을 겪게 된다.

 

시편 3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지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 갑자기 대적자, 원수가 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삶의 자리도 절망이고, 인간 관계도 절망이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윗 왕처럼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탄원하는 것밖에는 없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발생되면 그 문제에 정신이 빼앗겨 주위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시편 3편의 시인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은 문제보다 그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돌린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실제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일단 문제에 정신을 빼앗기고 문제에 집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고 분주하다. 나름대로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 즉 문제에 집착한 기도이지 문제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문제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들은 풍월로 하나님을 안다. 서당 개가 3년 동안 서당을 서성이면서 배운 것이 , 이듯이 우리도 교회를 드나들면서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눈에 안 들어오고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시편 3편의 시인을 보라. 하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 무엇보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빠져 풀이 죽어 고개 숙이고 있는 나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상상해 보라.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의 비통함을. 모든 것을 잃고 도망가는 그 수치스러움을. 잃을 것이 없는 자도 원수에게 쫓기면 마음이 비통한 법인데, 왕이었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바로 그 비통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시인은 시온산을 바라보았다. 그 성산에 자신의 탄원의 기도에 응답하실 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6).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산, 시온산은 갈보리 산에 선 십자가이다. 수치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주관하신다. 살면서 부닥치는 문제들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는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십자가 신앙,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찌 절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절망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라. 부활의 주님께서 머리를 들게 하실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8).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1. 3. 08:32

아들에게 입맞추라

 

이 시편은 다윗 왕조의 왕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윗 왕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왕권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하다. 그 왕권은 누구도 넘볼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다윗 왕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다. 이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여겨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지 못하다고 비난해야 할 것인가?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마저 잃은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포되고 있는 시편 2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없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지를 제시한다. 다윗 왕조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이방 나라들이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윗 왕조의 영원성은, 그리고 그의 힘과 권세는 다윗 왕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다윗 왕조가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세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다윗 왕조를 무너뜨린 이방 나라들을 비웃고 계시다(4).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당신의 아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는 문자적으로는 다윗 왕을 가리키지만,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것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1:1).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새로운 다윗 왕조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이 나라는 다윗 왕조처럼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는 나라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일컬어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신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

 

복음서에서도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전한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3:22). 이는 모든 권세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다는 선포이다. 그가 바로 만왕의 왕이시고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라는 선포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파루시아)는 것을 선포하셨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선포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시편 2편의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준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12). 진노를 피하고 구원 얻는 길은 단 하나,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는 자는 다 복(구원)을 받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1. 2. 04:03

그리스도의 삶에 나를 던지다


(
, Blessing)”이란 무엇인가? 현대인들에게 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우선 복권같은 개념을 들어 설명할 것이다. 옛 풍습을 조금 아는 사람 같으면 새해 첫날에 세배 할 때 하는 인사(“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와 어른 들이 해주는 덕담(“복 많이 받거라!”)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어느 것이든 그 근본은 물질적 풍요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에게 은 곧 과 같다.

 

복에 대해 이러한 개념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시편 1편에서 말하고 있는 은 매우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첫 음절이 으로 시작하는 것에 반색하다가도 첫 번째 구절이 다 끝나가기도 전에 얼굴이 굳어질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에 대해서 자신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등의 단어들은 마음을 매우 심란케 한다. 현대인들은 이 단어들을 듣기 싫어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들과의 관계를 따지지 않고는 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걷다(따르다)”, “서 있다”, 그리고 앉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대표되는 경건치 못한 자들과는 그 어떠한 관계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과는 함께 길을 걷지도 말고, 그들과 함께 서서 대화도 나누지 말아야 할뿐더러, 그들과는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절은 복 있는 사람이 함께 걷고, 서 있고, 앉아야 할 것을 제시해 준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걷고, 서고, 앉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 일상 속에서 복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묵상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좁은 의미로 보면 토라(모세 5)을 의미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 더 구체적인 의미로 여호와의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시기 때문이다( 5:17,18).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라는 뜻은 일상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내 삶 안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던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삶이다. 시냇가에 나무를 심는 것이지, 나무가 심겨진 곳으로 시냇물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만사형통을 꿈꾸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전까지 그 소망은 헛된 욕심에 불과하다.

 

복이란 무엇인가? 복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 이 손에 잡히는가?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