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5.11.01 비 오는 날의 도너츠
  2. 2015.11.01 지우개와 놀이
  3. 2015.10.28 조경과 국정교과서
  4. 2015.10.21 방향제와 난
  5. 2015.10.09 아들의 가족 그림
  6. 2015.10.07 후배의 죽음
  7. 2015.10.03 희락당과 사현 2
  8. 2015.10.01 버섯
  9. 2015.09.25 동심처럼 예쁜 꽃
풍경과 이야기2015. 11. 1. 14:29

비 오는 날의 도너츠

 

1989년,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 만들어진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와>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정작 그 영화는 1990년 2월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나는 그 영화를 고2가 되기 전 봄 방학에 봤거나, 고2가 되고 난 3월쯤에 봤던 것 같다. 날씨가 좀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 영화를 함께 본 교회 누나(이문선)와 친구(오정환, 나의 죽마고우)의 두툼했던 옷차림도 기억난다. 교회 누나는 분명 바바리 코트를 입었었다. 그 영화를 본 장소는 종로에 있는, 그리고 단성사 앞에 있는 피카디리 영화관이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생각하면 단연 주제곡이 생각나고, 그 다음엔 혜성처럼 등장한 여배우 옥소리가 생각난다. 주제곡을 불렀던 세 사람(김현식, 강인원, 권인하) 중 김현식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 예쁘던 옥소리는 인생의 풍파를 겪고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조차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이면, 사실 나에겐 <비 오는 날의 수채화>보다 한 발짝 먼저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 오는 날의 도너츠이다. 이건 어떤 영화나 노래 제목이 아니다. 이건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도너츠이다. 엄마는 비 오는 날이면 (물론 비 올때마다 그러신 건 아니지만), 가족들을 위해 도너츠를 만드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그렇게 건강식품은 아니었다. 계란 반죽을 한 밀가루를 기름에 넣고 튀긴 도너츠였다. 그야말로 요즘 말로 불량식품이었다.

 

그러나 건강식품과 불량식품의 구분이 모호했던 그 시절, 그리고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았던 그 시절, 엄마가 비 오는 날 해주신 도너츠, 일명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우리 형제에게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엄마가 해 주신 도너츠는 금방 동이 났다. 한창 자라고 있는 우리 형제가 게 눈 감추듯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어릴 때 그런 것을 먹어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거라고 우긴다. 사실, 나는 아내가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좀 서운하다. 물론 아내는 나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이겠으나, 나에게 ‘비 오는 날의 도너츠’는 불량식품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다. 엄마의 사랑이 배어 있는 음식을 ‘불량식품’이라 말하는 것은 어쩐지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 물론 나는 지금 ‘인간미’보다 실질적인 건강식품을 먹어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이제 팔순을 넘기신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해주신다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비 오는 날의 도너츠’를 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비가 온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들으며 ‘비 오는 날의 도너츠’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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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1. 1. 06:05

지우개와 놀이

 

어느 날 교회 주차장에 지우개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요일만 되면 아이들은 수요 예배 때문에 교회에 오는데, 그때 교회에 오는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밖에 없다. 예배 드리는 동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공작활동도 하고 게임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 시간을 위해 아이들은 집에서 쓰던 학용품들을 교회에 가져오는데, 다시 집으로 가지고 가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지우개인 것 같다.

 

