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시편 41편 - 복 있는 사람의 현대적 의미
오늘은 시편 41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은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시편 41편은 1권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150편의 시편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서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듯이, 각 권도 묶음대로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죠. 시편 제1권의 서문인 1편과 2편은 ‘복 있는’, 그리고 ‘복이 있다’로 번역된 ‘아쉬레’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시편 41편도 시편 1편처럼 ‘아쉬레’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제1권의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죠. 한 마디로, 시편 제1권의 주제는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9편을 묵상하며 언급했듯이, 시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합니다.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을 강조하는 부류는 대개 자본주의를 강화시켜 거기서 이익을 취하려는 부류들이 대부분이죠. 가령 대중문화는 대개 ‘자기 사랑’을 강조합니다. 대표적으로 요즘 한류를 이끌고 있는 BTS가 있습니다. BTS가 청소년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Love yourself’입니다. 그런 점에서 BTS는 그냥 연예인이고 비즈니스 하는 친구들이지, 이 시대의 ‘선지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대중매체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을 부추깁니다. ‘이 상품을 소비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지죠. 이런 구조 속에서 ‘사랑’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사랑은 철저하게 물질화 됩니다. 사랑에 ‘물질/자본’이 매개화 되지 않으면,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지 못하거나 대물림 해주지 못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세습 자본’이 되는 겁니다. 세습이 곧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죠. 현대인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세습합니다. 사랑이 물질화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할 겨를이 없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시편 41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1절).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단순히 돈 없는 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가난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달’은 ‘약하다’, ‘무력하다’의 뜻을 지는 말로, ‘사회적 약자’를 가리킵니다. 가진 자와 대조되는 없는 자, 건강한 자와 대조되는 병약한 자, 강자와 대조되는 약자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 ‘가난한 자’를 ‘이웃’이라고 하죠.
지금 시대는 ‘가난한 자’와 ‘이웃’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사회적 약자’라기보다 ‘실패자’로 인식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어, 또는 능력이 부족하여, 또는 게을러, 이 사회에서 낙오된 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생각하죠.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 그저 ‘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와 이웃에 대하여 왜곡된 마음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정면 도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믿는 복음은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복음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난한 자’이고 ‘이웃’입니다. 우리는 약자이고,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사회적 약자, 내가 도움을 줘도 별로 나는 얻을 이익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내어놓고 나누는 것이 ‘이웃 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서, 복음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입니다.
가난하고, 정치가 혼란스러운 나라에서는 각 사람의 나눔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교회 공동체는 직접적인 나눔의 실천을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 정치체제가 안정된 나라, 복지국가에서는 각 사람이 ‘가난한 자’, ‘이웃’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세금을 잘 내는 것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투표 등 정치참여를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국가의 기능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선진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 복지를 촘촘히 잘 실행할 수 있도록, 첫째, 세금을 잘 내는 것이고, 둘째, 우리가 낸 세금이 사회의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잘 쓰고 있는지, 모니터링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정직하게 잘 내고, 정부가 주어진 역할을 잘 하도록 정치참여를 통해 써포드(support)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현대적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난 모든 귀한 생명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더 힘쓰는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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