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2. 9. 24. 03:41

결초보은(結草報恩): 풀을 맺어 은혜에 보답한다는 / 죽어서까지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춘추시대 진나라에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 그는 아들 위과를 보고 아비가 죽은 뒤에 아기를 낳아보지 못한 서모를 개가시켜 잘 살도록 하라고 항상 일러 왔습니다. 그러다가 무자가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다시 과에게 명령하길, “내가 죽거든 너의 서모도 나를 따라 같이 죽게 하여 합장을 시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후 무자가 죽게 되자 위과는 그의 아버지 무자가 병이 깊었을 때 분부한 명령은 제 정신에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무자가 생존 시에 누누이 분부하던 뜻을 따라 순장하지 않고 서모를 살려 주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게 했습니다. 그 뒤 진()나라와 ()나라가 싸움이 벌어져 위과가 전쟁에 나가 진()의 유명한 장수 두회와 싸워 위태로울 때 서모 아버지의 망혼(亡魂)이 나와 풀을 잡아 매어 두회가 탄 말이 걸려 넘어지게 하여 두회를 사로잡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날 밤 위과는 꿈 속의 싸움터에서 풀을 맺던 그 노인을 만났는데 자칭 개가한 서모의 아버지라 하면서 자기 딸을 죽여 합장시키지 않고 살려 시집 보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보답의 차원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피차 사랑의 빚 외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13:8).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만큼 하나님을 허무하게 만드는 일 또한 없을 겁니다.

 

우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무슨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는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구원은 필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구원하는 일이 본성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은혜에 보답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실로 생소한 반응인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할 때 보답의 차원에서 하는 것은 신앙의 한계를 미리 정해 놓는 처사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깊고 크셔서 우리가 헤아릴 수 없고 갚을 수도 없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릴 수 있게 됩니다. 다 갚았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쉽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보답의 차원에 머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을 건져낸수준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죄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원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구원 사건인 이유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때문입니다. 구원의 더 깊은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는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죽음이 구원의 징표라면 이 땅을 살다 죽은 모든 사람이 구원자로 칭송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아야 그의 죽음이 구원의 효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활의 관점에서 구원을 보지 않고, 죽음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의 개념보다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구원은 새로운 창조요 생명의 완성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에 들어섰기 때문에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결초보은의 신앙생활을 넘어, 존재의 변화(새로운 피조물, 생명의 완성) 차원으로 들어가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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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