지우개는 나의 중학교 1학년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 당시 우리 학교(영동중학교)에서는 지우개 싸움이 유행이었다. 일명 지우개 레슬링인데, 지우개를 뾰족한 샤프 끝으로 조정하여 상대방 지우개에 세 번 먼저 걸치거나, 아니면 먼저 위로 올라타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나는 그 당시 우리 반에서 지우개 싸움을 제일 잘했다(사실, 진짜 싸움도 제일 잘했다.^^). 아무도 나의 적수가 없었다. 지우개 싸움을 꾀나 한다는 아이들이 매일 같이 나에게 도전했지만, 언제나 이겼다. 그때 지우개 싸움을 해서 따낸 지우개가 수 백 개에 이른다. 나는 지우개를 크기에 따라 별 하나에서 별 다섯 개까지 등급이 매겼었는데, 손바닥 만한 지우개도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나온 이래로 그 많던 지우개의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 이전까지 그때 딴 지우개를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지우개 싸움 같은 것을 하지 않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그렇게 놀았다. 모든 것이 놀이 기구였다. 사실 지우개 싸움도 산업화 된 이후에 나온 신종 놀이였다. 그 이전에는 지우개가 귀해서 지우개 싸움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지우개 구하기가 쉬워지고 값이 싸진 후에 지우개 싸움도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어릴 적 가장 대중화되었던 놀이는 딱지치기와 구슬치기였다. 헌공책이나 잡지를 뜯어 만든 딱지로 서로의 딱지를 넘기며 놀았다. 구슬이 등장한 뒤, 딱지치기 보다 구슬치기가 더 유행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나 친구가 없으면 못 노는 그런 놀이였다.

 

놀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거였다. 지금은 아이들이 전자게임이나 온라인 게임을 주로 하기 때문에 친구가 없어도 혼자 놀이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놀이라기 보다 그냥 게임일 뿐이다. 놀이는 혼자서 하면 재미 없다. 친구가 있어야 재밌다.

 

호이징가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놀이하는 인간이었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놀이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를 배우면서 성장한다. 놀이는 그만큼 인간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놀이하는 게 쉽지 않다. 세상을 다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등져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놀이를 할 때만큼 기쁘고 즐겁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시간이 언제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더 이상 놀이에 흥을 못 느끼는 인간은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과 지우개 싸움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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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28. 05:56

조경과 국정교과서

 

교회 주차장 한 켠에 있는 꽃나무들을 손 봤다. 그게 원래 사람 키만큼 크고 뒤쪽으로 퍼졌던 거라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평소 교회 조경을 담당하시는 미국 남편들이 관리하기 너무 힘들다며, 관리하기 쉽도록 손보자고 제안했고, 결국 조경업체를 불러 거대했던 꽃나무들을 관리하기 편하게 아담한 사이즈로 만들어 놓았다.

 

클 수 있는 만큼 뻗어나가던 꽃나무들을 아담한 사이즈로 손질한 이유는 미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다. 관리하는 사람이 관리하기 편하도록 아담한 사이즈로 만들어 놓았다.

 

요즘 한국에서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여론이 뜨겁다. 박근혜 정부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국민통합을 위해서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이 언뜻 보면 온당한 것 같지만, 그것은 매우 독재적인 발상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국민통합이 내 귀에는관리하기 편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밖에 안 들린다.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시키겠다는 것은 꽃나무들을 관리하기 편하도록 아담한 사이즈로 손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시각으로지나온 세상(역사)’를 볼 권리가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자신도 자신의 시각으로지나온 세상을 볼 권리가 있다. 그의 눈에 아버지의 독재와 유신은 여느 사람과 다르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나는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믿고 있다. 그동안 매도당하고 있었던 유신, 5.16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해야 한다.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고 당장 비난을 받더라도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그게 정치이다. 그래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다. 부모님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하나라도 바로 잡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1989 MBC 박경재 시사토론)

 

누구나지나온 세상을 자기의 시각으로 볼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도 이렇게 말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의 시각을 남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자기의 생각, 자신의 견해, 자신의 시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 견해, 시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독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불통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스리기 쉽도록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존재대로 뻗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자유이다. 이것을 빼앗기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이것을 빼앗는 인간은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인간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것을복음으로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자유를 빼앗는 일에 동참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에게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는가. 어떠한 모양으로든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려 드는 자,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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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21. 08:01

방향제와 난

 

