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7. 10. 5. 10:30

묵상을 간구하는 기도

(시편 1편)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악인들의 꾀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게 하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하지 마옵소서.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멸망 받을 자들이니이다.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말씀으로 삶을 빚어가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우리의 삶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고통, 허무, 불안, 두려움을 물리치고

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생명력과 풍성함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을 믿나이다.

주여,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복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7. 10. 5. 10:29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21:4-9)


주님, 트라우마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두려움 속에 가두었나이다.

우리는 고개를 들지못하고 트라우마 불뱀에 물려 죽고 있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장대에 높이 달리 놋뱀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고개를 들어 주께서 준비하신 또다른 부활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메타노이아의 용기를 내게 하옵소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각종 트라우마를 물리치고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오니,

주께서 준비하신 생명의 길을 보여 주옵소서.

우리는 그 삶으로 메타노이아 하겠나이다.

주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줄 믿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4

복 있는 사람

(시편 1:1-6)

 

나는 쇼팽을 좋아한다.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를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꺼야!’ 언제 이러한 메시지를 집사람한테 보냈더니, ‘유구무언이라는 답장이 왔다. (아마도, ‘그래서 뭘 어쩌라구?’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쇼팽의 음악은 음악계의 시편과 같다.

 

성경이 마르지 않은 샘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 성경에 시편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양의 노래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Psalms’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현악기인 프살테리온(psalterion)에서 왔으며, ‘현 반주를 곁들인 노래라는 뜻이다.

 

노래(찬양)는 기본적으로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와 같이 시편은 노래(찬양)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문학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1편의 예를 들자면, 시편 1편의 첫 단어는 아쉬레이고 마지막 단어는 토베드이다. ‘아쉬레복 있는 자이고, ‘토베드망하리로다이다. 그런데, ‘아쉬레는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하고, ‘토베드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타우로 시작한다. 이는 멸망하게 될 악인을 알레프에서 타우까지 먼 것처럼멀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어 전개된다.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을 구성하는 시편으로서, 원래 한 쌍을 같이 봐야 한다. 시편 1편이 아쉬레로 시작하는데, 시편 2편은 아쉬레로 끝난다. 이러한 것을 수미쌍관(인클루지오)기법이라고 한다.

 

아쉬레복되다!’라는 뜻이다. 일단 아쉬레를 들으면,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무엇이 복되다는 것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는 복되다!

 

구약성경에는 이라는 단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바라크( בּלק)’이고, 다른 하나는 '아쉐르'(אשר)이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바라크는 일종의 선행은총이고, ‘아쉐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축복이다. 그러니까, ‘바라크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이고, ‘아쉐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응답적으로 반응했을 때 얻게 되는 복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라사), 죄인들(하타임), 오만한 자들(레침)과 함께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유죄로 정죄 받은 자들을 말하고, 죄인들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자들을 말하고,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들을 말한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로 갈수록 그 상태가 더욱더 악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의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독야청청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주위에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이 세상에는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의인 곁을 우는 사자와 같이맴돌며 의인을 넘어뜨리려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 구절이 그 대답을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보고자 한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이다. 하가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읊조리다, 으르렁대다, 그리고 꾸민다(plot, device)’이다.

 

우선, ‘읊조리다는 비둘기가 구구대면서 반복적으로 내는 소리를 연상하면 된다. 시편은 눈으로 읽으면 안 된다. (사실, 성경 말씀 전체가 그렇다.) 시편(성경)은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서 읽어야 한다. 원래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어 읽어서 마음에 새겨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잘하지 못한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 중에 시편을 인용한 것이 많은 이유는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시편(구약성경)을 암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다같이 성경을 소리내서 봉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배의 과정이다.)

 

둘째, ‘으르렁거리다는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좋아서 그렇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와 같다. 우리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움켜잡고 으르렁거리며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두 번째 이유는 주변에 경고하기 위함이다.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다가서는 동물은 없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사라처럼 으르렁거리며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과 싸워야 한다.

 

사실, 이것도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주변의 하이에나가 와서 먹이를 덥석 채 간다. 우리 주변을 맴도는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곁을 지나다 그 곁에 서게 되고 그들과 함께 앉게 된다. 이는 첫 말씀 복 있는 사람은 악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의 반대로 가는 것이다.

 

세번째, ‘꾸민다(Plot, Devise)’라는 말은 시편 21절에 표현된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Plot, Devise)?” 내가 보기에는 ‘devise’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Devise’‘plan or invent by careful though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심사숙고해서 어떤 것을 계획하고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 가진 깊은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묵상이란 단순히 읊조리며 외우고, 기뻐하며 또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빚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 자세가 있다. 하나는 informational reading이고, 다른 하나는 formational reading이다.  Informational reading은 성경을 읽으며 그저 거기서 어떠한 정보를 얻으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고, formational reading은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새롭게 빚어가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 삶의 당면한 문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능력(power)이다. 시인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항상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미완료형 동사가 쓰였다. 영어로는 “He will be like a tree firmly planted by streams of water”라고 되어 있다. 시인은 미완료형 동사를 써서 복 있는 사람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삶이 죽어 있는 것 같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게 복 있는 사람의 자리를 떠나,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인들의 자리, 죄인들의 자리,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인으로 추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빗나간 화살처럼 내 마음대로 길을 가고, 추악한 말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어느덧 나의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 없이 가벼워진다. 고통이 밀려오고, 허무가 밀려오고, 불안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꼭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명력과 풍성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가)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빚어가야 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무엇이 여러분을 생명력과 풍성함 가운데 거하게 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다면, 왜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가? 어떠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기도드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또는 강퍅하게 살고 있으면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자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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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2

