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6.12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2. 2017.06.12 잔치는 시작되었다 1
  3. 2017.06.12 빛은 어둠을 이긴다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7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룻기 2

(룻기 1:15-22)


J. Crew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속도·가격이 더 중요해졌는데 제품·디자인 고집하다 뒤처져"라고 써 있었다. 이 기사가 안타까운 것은 J. Crew를 경영난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다름 아닌 미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밀러드 드렉슬러이기 때문이다.

 

드렉슬러는 미국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손을 거친 패션 브랜드는 모두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이용하는 패션 브랜드 모두가 그의 경영을 통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GAP), 올드네이비(Old Navy),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메이드웰(Made Well) 등이 그의 통해 성공을 이룬 브랜드이다.

 

《혁신기업의 딜레마》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현직 CEO는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J. Crew의 경영자 밀러드 드렉슬러가 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머물다가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뜻이다.

 

나오미에게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자기 자신도 먹고 살아야 하고, 두 며느리의 살 길도 열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오미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결단을 내린다. 자신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며느리들에게는 그들의 백성과 그들의 신들에게로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결정에 대하여 두 며느리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오르바나 룻이나 어머니를 따라 나서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오르바는 자기의 백성(모압)과 신들에게로 돌아가고, 룻만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다. 룻의 결심은 16절과 17절 두 절에 걸쳐 장엄하게 표현된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잘것없는 이방여인, 과부 룻의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이 없었다면, 룻은 오르바처럼 어쩌면 이름만 거론될 뿐, 아니,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당당하게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의 고백이 기록된 이유는 바로 이 신앙고백 때문이다. 나는 이 고백이 바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한 룻의 뛰어난(남다른)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룻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타당한 결정은 무엇이겠는가?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남편을 잃고, 아무도 자기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 돌아가 나머지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려는 살 길을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섰다. 우리가 위에서 함께 읽은 신앙고백과 함께. 룻의 결정은 이러한 싯구를 생각나게 한다.

 

모른 척 돌아서 가면

가시밭 길 걷지 않아도 되었으련만

당신은 어찌하여

푸른 목숨 잘라내는

그 길을 택하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모른 척 돌아가지 않고자신의 현실을 맞닥뜨리는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바로 나오미이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이가 나오미냐!”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나오미를 거론하며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0, 21).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의 이름처럼 기쁨이 없었다. 이제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마라가 되었다. ‘마라,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약간 희극적인 표현을 섞자면,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본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보았으면서도 위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를 남다른 인생으로 만들어준 위대한 고백이다. 나오미는 모른 척,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남의 말 삼일 가는 법이니까, 못들은 척, 그런 일 없었던 척 지나갈 수도 있었다. 또는 화를 내며 하나님을 오히려 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 켄 블렌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올랜도 씨월드에 가서 본 샤무쇼(Killer Whale Show)’이다. 그는 그 포악하고 육중한 범고래가 수준 높은 재주를 부리는 이유는 사육사의 칭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며, 칭찬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이며 통찰력이었지만, 지금은 칭찬이 한 사람이 인생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샤무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단체들의 노력 덕분에 범고래는 다시 자신들의 고향인 바다로 되돌아 갔다. 칭찬이라는 빌미로 범고래의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 한국의 EBS에서 '학교란 무엇인가-칭찬의 역효과'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거기에 보면, 칭찬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의 기억력을 평가하는 실험에서 '잘한다, 똑똑하다'라는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감독자가 밖으로 나가자 부정행위를 했지만, '노력했구나,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구나'와 같은 말을 들은 아이들은 커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방송에서 소개한 현명한 칭찬 방법은 결과보다 과정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결과에 대한 칭찬은 '다음에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어지고 아이들 자신을 스스로 평가의 잣대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예쁘다'라는 칭찬은 외모 관리에 대한 압박으로 느껴져 그 안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캐럴 드웩 교수는 "(칭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차라리 열심히 하지 않고 좋지 않은 결과를 받은 다음 사람들로부터 '쟤는 정말 천재인데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열심히 하면 잘할 거야'라는 평가를 받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칭찬의 역효과'에 대해 연구해온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 박사 역시 '칭찬은 아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올바르게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칭찬 스티커' 따위의 외재적 동기가 아닌 스스로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내재적 동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하여서도 한 번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쟤는 원래 신앙이 좋은데, 열심히 안 해서 그래?” 이게 말이 되는가? 원래 공부를 잘하는 데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공부를 못하는 것이다. 원래 신앙이 좋은 데 열심히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에서 지적하듯이, 외적인 동기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오미에게서 배운다. 나오미는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직시했다. 자신의 상황을 모른 척 돌아서지 않았다. 인생을 바꾸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현실부정이 아니라, 현실직시이다. 현실직시 없이는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인 내적 동기는 절대 생기기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신앙이란 누군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아편이 아니다. 진짜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게 만들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요즘은 다른 능력보다 인간력을 중요시 한다. ‘인간력이란 사람과 사귈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일이 힘든가? 아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 교회생활에서 무엇이 힘든가? 내가 목회를 하면서 듣는 가장 많은 토로는 교회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사람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아니면 하나님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사람과 사귀는 능력을 인간력이라 한다면, 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은 영력이라고 한다. ‘인간력영력, 어떤 게 더 어려운가? 많은 분들이 사람과 사귀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은 하나님과 사귀는 일이 더 어렵다. 훨씬.