사무실 스팀청소를 한 뒤, 쾌적한 환경에 방점을 찍기 위해 집사람이 방향제를 사다 주었다. 나는 방향제와 난을 보면 군대 생각이 난다. 나는 군생활을 대전 계룡대의 육군본부에서 했는데, 작전처장 장군운전병으로 근무했다.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한 달 전 육군본부 장군운전병의 선발 방법이 바뀌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동원예비군을 총괄하는 동원예비군참모부장(별 두개)이 운전병의 운전실수로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 동승했던 동원부장 부인도 함께 죽었다. 사고를 낸 운전병은 남은 군생활을 남한산성 영창에서 보냈고, 그 당시 행보관(행정보급관, 원사)은 그 운전병 면회를 자주 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육군본부 수송대대는 장군운전병 선발 시스템을 육군훈련소(논산)에서 미리 선발해 훈련시키는 시스템으로 바꾸었는데, 그때 내가 처음으로 그 선발 시스템에 의해 선발 되어 제2수송교육단(대구경산)에서 3주 세단 운전병 훈련을 받은 뒤 육군본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자대 배치를 받은 후, 수송대대에서 두 달 정도 내무반 생활을 하며 장군운전병 실전 훈련을 받은 뒤 전역하는 선임 운전병을 뒤이어 장군운전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는데, 그때 나를 운전병으로 선발한 장군은 육사 26기 김창호 장군으로, 육본의 보직인 작전처장이었다. 작전처장 자리는 군부시대에는 하나회회원이 아니면 절대로 갈 수 없었던 보직이었다. 내가 군생활 할 때는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회 출신이 거의 군대 내에서 사라진 시점이었고, 이 자리는 작전 분야에 정통한 실력파가 오는 자리였다. 그래서 대령때까지 작전 분야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쌓았던 김창호 장군이 윤용남 참모총장에 의해 발탁되어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김창호 장군과 내가 육군본부 전입동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199546일 같은 날 육군본부로 전입되어 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전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했다. 물론 나는 1997417일에 전역했지만, 김창호 장군은 그 시기에 투스타로 진급하여 15사단장으로 전출되었다.

 

육군본부 장군 운전병은 여러 가지 역할을 감당한다. 보통 군대에서 장군에게는 운전병 외에 요리병과 당번병, 그리고 부관이 따라 붙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운전병 혼자서 그 모든 역할을 감당한다. 그래서 운전병 선발 시스템을 미리 뽑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똘똘한 놈 뽑아서 여러 가지 일을 감당시키려 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장군 운전병 선발 기준에는 몇 가지가 적용되었다. 첫째, 운전실력이 좋을 것. 둘째, 서울 강남에 살 것. 셋째, 학력이 좋을 것. 넷째, 집안이 건실할 것. (사실, 이렇게까지 잣대를 들이대며 운전병을 뽑아야 하나, 의문이다.)

 

둘째와 셋째 기준 때문에 내가 군생활 할 때의 운전병들은 그만그만한 곳에서 선발되어 왔다. 강남에 사는 친구들을 선발하다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 후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리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그리고 유학파 출신이 40명 정도되는 장군운전병들 중에 반수를 차지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우리들끼리 연고전 같은 것도 하고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끼리끼리 짝지어 놀고 그렇지는 않았다. 군대이다 보니, 사실 그러한 출신 배경들이 별로 무의미했다. 그리고 내 성격 상 끼리끼리 노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모든 장군 운전병들과 사이 좋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장군 중에서도 요직에 있는 장군은 운전병과 관사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데, 나는 요직인 작전처장 운전병이었기 때문에 장군 관사에서 장군과 함께 생활했다. 계룡대에는 육군본부 외에 공군과 해군 본부가 함께 있기 때문에 장군들이 많이 거주한다(그 당시 한 60명 정도). 그래서 따로 장군들을 위한 식당이 운영된다. 그 덕분에 관사에서 내가 직접 음식을 차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모든 살림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내가 매일 같이 한 것은 관사 청소와 근무복 다림질과 군화 닦는 것과 재떨이 비우는 것과 빨래였다. 그때 하도 매일 같이 다림질 하고 청소를 해대서, 나는 지금까지 다림질 하는 거랑 청소기 돌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히 재떨이를 비울 때는 마음이 좀 심란했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을뿐더러, 재떨이 비우는 일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이라 매우 생소했다. 우리 집은 술과 담배와 멀리 살았던 집이라 그랬던 것 같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관사의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었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샀던 물건이 방향제였다. 그리고 관사에서 화초를 키웠는데 그게 난()이었다. 그 당시에 군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은 난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통해 들어온 난을 관사에 가져다가 키웠는데, 20개 정도 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을 키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매주 2시간씩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푹 담가 놓아야 하고, 관리를 잘 해줘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관리한 난에서 꽃이 피는 날이면 장군이 그 향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 속으로, 입을 삐쭉이기도 했다. 난을 키우는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장군이 난 꽃의 향기만을 좋아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쁨은 자신의 수고로움의 끝에서 와야 제 맛인데, 남의 수고로움에서 온 기쁨을 가로채는 것은 별로 눈에 선해 보이지 않았다.

