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22. 11. 13. 04:06

저항이 필요한 시간

 

예수께서 우셨다.

   그리고 그는 울면서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셨다.

   그는 모든 시간에 걸쳐 계시며,

   이 우시는 예수는,

   울고 있는 자들을 그의 팔로 안아 주시며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는 우리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God-with us)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셨다.

(앤 윔즈, 『슬픔의 노래』, 24쪽)

 

하나의 죽음이 발생하면 하나의 우주가 사라진다. 그런데, 떼죽음이 발생하면 우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살면서 숨쉬는 것만큼 죽음을 많이 경험한다. 죽음을 경험한 인간은 무기력에 빠지거나 불가지론에 빠지기 십상이다. 죽음을 경험하면 인간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지’ 알지 못해 무지의 심연으로 추락한다. 무엇이 이렇게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인간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죽음은 이렇게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 그리고 고통을 안겨준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것을 인간에게 부정의 형식으로 남긴다.

 

미국의 계관 시인, 앤 윔즈가 쓴 『슬픔의 노래』에 보면, 그녀의 슬픔을 담은 시, 즉 탄식의 시편들을 쓰도록 격려해준 월터 브루그만의 간략한 시편 해제가 담겨 있다. 시편에 대한 아주 짧은 해제이지만 거기에는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교훈을 담고 있다. 브루그만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아마도 이스라엘의 가장 독특하고도 생생한 믿음의 양식인 탄원과 푸념은 우리를 ‘저항의 영성’(spirituality of protest)으로 인도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대담하게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하며 우리가 취하는 자기 부인의 쉬운 방식에 반대하는 것이다”(17쪽).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 중 하나다. 실제로 시편을 보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다. 욥기서에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욥의 고분고분한 모습보다는 욥의 저항하는 모습이다. 시편의 시인들도 욥도 자신들에게 발생한 죽음의 경험 앞에서 고분고분하지 않다. 그들은 저항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저항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에게 발생한 고통스러운 일들의 원인이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쉽게 인정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시편의 슬픔 공동체는 “죄를 고백하기를 반항적으로 거부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책임지기를 거부한다”(17쪽). 시편의 슬픔 공동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최고의 영성은 ‘저항의 영성’이다. 즉 그들은 “실패한 것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것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줄 안다”(17쪽). 즉, 여기서 말하는 저항의 영성은 하나님을 향한 저항의 영성이다. 우리에게 발생한 고통스러운 일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따져 묻는 것이다.

 

떼죽음의 고통이 발생한 대한민국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치쇼와 정쟁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는 자들과 그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지혜를 성경의 슬픔 공동체로부터 배운다. 이미 존재하는 슬픔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의 언어를 통하여 우리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언어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저항’이다. 그 저항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정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솟아오를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