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6. 5. 05:41

위로와 화해

창세기 25

(창세기 25:1-18)

 

인간이 겪는 아픔 중 가장 큰 아픔은 상실의 아픔입니다. 무엇인가를 상실한다는 것은 복구가 불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 사람에 대한 상실이 가장 큰 슬픔이죠. 부모님이 죽었다든지, 배우자가 죽었다든지, 자식이 죽었다든지 하는 상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위로란 바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상실감이 컸습니다. 자식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은 그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이삭도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힘들어 했지만, 사실 어머니를 잃은 이삭보다 아내를 잃은 아브라함이 더 힘들었을 겁니다. 이삭은 부인을 얻음으로 해서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대한 위로를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치유할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후처(그두라)를 얻습니다.

 

사라는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 사라가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137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175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브라함은 38년 정도를 더 산 것이지요. 38년 동안 더 살며 아브라함은 후처를 얻어 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는 미디안 족속의 조상이 되는 미디안이 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족속으로 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38년간 더 살면서 후처를 얻어 자식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삭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책도 잘 마련해 둡니다. 후처를 얻어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그것은 그저 위로였지 어떠한 언약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죠. 그 옛날 약속의 자식이 아닌 이스라엘을 낳았다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식 이삭과 위로의 자식들 간에 분명한 선긋기를 합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 모든 소유를 물려 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25:5). 여기서 소유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모든 소유란 영원한 복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영원한이란 하나님의’, ‘신적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영원한 복까지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던 것이 그대로 이삭에게도 물려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약속의 아들과 위로의 아들들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잣대이기도 합니다. ‘복이 된다는 것은 이삭이 복을 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대로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축복권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이 갖게 되는 축복권의 원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축복권은 이렇게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물려받음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문화 가운데서는 장자가 그 축복권을 물려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보면, ‘장자가 축복권을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권을 물려 받은 이가 장자의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뒤 이어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아니라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축복권을 물려 받아 장자의 지위를 누리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건넸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자식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이삭에게서 멀리 떠나가게 만듭니다. 같이 살아감으로 인해서 발생될 수 있는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남은 날 동안 후처를 통하여 위로 받으면서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수행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영적 기강과 질서를 잡아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재산만 물려준다고 자식들이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아 줘야 부모가 죽은 후에도 자식들 간에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꼭 눈 여겨 봐야 할 아브라함의 죽기 전 행보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습니다. 그의 죽음 또한 하나님의 복이 넘칩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25:8). 이 문장을 영어로 보니까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Abraham breathed his last and died in a ripe old age, and old man and satisfied with life; and he was gathered to his people”(NASB).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죽음을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고, 열매가 잘 익은 것처럼 그렇게 늙어 죽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끝이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한 때 잘 나갔어도 끝이 비참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 때 비참했어도 끝에 가서 복스러우면 모든 이들의 칭송과 부러움을 삽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복스러운 것이겠지요.

 

아브라함의 죽음은 그냥 복된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 가장 서원한 관계가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였습니다. 이삭 때문에 광야로 내쫓김을 당했던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 때문에 이스마엘과 이삭 간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장사하였으니”(25:9).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이삭과 이스마엘이 힘을 모은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인해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참 신비로운 겁니다.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평소에 일어나기 힘든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화해와 평화는 죽음의 자리에서만 일어나는 신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자아의 죽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두려운 것이라기 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말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약속의 성취를 상징하는 헤브론 땅의 막벨라 굴에 사라와 함께 묻힙니다. 그 이후 이삭과 리브가도 야곱과 레아도 모두 이곳에 묻힙니다. 약속의 땅에 약속의 자존들이 함께 묻히게 되는 일은 참 보기에도 흐뭇합니다. 헤브론은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이 왕이 되어 7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다스리던 곳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유서 깊은 곳이지요.

 

아브라함이 죽은 뒤,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이 약속대로 이삭에게 임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25:11). 이삭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그의 족보가 나오는데, 이스마엘의 후손이 열 두 족속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 두 지도자들이었더라”(25:16). 이스마엘이 열 두 족속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입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숫자 12는 완전수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12명의 아들을 낳아 12지파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말년과 죽음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기 때문이고, 그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화해”, 이것만큼 가슴을 짠하게 하는 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 받게 된 우리들의 소망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말년과 기필코 맞이하게 될 죽음이 위로와 화해의 장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위로와 화해가 넘치는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끝이 아름다운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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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