 

내 군생활은 매우 특별한 체험이었다. 그 당시 육해공 장군수가 430명 정도였으니까, 전체 일반 사병 중 장군 운전병 숫자는 매우 제한적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병으로서 아무리 벽돌을 쌓아도 닿을 수 없는 저 하늘에 있는 ’, 그 별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자리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특별히, 윗사람(상관)을 어떻게 보필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큰 조직이 돌아가는 법과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물론 군대의 자리와 내 목회의 자리가 달라 좀 안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장군운전병을 통해서 배운 것은 나에게 큰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군생활 하면서 장군을 모시느라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밤에 잠을 마음 놓고 자 본 적이 없다. 밤마다 자주 지휘통제실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서 보고해야 했고,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장군을 깨어드려야 했다. 나는 한 번도 알람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없었다.  그만큼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비염과 근육통증병을 얻어 나왔다. 나는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고생하고 있다. 군대에서 얻은 병이라, 그리고 이미 20년이 지난 후라, 군대에서 얻는 병 때문에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서 몸 건강히 있다 제대하는 것이 최고의 복인 것 같다.

 

나는 방향제와 난()만 보면 군대생각이 난다. 어떠한 물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물건은 때로 기능을 넘어 지난 세월에 대한 매개체 역할을 감당한다. 사람은 그냥 하염없이 옛생각에 잠기기 보다, 어떠한 물건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또는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옛생각에 잠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물건은 단순히 기능을 지닌 상품이 아니라, 때로는 추억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그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내 삶에 있어 방향제와 난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내 인생의 저 너머를 보게 해주는 타임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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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15. 10. 9. 23:20

나는 어려서부터 결혼하면 아들을 낳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소망이 그분께 '심하게' 상달되었는지, 아들을 둘씩이나 낳았다. 사실, 연애할 때 우리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키우기로 했었다. 그래서 연애할 때 애들 이름까지 다 지어놓았었다. 아들은 건유, 딸은 유은. 장건유, 장유은. 그런데, 막상 낳고 보니 우리의 소원대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지 못하고, 아들 하나, 또 아들 하나, 그래서 아들 둘을 낳았다.

 

내가 아들을 낳고 싶었던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인 나를 너무 사랑해 주셔서, 나도 아들을 낳아 아버지처럼 아들을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돈독한 가정은 드물다.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억압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애증의 사이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내게 주어진 큰 축복인 것 같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 아이들을 보면, 대개 아버지와 사이가 소원한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아서 그랬는지, 사춘기를 건전하게 넘겼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 차 몰래 몰고 나가 친구들하고 드라이브 하고 다니다 경찰(전경)의 불심검문에 걸려 경찰서(파출소)에 한 번 끌려 갔던 거 빼놓고는, 사고친 적이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와 사우나를 함께 가는 것이 내 삶의 낙이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70% 정도는 아버지와 사우나를 갔다. 아버지와 사우나를 마친 뒤, 탕수육밥이나 갈비탕 한 그릇 먹고 들어오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탕수육이나 갈비탕을 먹을 때면 그때의 추억에 잠기곤 한다.

