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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10 벧아웬에서 돌이켜 벧엘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2. 2017.10.10 졸혼풍조와 교회
기도문2017. 10. 10. 20:51

벧아웬에서 돌이켜 벧엘로 가기를 간구하는 기도

(아모스 5:4-6)

 

주님, 불의한 길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그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께 돌아옵니다.

주님을 찾지 못하고, 벧아웬의 길로 갔던 우리들 용서하옵소서.

이 시간, 허무한 것, 무가치한 것을 따라갔던 우리들이

벧엘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자 마음을 돌이켜 왔사오니,

우리를 만나 주옵소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순간이고,

우리의 인생에 가장 큰 위로이고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 하옵소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을 찾으면,

주님께로 돌아가면

반드시 살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졸혼풍조와 교회

 

'졸혼'이라는 용어는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졸혼'이 유행인 듯 하다. 이혼의 상처가 만만치 않기에 차선책으로 졸혼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도 줄일 수 있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함으로 인해 오는 여러가지 법적 이익도 계속 누릴 수 있으며, 법이 정해준 테두리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 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졸혼의 가장 큰 장점은 '별거'와 사생활'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 받으려는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오랜 세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심하게 침해당해온 '개인'에게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 주는 유용한 통로도 쓰이고 있는 듯 하다.

 

모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인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풍조처럼 느껴진다. 이것의 가치평가를 따지는 일은 매우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로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교회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는 공동체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가 '믿음' 또는 '구원'이라는 신앙공동체적 요소 때문에 때로는 개인의 자유가 얼토당토 안 하게 침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현상에 반발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공동체 생활에 대한 '졸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선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체감하는 현실은 매우 난감하다. 교회공동체를 떠난 '가나안교인'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공동체 내에는 대개 두 부류의 교인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인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며 신앙생활 하고 싶어하는 신앙인 부류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 보면,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부류도 저변에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싶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개 공동체를 강조하는 부류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자신들이 공동체에 희생하는 만큼 희생을 보이지 않는 부류들에 대한 불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들도 자신들이 희생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선다 싶으면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현대(신앙)인들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못하는 목회자는 공부를 더하거나, 목회현장을 떠나야 한다.)

 

요즘 목회현장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졸혼'의 저변에 깔린 것과 같은 '별거' '사생활'의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유행 때문이다. 요즘 신앙인들은 교회에 출석하긴 하지만 교회에 소속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사생활의 일부분 일뿐이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개방하는 것만 수동적으로 교회가 받아들이길 바랄 뿐, 교회(또는 목회자)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생활의 대표적인 공간인 가정집 심방은 극도로 드물고, 대신 전화심방이나 다른 형태의 심방이 선호된다.

 

교회공동체성의 회복은 단순히 공동체를 강조하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을 통해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키기 원하는 요즘 신앙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 또는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말한 스텐리 하우워즈의 말처럼, 공동체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 교회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은 올바른 개념의 확립을 통해서이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지력을 통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회공동체의 운명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신앙인들)을 위한 현대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그 명암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공동체의 과제일 뿐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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