 

나오미를 보라. 비통한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쳤다고 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이라고 고백한다. 인생의 쓴 맛을 다른 누구 때문에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런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쉬운가? 어떠한 사람이 자신에게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했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그 사람과 원수가 된다. 그런데,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안겨준 하나님을 원수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가 왜 베들레헴에 돌아왔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가장 사귀기 어려운 존재는 영적 존재인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을 해내는 사람은 그보다 쉬운 것을 문제 없이 잘 해내는 법이다. 하나님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이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거기에 갇혀 있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를 여시는 분이다.

 

가장 어려운 사귐의 대상인 하나님을 붙든 나오미와 룻, 별다른 능력이 없었지만, 다른 어떠한 능력보다 영력(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에서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나오미와 룻에게 열리는 미래를 보라.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그들의 미래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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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5

잔치는 시작되었다(The feast has just begun)

(아가서(Song of Songs) 2:10-13)


한국(동양문화권)에서 결혼은 인륜지대사(major life event)’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개인이 감당하지 않고 집안이 감당한다. 그런데, 서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결혼 당사자들(개인)이 감당한다.

In Korea (Asian culture), marriage is called 'major life event'. It mean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In the Asian culture, the marriage is not covered by the individual but the family. However, in the American cultures, the marriage is held by the married couple (individuals).

 

이것은 각 문화권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공동체가 감당하는 것이고, 서양문화권에서는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다.

This reflects the ideas of each culture. In the Asian culture, the community carries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community than the individual. In the American culture, the individual cares for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individual than the community.

 

여기서 무엇이 더 낫다, 옳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일을 감당하느냐 보다, 그 일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It is pointless to ask 'what is better, right' here. The important thing is that it i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성경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가르침은 이렇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경 중간 어디쯤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나온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한다고 판단하시고, 아담(사람)을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다.

The Bible teaches the marriage like this. The Bible's teaching about marriage does not appear anywhere in the middle of the Bible. It is in Genesis, the beginning of the Bible. Genesis 2 tells us that after God created Adam(human), it is not good for him to live alone, and he made a helper for Adam(human).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의 돕는 배필을 지으실 때 다른 무엇에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돕는 배필을 만드신다. 이것은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와(여자)는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아담(사람)에게서 왔다.

By the way, when God makes the helper suitable for Adam, he does not make it from anything else, but makes a helper for him by taking one of Adam's ribs. This is not a verse that says that a woman (Eve) is a subordinate to man (Adam). This tells us that Adam and Eve are essentially the same. Eve (woman) came not from another, but from Adam (human).

 

(사람)의 돕는 배필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를 아담 앞으로 이끌고, 아담이 그 돕는 배필의 이름을 짓게 하신다. 아담은 그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뜻으로 여자라고 부른다. ‘여자라는 의미는 남자, 여자라고 부르는 성적인 구별 이전에 사람이라는 의미가 먼저 앞선다. 그 말은, 남자와 여자는 사람으로서 평등하다는 뜻이다.