 

얼마 전, 큰 아들이 학교에서 가족 그림을 그려왔다. 여덟 살 먹은 큰 아들의 동심이 그려낸 가족 그림은 나의 미소를 자아냈다. 아들의 마음 속에 아버지가 어떠한 존재인지 그대로 드러나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들과 매일 재미 있게 놀아주는 아버지, 자기들에게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언제나 인자하게 대해 주는 아버지,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함께 해주는 아버지, 자기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주는 아버지, 하루에도 몇 번씩 뽀뽀해주는 아버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하는 우리 아들, 이쁜 우리 아들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아버지, 매일 같이 품에 끌어 안고 기도해 주는 아버지, 잘못했을 때 호되게 혼 내지만 이내 가슴에 끌어 안고 위로해 주는 아버지,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수퍼맨처럼 해결해 주는 아버지, 무엇보다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아버지 아들인게 너무 고마워라며 미소를 건네는 아버지.

 

아들은 바로 그 미소를 아버지의 가슴에 그려 넣었다.

 

나는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집사람에게 늘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이렇게 천년만년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뿔뿔이 헤어질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 이순간을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해 향유하는 것뿐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는다는 것은 복된 인생이다. 우리 아버지의 인생이 복된 이유는 아버지가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소망은 내가 아들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는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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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7. 02:34

후배의 죽음

 

아끼던 대학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뇌종양 때문에 고생하다 갔다. 뇌종양이 발병한 뒤, 그는 행동하는 것과 말하는 것에 큰 제약을 받았다. 마음 먹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마음 먹은 대로 말하지 못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재활훈련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듯 했지만, 결국 병이 악화되어 생사를 달리하고 말았다.

 

지난 봄에 있었던 연회(Annual Conference) 참석 차 LA에 갔다가 거기서 멀지 않은 Irvine에 살고 있던 후배를 병문안 갔었다. 나는 단순한 병문안이 아닌, 함께 예배 드리고 성만찬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말씀도 열심히 준비해 갔고, 간이 성만찬 기구도 챙겨갔었다. 그리고 함께 정말 이보다 더 간절한 예배가 없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 드리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었다.

 

이 친구를 알고 있는 대학 동기, 선후배 중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친구와 함께 예배 드리며 성만찬을 나눈 사람은 나 밖에 없는 듯 하다. 생명에 큰 위협을 느끼거나, 생명이 저물어 가는 한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은, 언제나 큰 축복이다. 나는 목사로서, 이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예배를 집전하고,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그리고 함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떼고. 그 후,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도 나누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나에게는 그 친구의 간절한 소망인 생명을 소생케 하는 능력이 없었다. 생명의 소생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부끄러움과 절망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소생이 절실한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너무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 순간,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몸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넘어선 신적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참 인간인 예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내려 놓는 케노시스의 영성을 보여주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인간이 되고자 하는 신’. 결국 세상을 구원한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자 한 신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병마 앞에 결국 생명을 빼앗긴 후배를 보며, 그가 경험한 지극히 인간적인케노시스를 보며, 조금이라도 신이 되고자 했던 욕망은 모두 부끄러운 일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그가 간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가지 않게 될 길로 떠난 외로운 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게 될 길은 먼저 떠난 선구자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우리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우리도 곧 그처럼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저 인생의 바닥에서 체험하게 될 테니.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애써 멈추지는 말자. 눈물은 그가 우리의 가슴에 남긴 사랑의 흔적이니.

 

사랑하는 세정아, 이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그곳에서 편히 쉬렴. 거기서 우리의 평안도 빌어주렴. 우리 곧 다시 만나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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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3. 03:23

희락당(喜樂堂)과 사현(四賢)

 

나는 두 개의 호()를 쓴다. 희락당(喜樂堂)과 사현(四賢)이 그것이다.

 

희락당은 원래 우리 아버지의 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가 그 호를 이어 쓰겠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말씀 드리고 그 호를 내 것으로 삼았다.

