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6. 1. 14:35

아침묵상 시편 39편 - 헤벨(헛됨)과 나그네

https://youtu.be/B4E9vhA10pE


오늘은 시편 39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기독교 교육론>에서 어거스틴은 우리가 해야 할 네 가지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요,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자기 자신 사랑, 셋째는 이웃 사랑,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물질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매우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네 가지 사랑 중에서 둘째인 자기 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에 대해서는 가르칠 것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은 너무도 잘 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너무나 맞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악함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으로 기우는 데 있는 것이죠. 가르치지 않아도 매우 잘 하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놓치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양,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보이는 양 생각하고 행동을 하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쉽게 하나님과 이웃을 무시하는 악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악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도 우리의 삶에서 매일 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편 39편은 구원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시인은 인생을 살아가다 맞닥뜨리게 된 좌절과 허무 앞에서 그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데요, 이 시에서 사용되는 핵심용어는 헤벨입니다. 헤벨은 전도서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말이죠. ‘헛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시인은 지금 인생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절에서 시인은 악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미 앞서 38편에서 시인은 그 태도를 말한 적이 있죠. 침묵. 악인에 대하여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겠다고 시인은 다짐하는데요, 그런데, 그렇다 보니까, 시인의 마음이 극심한 근심에 빠지고 맙니다. ‘선한 말까지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선한 말까지 못하게 된 상황을 참다 못해, 폭발하는데요, 그는 침묵하고 또 침묵하다, 극한 상황에 이르러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것은, 침묵의 극한 상황에 이르러 비로소 말 문을 연 시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악인에 대한 탄식이나 비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대신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과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악인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죠. 악인은 인생의 무상함도 모르고, 자신의 죄도 고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니까요.

 

시인은 자신의 덧없는 인생에 대하여 한 뼘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 구절을 한 번 읽어보죠.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헤벨)뿐이니이다”(5). 시인은 고백합니다. 인간의 인생은 한 뼘 길이 밖에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생이고, 살면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졌었다 하더라도, 그 인생이 모두 허사라고 합니다. 헤벨, 영어로는 a breath라고 하는데, 한 호흡 뿐이라는 뜻입니다. 한 호흡. 정말 허무하죠. 한 호흡 뿐이 안 되는 인생. 숨 한 번 쉬어 보세요. 이게 인생이랍니다. 허무하죠?

 

시인은 힘들 게 연 입을 통해 악인을 저주하거나 그들의 악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대신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는데요, 시인이 악인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악인들이나 자신이나, 이 세대에서 똑같이 헤벨’, , ‘한 호흡일 뿐이기 때문이죠. 한 호흡 뿐이 안 되는 인생이 악한 일을 벌이는 것도 정말 허무한 일이고, 한 호흡 뿐이 안 되는 인생이 자신과 동일한 호흡을 가진 악인을 비난하는 것도 허무한 일입니다.

 

시편 39편의 중심 구절은 7절인데요, 시인은 이렇게 헤벨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인생의 헤벨’, 인생이 한 호흡 밖에 안 된다는 것,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시인은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죠. 단순히 인생의 무상함 가운데 하나님을 소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무상함, 인생의 헤벨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무상함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인생의 허무, 인생의 무상함, 공허함 등을 들으며 살죠. 그러나, 그렇게 헤벨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시인처럼 이제 나의 소망이 주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진실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인생의 헤벨을 깨달은 사람은 시인이 12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의 나그네로 생각할 것입니다. , 진실로 인생의 헤벨을 깨달은 사람은 믿음의 선조인 족장들처럼 이 세상의 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 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자기 자신을 포지셔닝(positioning)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인생의 헤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입으로는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말하고 있으나, 그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달래기 위하여 여전히 이 땅의 것에 집착하겠죠. 그러한 사람은 아직도 이 땅의 것에 자신이 어떠한 권리가 있는 양 행동하는 것이기에, 자기 자신을 나그네라고 생각하지 않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하고, 여전히 인생의 허무와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땅의 것, 헛된 것에 소망을 둡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땅의 것에 엄청난 집착을 하며, 땅의 것에 엄청난 권리 주장을 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을 이 땅의 것에 아무런 권리도 없는 나그네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서든 권리를 주장하여, 주인 행세를 하려 들죠. 그렇기 때문에, 시편 39편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 말하고 있는 인생의 헤벨과 나그네 됨에 대하여 깊은 묵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의 깊은 헤벨, 허무, 공허함을 경험하더라도, 결국 더 땅의 것에 집착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말씀 앞에 겸손해져야겠죠.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니, 땅의 것을 붙잡으려는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리스도인이 되 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