God, who made the helper of Adam (man), leads him to Adam, and Adam makes the name of the helper. Adam calls it "a woman" in the sense of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 meaning of 'woman' means 'human' before the distinction between men and women. That means man and woman are equal as human.

 

그 후에,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다( 3:20). 이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 아담은 자신의 돕는 배필인 여자를 자신의 생명처럼 생각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5).

After that, Adam names the woman Eve (Genesis 3:20). It means 'life'. What is this? Adam meant that he thought of the helper 'woman' as his own life. The Bible tells this story and says about marriage as follows.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united to his wife, and they will become one flesh. The man and his wife were both naked, and they felt no shame”( 2:24-25).

 

 

그렇다. 남편와 아내는 부모를 떠나 결합한 한 가정이고 인격체이다. 이제 그들은 한 공간에서 벌거벗고 있어도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벌거벗으면 부끄러운 법이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Yes. A husband and wife are a family and a personality that leave their parents. Now they are naked in one space, but they are not ashamed of one another. Isn’t it? It is a shame if a person is naked. By the way, a husband is not ashamed of his nakedness in front of his wife and the same with the wife in front of her husband. It is very strange if husband and wife are ashamed of being naked.

 

우리 시대는 결혼을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말씀)이다. 그야말로 인륜지대사이다. 그러나, 이것을 공동체가 감당하느냐, 개인이 감당하느냐가 문화마다 다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선택의 문제는 우리 인류에게 달려 있다.

Our time tends to think of marriage as an option. However, the Bible does not. Marriage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an order of God. It is indeed a major life event. Of course,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to obey God's command depends on our humanity.

 

오늘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따라, 결혼하기로 결단한 줄로 믿는다.

Today, I believe that both of you are determined to marry to each other according to God's command (Word).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들은 모두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생명을 헤치는 법은 하나도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 중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서로 사랑하라!” 나는 이 법의 최고의 결과물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All the laws God has ordained enrich life. There is no law in God's law to harm life. In the Bible, the best law that God has ordained is the law of love. "Love one another!" I think that the best result of this law is "marriage." Marriage is the greatest fullness among the fullness of life. So marriage is called a feast.

생명의 충만함 중에서도 최고의 충만함이다. 그래서 결혼은 잔치라고 부른다.

 

잔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잔치 때 아끼는 사람은 잔치를 모독하는 것이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은 무엇보다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결혼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아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랑을 왜 아끼나? 아낌 없이 쏟아 부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부끼리 사랑만큼은 탕진해도 된다.

What is the greatest feature of the feast? It does save nothing. The person who save things in the feast is blaspheming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married people should not save love more than anything else. It is strange that married couples save love one another. Why do you save love? You have to pour out love for one another. You can squander love for one another as you are married.

 

요즘 미국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 중 한 명인 팀 켈러 목사가 쓴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팀 켈러 목사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prodigal’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하여, 하나님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There is a book <The Prodigal God> by the Rev. Tim Keller, one of the most famous pastors in the American church, There, Rev. Tim Keller analyzes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of Luke 15 and applies the word "prodigal" to God, calling God "The Prodigal God".

 

‘prodigal’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탕부 하나님, 20). 누가복음 15장의 소위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게사랑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시다.

'Prodigal' do not mean 'recklessly extravagant', but rather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It means 'having spent everything'. (The Prodigal God, p. 20). As you see in the so-called Parable of the Prodigal Son in Luke 15, the father loves his little son and his great son like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and he 'has spent everything' in order to save them. So, God is 'the prodigal God'

 

결혼은 잔치다. 찬치에서는 무엇이든지 아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아껴서는 안 된다. 탕신랑이 되고, 탕신부가 되라.두 사람은 이제 한 몸이 된다. 두 사람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잔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되는 사랑의 잔치에서 두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무한대로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Marriage is a feast. You should not save in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you should not save love while married. Be a prodigal husband and be a prodigal wife. Both of you are now one body. Both of you have just begun the feast in the fence of family. At the beginning of the love feast, I bless that the lives of you two will be enriched as infinitely as God wants.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의 말씀처럼, 두 사람의 결혼, 이제 시작된 사랑의 잔치를 통해, 두 사람의 인생 가운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며, 비가 그치며, 그 삶 가운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열매가 익고 향기를 발하며, 그 입술에서 사랑의 속삭임이 끊이지 않는 아낌없는 사랑의 축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Through the marriage of you two, the feast of love that has just begun, as in the Song of Songs we read today, I bless that the winter is past, the rains are over and gone, flowers appear on your married life, the season of singing has come, the cooing of doves is heard in your land, the fig tree forms its earl fruit, and the blossoming vines spread their fragrance in your love.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속삭여 보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의 은총을 빈다.

