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교회로 가는 길]
7. 기후변화와 설교
월터 브루그만은 오래전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예언자적 목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우리를 둘러싼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다”(월터 브루그만, 52쪽). 얼마 전까지 인류는 홀로세(Holocene)의 지질학 시대에 살았습니다. 홀로세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위키피디아에 다음과 같은 정보가 뜹니다. “홀로세(Holocene)는 약 1만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를 말한다. 충적세(沖積世) 또는 현세(現世)라고도 부른다. 플라이스토세 빙하가 물러나면서부터 시작된 시기로, 신생대 제4기의 2번째 시기이다. 마지막 빙기가 끝나는 약 1만년 전부터 가까운 미래도 포함하여 현재까지이다. 그 경계는 유럽의 대륙빙상의 소멸을 가지고 정의되었다. 이 시기가 시작된 이후 인류의 발전과 전파로 인하여 홀로세 절멸이 일어나는 중이다”(위키피디아, 2022년 12월 16일 접속).
홀로세를 살아온 인류는 지난 1만 년간 안정적인 기후 아래서 문명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홀로세 동안 인류가 눈부신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살기에 기후가 안정적이고 일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안정적인 기후는 원래 더 오래 지속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 여년 동안 생태 환경이 급작스럽게 바뀌었습니다. 현재 인류가 구축해 놓은 지배 문화는 자연을 마구잡이로 훼손하고 착취하는 방식으로 번영을 이루는 구조여서, 현재 경험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류에 의해서 발생한 일입니다. 그것도 아주 급작스럽게, 그리고 가파르게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성경에는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성경 시대의 관심은 기후 위기가 아니라 가난한 자(힘 없는 자)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힘 센 자가 힘 약한 자를 함부로 대하던 시절,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신 분’으로 자주 묘사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은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예레미야 22:3). 성경의 전략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편’이라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힘 센 자가 힘 약한 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힘 센 자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힘 약한 자를 ‘내 몸같이 돌보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는 위에서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의 지배 문화에 대한 대안 문화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잘 감당해 왔습니다. 신실한 그리도인들은 성경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약자의 편에 서신 것처럼 약자의 편에 서서 세상을 좀 더 평화롭고 정의롭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기후 위기에 직면한 지금,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정신을 살려 또 한 번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서 대안 문화의 의식과 인식을 제시해야 하는 때를 맞았습니다. 예전에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정의를 외치면 됐지만, 이제는 가난한 자와 부자에 상관 없이 모든 인류의 편에 서서 정의를 외쳐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기후 위기는 힘 없는 자(가난한 자)에게만 닥친 문제가 아닙니다. 기후 위기는 힘 있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닥친 문제입니다. 기후 위기는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넘어 ‘근본’을 무너뜨립니다.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후변화 문제는 기존의 정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기후변화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사회 문제를 더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태에 맞서 기후 변화에 대한 문제를 더 세심하게 살펴보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입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은 그리스도인들이 기후변화에 대하여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즉 목회자들에게 좀 더 강력히 호소하고자 ‘설교’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과학자 기관인 “과학발전을 위한 미국 연합(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가 발표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What we know)>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 기후변화는 대체로 인간들에 의해 발생되었다. 기후변화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악화되었고,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될 것이다. 인간은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라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기후교회, 235쪽). 이 연구서에 명시되고 있듯이, 안타까운 것은 인간의 삶을 매섭게 위협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하여 인간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위협을 힘써 알려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특히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대해서 듣기를 싫어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매일을 살아가는 것만도 이미 충분히 어렵고 힘들다. 교회는 나에게 휴식과 기운을 북돋아주고, 다음 주간을 위해 나를 재충전해주어야 한다. 기후변화가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건 다른 어떤 사람의 문제다. 그 도전이 너무도 엄청나다. 내가 그걸 어찌 할 길이 없으니, 왜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영감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것이지, 우울하게 되려고 오는 게 아니다. 기후변화는 정치적인 현안이다. 정치는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다”(기후교회, 230쪽). 이렇듯,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기후변화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사람들이 피하고는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설교, 또는 기후변화에 대한 스몰톡(small talk/간단히 나누는 이야기)이 중요한 이유는 기후변화에 대한 설교를 (비록 가끔씩이라도) 들은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현실인 것을 보다 더 잘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기후교회, 232쪽) 기후변화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그 이야기를 피한다고 해서 기후변화가 ‘나’의 현실에 닥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관심이 있건 없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건 있건, 그러한 감정과는 상관없이 기후변화는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기후변화는 그동안 ‘내’가 살아오던 삶을 방식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게 막을 뿐 아니라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더 이상 간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해서 공부하고 말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기후변화에 대해서 말해야만 합니다.
기후변화에 대해서 설교할 때, 또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공포심을 조장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감성(또는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여러가지 어려움이 인류에게 발생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짐 안탈 목사는 우리 모두가 용기를 길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기후변화를 설교하기 위해서, 또는 기후변화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두 가지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경이감을 계발하는 것과 상상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경이감과 상상력. 이 두 가지는 우리 모두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고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성경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두 가지, 경이감과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체득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경이감과 상상력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상상력 가운데 삽니다. 그것을 ‘소망(또는 희망)’이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위기의 시대에 실력발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서, 그리고 그가 이루신 구원 안에서 상상력을 펼치며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서 아름다운 생명들을 보존할 수 있는 대안 문화의 의식과 인식을 제시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것을 위해서 부름받았고, 이것을 행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을 잇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 숨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