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2. 1. 09:05

시편 5

사귐의 기도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 기도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하기 위해 하던 모든 일을 멈추었다. 기도의 생활화를 충실히 준행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기도에 집착했을까? 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유대인들에게 기도는 경건한 행위였다.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의인의 필수요소였다. 의인은 기도했고, 기도하는 자는 의인이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세상에 보일 수 있는 방법이 기도였던 셈이다. 여기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경건의 모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기도의 생활화는 결국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경건의 능력을 만들어 내는데 무력해진다. ? 기도가 생활을 방해하기 때문에 기도는 생활 속에서 빨리 해치워야 할 의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시편 5편은 아침 기도이다. 자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둔 셈이다. 세상 모든 종교의 영성은 아침에서 비롯된다. 한국 교회는 여기에 더 집착한다. 새벽기도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새벽 기도 문화는 성경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농경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전이 새벽기도에서 왔다고 미화되기도 한다. 한국 교회에서 새벽기도는 만능열쇠이다. 모든 묶인 것을 푸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맞는 말이지만 기도를 사귐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기도 신학에서 기도는 사귐의 차원이지 능력의 차원이 아닌 것을 밝히고 있다.

 

시편 5편의 시인은 아침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린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능력의 차원에 있지 않고 사귐의 차원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으로 접근하게 되면 기도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기도가 사귐의 차원에 있으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어 그분의 뜻을 따라 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시인은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보호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심판과 보호는 목적이 아니고 결과일 뿐이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3)이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고(4-6),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분(11-12)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시인으로 하여금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보호를 기대하게 한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기도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기도를 사귐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시인을 보라. 그의 눈에는 원수들의 배역함이 보이지만, 결국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원수들의 배역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인자, 사랑)이다. 하나님의 헤세드 앞에서 원수들의 배역함은 아무 것도 아니다. 원수들 때문에 원통해 하거나 절망에 빠질 필요 없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곧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8). 우리는 능력의 기도에 머물지 말고, 사귐의 기도에 빠져 들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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