Whisper to each other like this. “Arise, come, my darling; my beautiful one, come with me.”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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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2

빛은 어둠을 이긴다 

(요한복음 8 12-20)


이스라엘에는 7대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가 있다. 유대인의 절기는 유월절에서 시작해서, 초막절에 끝난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 있고, 오순절(칠칠절)은 곡식의 첫 수확과 관련 있고, 초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에 거한 것을 기념하며 곡식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절기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축제이다. 눈을 떠서 제대로 보면, 이 세상은 감사할 일 천지다. 불평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늘 말씀의 시간적 배경은 초막절이다.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가셨고, 그곳에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결을 펼치며 가르침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에고 에이미의 형식을 빌어 세상에 드러내시는데, 오늘은 특별히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예수님이 뜬금없이 자기를 빛으로 소개한 것은 아니다. 초막절 축제 때 행하던 빛의 의식에 빗대서 자신을 빛으로 소개한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초막절 축제 때 젊은 제사장은 사다리에 올라 여인의 뜰에 있던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붙였다. 이 빛은 온 예루살렘을 비춘다는 것을 상징했다. 시편 27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스라엘에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대적자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현현하실 때 빛으로 나타나신다. 빛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특별히, 이사야서 60 19-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성경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빛이라는 상징은 매우 강력한 상징이다. 요한복음 1장은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 특별히 요한복음 1 5절 말씀은 이렇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과 어둠이 대비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어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빛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을 통한 성경의 메시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에 오기 전 겨울의 끝자락, 그러니까, 2003 2월 어느 날, 나는 사촌형과 함께 설악산 등산을 했다. 우리가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마음 먹는 날은 대설주의보로 인해 흰 눈이 온 산을 덮었던 때였다. 산행금지가 풀린 시간은 오전 11시였고, 사촌형과 나는 계획대로 설악산을 올랐다. 오색 약수터 쪽 등산로를 이용하여, 죽을 고생을 하며 설악산 정상인 대청봉에 올랐는데, 그때는 이미 시간이 오후 5 30분 경이었다. 너무 추워서, 정상에 5분도 못 머물러 있고, 곧바로 하산 했는데, 산을 내려오면서 그만 해가 지고 말았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것은 그날 반달이 하늘에 떴다. 설악산 꼭대기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비추는 반달의 빛 때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의 위력은 대단하다. 생명을 살린다.

 

위에서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도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에서 는 애굽을 의미하고, ‘은 바벨론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질곡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은 이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주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힘 센 애굽에 붙었다, 더 힘 센 바벨론에 붙었다 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애굽바벨론을 빛으로 여기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고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 빛이 되어 줄줄 알았던 애굽과 바벨론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빛은 그들을 괴롭히고 멸망시켰다. , 그것은 참빛이 아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빛이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슬픔의 날을 끝내실 수 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요한복음 1 5절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람바노이다. 이 말은 붙잡다, 깨닫다, 이기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번역은 이 구절을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빛과 어둠은 어울릴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초막절에 세상을 비추는 등불에 빗대어,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빛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갈망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빛으로 오시는데, 빛으로 오신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은 언제나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 슬픔의 날이 물러가고, 기쁨의 날이 온다. 그 기쁨이 지금 이곳에 임했다. 왜냐하면, 빛이신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이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하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빛은 누구(무엇)인가? 애굽인가? 바벨론인가? 우리에게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인 것이 깨달아지는 자에게는 구원의 빛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마음에 붙들고, 어둠을 이기며 살 것이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인 것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세상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빛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구원의 빛을 날마다 비추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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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