메타노이아 트라우마 넘어서기

(민수기 21:4-9)


메타노이아(metanoia)는 헬라어인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회개(repentence)’이다.  내가 굳이 우리나라 말인 회개를 쓰지 않고, 헬라어를 쓰는 이유는 회개라는 말이 오염됐기 때문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언어는 역사와 컨텍스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지시하고 있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죄를 뉘우치는 것정도가 떠오른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를 그 정도로만 축소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죄의 뉘우침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메타노이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트라우마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심적외상을 말한다. 사람은 외적인 손상이나 어려움을 경험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외적인 손상을 복구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마음의 손상을 복구하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받은 트라우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일명 불뱀사건이다. 그들이 불뱀사건을 겪게 되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가면서 계속해서 일련의 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불뱀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들이 겪은 네 가지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미리암의 죽음 신광야 가데스에서 일어난 일

2) 므리바 물 사건 물이 없어서 원망: 모세와 아론이 엎드려 기도해서 반석에서 물을 얻는 은혜를 얻지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면서 반석을 두 번 치는 행위를 통해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

  3) 홍해로부터 다메섹에 이르는 왕의 길로 통과하지 못하게 됨: 에돔에게 정중히 부탁했으나 거절당해서,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 게된다. 그들은 에돔이 이스라엘의 형제(에서의 자손)로 생각하고 당연히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으나 거절당한다.

  4) 아론의 죽음: 호르산에 이르러 초대 대제사장이요 모세의 평생의 동역자이자 친형인 아론이 죽는다.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 30일 동안 애곡한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트라우마를 안고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여 가고자 했는데, 길이 너무 험해서 그것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극심한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상하고, 지쳐 있었다. 계속적인 실패와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고개가 숙여진 상황이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라는 책을 보면,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1) 우월감 트라우마: 사람대접 못받을까봐 외향에 치중하는 사회

2) 분단 트라우마: 빨갱이 전략, 어떤 모략에 걸릴지 몰라 두려워하는 사회

3) 변방 트라우마: 권력의 이익으로부터 소외되어 차별 받을까봐 몸사리는 사회

 

여기에, 세대별 트라우마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1) 1940,50년대 생: 좌절 트라우마 (너는 이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 국제시장)

2) 1960년대생: 미완성 트라우마 (내 욕심만 좇느라 민주와 정의를 후퇴시겼구나)

3) 1970년대생: 혼돈 트라우마 세계화시대 – (신자유주의 체제내에서는 나의 개인적 꿈(소망)이 실현될 수 없다)

4) 1980년대생: 공포 트라우마 (당장 먹고사는 일이 걱정 낭만을 잃은 세대)

 

이스라엘은 에돔의 비협조로 인해 왕의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험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 슬픈 현실을 맞닥뜨렸다. 그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이 상하니라 (the people grew impatient on the way).”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성난 함성을 질렀다. “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이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표출이다. 그들은 절망했고, 불안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가 가져다 주는 절망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실제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불뱀의 등장이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목숨을 잃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음악이 있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씌어진 소설이 있다. 음악은 작곡가 라벨이 지은 곡인데, 그는 '옛 스페인의 궁전에서 작은 왕녀가 춤을 췄을것 같은 파반느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박민규가 지은 것인데, 제목은 라벨의 음악에서 따왔고, 그의 소설 책 표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이란 그림에서 추녀 시녀에게 조명을 비추고 있다. 

 

박민규는 그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에 대하여 고발한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는 한 마디로, ‘인정욕구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속에서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인정 받지 못한 자는 사회의 낙오자로 여겨져 도태되고 목숨을 잃는다. 20대 사망 원인의 제 1 순위는 자살이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일년에 14,000명 정도가 자살한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메타노이아였다. 메타노이아는 죄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를 갈구하는 마음이 아니다. 죄 지은 것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만 갈구하면 뭐하는가? 다음에 또 똑 같은 죄를 짓게 될텐데. 메타노이아는 현재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길은 반드시 있다. 다른 인생, 너머의 인생이 반드시 있다.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 부른다. 메타노이아란 현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는 트라우마를 넘어서서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도약을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본다. 탕자는 어느 순간 돼지같이 비천한 삶에서 괴로워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현재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탕자는 메타노이아를 통해 새로운 삶,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삶이 있다! 불평과 원망, 트라우마 속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나가는 삶이 아닌, 생명을 얻는 삶이 그들에게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장대에 높이 걸려 있는 놋뱀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일이다. 장대를 보려면, 필연적으로 고개를 들어야 한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8, 9).

 

여러분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절망, 불안, 인정욕구 등,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 어려움이 전부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놋뱀’, 즉 주님이 준비하신 또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두려움에 꼼짝 못하게 가두지만, 메타노이아는 그 두려움을 깨뜨린다. 현재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있다면, 눈을 들어 놋뱀(십자가)을 바라보라.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 주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고개 들고, 어깨 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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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