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인가?

 

도덕과 윤리가 종교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들을 종교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를 도덕과 윤리에 가두어 놓는 결과를 범하게 될 수 있다.

 

도덕과 윤리는 절대적이 아니고 가변적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도덕과 윤리는 달라진다. 가변적인 것에 종교를 가두어 놓으면, 종교는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라기 보다는 '생명'이다. 생명이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도덕과 윤리가 생명에 봉사해야 한다. 종교가 도덕과 윤리를 핵심 과제로 삼을 때, 종교는 생명을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도록 희생시킬 수 있다. 종교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생명(인간)을 인간 취급 하지 않을 것인가? 다른 말로 해서,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할 것인가?

 

기독교,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믿음의인'에서의 믿음은 '사람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담고 있는 성품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믿음을 도덕성과 윤리성, 그리고 성품의 변화와 연결시키면 믿음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을 도덕성과 윤리성에 옭아매 놓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믿음의 문제를 도덕성과 윤리성에 결부시키면, 그것은 어거스틴에게 정죄당했던 도나투스주의로의 회귀 일 뿐이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결국 믿음을 통한 인간의 알량한 도덕적/윤리적 구원만 남는다.

 

종교의 핵심을 도덕성과 윤리성으로 규정하는 일은 구원을 개인에게 책임지우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논리이다. 모든 결과를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주체(다른 말로, 능력이 없으면, 그것이 실력이든 도덕이든)가 발붙일 공간이 없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종교의 핵심은 생명이어야 한다. 도덕성과 윤리성이 생명에 봉사하게 해야지, 생명이 도덕성과 윤리성에 봉사하게 하면 안 된다. 도덕성과 윤리성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바꾸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다.

 

충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못한 것, 성품의 변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어서 그렇지, 믿음이 없어서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강화하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쪽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옳다.

 

"주여,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도 좋지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도이다.

 

* 이 글은 박충구 교수님이 쓰신 '몇 가지 생각'(10 27일 페이스북에 쓰신 글)에 대한 일종의 반론입니다. 마침, 제가 고민하던 주제에 관한 글을 올리셔서 반론을 펴 봅니다. 제가 고민하던 주제는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인데, 박충구 교수님의 글은 제 생각과 반대의 주장을 펴시는 것 같아, 글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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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