 

희락당이라는 호는 외할아버지 오지섭 목사님께서 아버지에게 지어주신 호인데, 마태복음 59절의 말씀에서 왔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희락당의 뜻은 화평케 하는 자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이 호의 뜻대로 화평케 하는 분이셨다. 유머가 넘치셨고, 어딜 가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하셨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 아버지와 함께 신앙생활 하신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사랑의 목회자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사랑의 최대 수혜자는 나였다(물론 형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나는 늘 마음이 따뜻했다. 그 사랑 덕분에 인생의 어려운 시기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고, 그 사랑 덕분에 나도 아버지처럼 인자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도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 길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도 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목회에 대한 좋은 생각을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을 때 기꺼이 헌신할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호 희락당을 내 호로 삼은 이유는 나도 아버지처럼 사랑의 목회자가 되기 위함이다. 아버지가 가정을 화평케 하시고, 교회를 화평케 하시고, 아버지가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을 화평케 하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제 불혹과 지천명 사이의 인생 여정에 들어서니, 인간의 삶에 있어 화평(평화)’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욱더 깨닫는다. 인간의 삶의 조건 중 화평(평화)’만큼 중요한 게 없는 듯 하다. 화평치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화평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계(인간과 인간,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는 일만큼 힘들지만 보람찬 일도 없는 것 같다.

 

이런 깨달음과 함께 관계를 화평케 하려면 넉넉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만든 호가 사현이다. ‘()’는 동서남북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모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서남북 모든 면에서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 또는 소망이 담겨 있다.

 

()’은 원래 어질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한자어를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자는 신하를 뜻하는 ()’자와 구하다는 뜻을 가진 ()’, 그리고 재물을 뜻하는 ()’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는 임금이 신하(인재)를 구하는 데 재물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자를 몇 가지로 풀이해서 적용하고 싶다. 우선, ‘어질다는 것은 모든 것에서 넉넉하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인격이나 지식, 지혜 등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고 싶다. 또한 무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유형적인 것에서도 넉넉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물도 좀 넉넉하게 많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도 쓰려 한다. , 모든 것이 넉넉한 사람이란 인격, 지식, 지혜, 그리고 재물등 인간이 어질게 살아가고 화평케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현라는 호를 지었다.

 

인생을 살아보니, ‘화평케 하는 일이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평케 하려면 인격도 성숙되어 있어야 하고, 상당한 지식도 갖추어야 하며, 사람의 마음과 상황을 꿰뚫는 지혜도 필요하고, 또한 재물도 어느 정도 필요함을 느낀다.

 

나는 인생을 복되게 살고 싶다. 덕을 쌓는 인생을 살고 싶다. 내가 가진 두 개의 호는 그러한 소망이 담겨 있다. 화평케 하는 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하셔서 그 소임을 이룰 수 있도록 지키시고 도와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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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10. 1. 23:14

이것은 전쟁의 흔적일 수도 있고,

홍수를 대비한 토목 공사의 흔적일 수도 있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이것은 땅 속 나라에서 터뜨린 핵폭탄이 남긴

버섯구름일 수 있고,

비를 막기 위해 건설된

우산 모양의 가리개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가 볼 수 없는 저 땅 속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건은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진다.

저것을 먹어버릴 생각만 하는 자들에는

결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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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이야기2015. 9. 25. 22:35

어느날, 이웃집 고양이가 우리집 화단에 침입해 땅을 파댔다.

아이들은 땅 파고 있는 고양이를 창문으로 봤다.

며칠 뒤, 우리집 화단에 이렇게 예쁜 꽃이 피었다.

갑자기 핀 꽃을 보며 예쁘다며 어쩔줄 몰라 하는 아이들이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이 꽃 누가 심은거야?"

엄마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큰 아들 건유가 "나는 알아"라며

"이 꽃은 바로 지난번 땅 파던 고양이가 그때 심어놓은 거"라 한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 꽃은 이토록 동심처럼 예쁜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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