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1. 13:5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24:44-53, 1:1-11)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하늘에 가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가린의 경험을 인용하여 흐루시초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주인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거짓말이다!” 참 바보 같은 말이죠. 하나님을 하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요! 이것은 달에 가서 토끼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거나 똑 같은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사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 자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늘’, 즉 하나님이 살고 계신다고 믿는 하늘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거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공간적인 저 하늘에 살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처를 그냥 하늘이라는 개념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개념을 들여다 봐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승천은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입니다. 승천을 정말로 우주비행선이 하늘로 올라가듯이 그렇게 하늘로 올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만드는 겁니다. ‘승천이란 그 행위에 중점이 있는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승천이란, 말 그대로, ‘하늘로 올려졌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금도 전세계 선진국에서는 온갖 인공위성들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승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려지듯이 그런 식으로 하늘로 올려졌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무슨 귀신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2451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 기사입니다. 같은 저자에 의해서 씌어진 사도행전도 같은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더라”(1:9). 물론,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라는 것을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그렇게 하늘로 올려지셨다라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승천 기사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하는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수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예수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그냥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기이한 사건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 사건이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늘로 올려지신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은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예수를 경배한 일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24:52).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승천한 예수를 경배한 것 자체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승천을 지켜본 초대교회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제 1, 2계명이기도 합니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철저한 금지 사항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를 경배했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거나, 아니면 예수가 하나님이거나.

 

제자들은 예수를 우상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그가 참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신후 그를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십계명의 1, 2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바로 지킨 것입니다. 참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올려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천이 가져다 주는 의미입니다. 수없이 많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하늘로 올려지는이 때에,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행위를 믿는 것은 오히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성경의 증언은 믿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모든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변함 없으시고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그 무엇에 제한 받지 않으시고 영원하시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인간 세계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의 승천 뒤 하나님인 예수를 경배하고 있는 제제들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외로움과 배반, 거절, 목마름, 심지어 죽음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바로 승천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인간 상황과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로 올려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는 하나님이 연약하고 심지어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우리 인간이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저 먼 곳에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분이 아니라, 단순히 위로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함께 연대하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십자가 사건이 구원 사건인 이유, 그것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인 이유는 바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인 예수가 우리 피조물이 지닌 연약함과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시고 피조물의 가장 연약한 모습인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들은 고통이나 불행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승천은 이렇게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승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비겁함과 연약함을 탓하신 것이 아니라,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4:36).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이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복음으로 전해집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24:47-48).

 

십자가는 죄사함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회개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용서입니다. 용서란 관계를 다시 정립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도망쳤습니다. 예수에게 있어 제자들은 배신자인 것이죠.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신 것은 그들을 용서하신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배신자로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형제 자매로용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나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로 모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용서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 아니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모든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증언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 즉 용서의 능력이듯이, 우리도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서 모든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습니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는 것,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인 용서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믿습니다. ‘하늘로 올려지신그분을 경배하십니까? 그러면 기쁨 가운데 돌아가십시오. 가서 용서의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에 처해 있든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희망 가운데 사십시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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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