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2015. 12. 19. 05:10

부성애

 

많은 이들이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부성애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살면서 모성애에 대한 감동과 그리움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내가 부성애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일단 아버지의 부재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은 내게 있어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나면 그때부터는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도 팝콘처럼 내 마음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런 날을 생각하니, 그저 가슴만 시리다.

 

아이의 학년이 높아지니 아이의 숙제를 도울 일이 점점 많아진다. 며칠 전 큰 아이는 학교 프로젝트라며 큰 도화지에 ‘Three branches of government’(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나무 모양으로 그렸다. 그리고 각 부에 대한 설명을 그 아래에 달았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흐뭇해서, 나는 그것을 보며 아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들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학교에 제출했다.

 

그런데 며칠 뒤, 아들이 받아온 프로젝트에 대한 점수는 충격적이었다. 38. 83점이 아닌 38.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점수를 보며, 선생님의 노트를 읽어보았다. 이 프로젝트는 몇 주 전에 공지한 프로젝트이며, 또한 어떤 요소가 들어가야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문도 발송했으며, 심지어 아들은 하루 늦게 프로젝트를 제출했다는 노트였다. 그리고 어떤 요소가 빠져서 이런 점수를 받았는지, 거기에 하루 늦게 낸 것 때문에 점수가 더 깎인 것에 대한 안내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선 아들이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문을 엄마 또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났고, 선생님이 이 아이의 부모인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 지를 떠올리니 부끄러웠다. 선생님은 분명 아이가 부모님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문을 보여주었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프로젝트를 엉망으로 해 갔으니,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당장 선생님에게 노트를 썼다. 우리 아이가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문을 보여주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 처해진 거라고. 그리고 프로젝트를 다시 해가면 추가 점수를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노트를 아이의 선생님에게 보냈다.

 

아이의 선생님은 친절한 답장을 보내왔다. 다시 해 와도 되고, 다시 해 오면 점수를 주겠노라고. 그래서 나는 아이와 함께 문방구에 가서 큰 보드를 사와 프로젝트를 다시 했다.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아 컬러 프린터를 해서, 요구하는 요소에 따라 ‘Three branches of government’를 완성했다. 그리고 제출했다. 며칠 후, 아이는 다시 해 간 프로젝트로 100점을 받았노라며 좋아했다. 물론 그 점수가 고스란히 성적에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이미 해온 친구들과 똑 같은 점수는 줄 수 없다며, 원래 낙제한 프로젝트를 구제하는 수준에서 점수를 주겠다고 했다. 물론, 다시 해간 프로젝트 자체는 100점이라고 했다.

 

만약 내가 낙제점을 받아 온 아이를 혼내기만 하고 말았다면, 아이는 그냥 낙제점 받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아버지인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아들을 낙제에서 구제해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처를 했고, 결국 바람대로 아들의 낙제를 면하게 해주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우리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발벗고 나서 주셨다. 아들을 낳아서 키워보니,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싶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 무엇이든지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마음, 자식이 잘 되면 기쁜 마음, 바로 이런 마음으로 아버지는 나를 위해 사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프로젝트를 100점 받아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나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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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