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시편 32편 - 참회와 인간성
오늘은 시편 32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150개의 시편 중에는 7개의 참회시가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묵상할 시편 32편입니다. 시편에 있는 7개의 참회시 중에, 32편이 가장 중심이 되는 참회시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구조를 보면, 시인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참회는 개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참회의 권고로 이어집니다.
1절과 2절은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 대하여 용서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요, ‘복이 있다’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말이고, 중국의 학자 오경웅 같은 경우는 이것을 한자의 ‘락(樂)’을 써서, ‘즐겁구나’, 기쁘구나’로 번역합니다. 죄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죠.
시편 32편 참회시의 백미는 3절과 4절인데요, 참회하지 않고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 때 시인의 불행한 삶을 표현한 부분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 침묵 상태에 있었다는 것, 죄를 지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 바깥으로 죄에 대한 고백이 없었지만, 마음 속은 죄책감으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요, 참회가 없으므로 시인은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쇠약해져서,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았다는 것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참회에 대한 주제를 말할 때,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죠. 한 명은 윤동주이고, 다른 한 명은 어거스틴인데요, 두 명 모두 기독교인이죠. 윤동주의 참회는 그의 시 ‘참회록’에 담겨 있습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어거스틴의 참회는 그의 책 ‘참회록(Confession)’에 담겨 있죠. 기독교 신학에서 어거스틴이 쓴 ‘참회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기독교 교부들 중 어거스틴 외에 그 어느 누구도 개인의 삶을 털어놓으며 신학적 진술을 전개한 교부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참회록을 읽은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읽어 나가면서 ‘회심’의 경험을 했는데요, 그 중에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실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책인 것이죠.
우리가 참회를 하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존재의 부족함 때문에 참회를 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실존적인 죄를 지었을 때 하게 됩니다. 실존적인 죄도 두 가지로 나뉘죠. 하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도덕적인 죄를 지었을 때, 다른 하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윤동주의 참회록 같은 경우는 존재의 부족함에서 오는 참회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민족의 거대한 질곡의 역사 가운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존재의 부족함 때문에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죠. 신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유한성으로 인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고, 참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죠.
어거스틴의 경우는 실존적인 죄를 지은 것을 참회하는 경우인데요, 하지만, 살인 같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죄를 지은 경우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참회는 윤동주의 경우와 어거스틴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32편이 다윗의 참회라고 한다면, 경우가 좀 달라집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남에게 해를 끼친 죄를 지었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죽이는 죄까지 범했습니다.
이런 경우, 참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참회와 용서를 잘못 다루면, 피해자 중심이 아니라 가해자 중심의 편리한 죄 용서로 참회가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려를 잘 표현한 영화가 있었죠. 이창동 감독이 만들고, 전도연과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밀양>이 그것입니다. 전도연은 동네 체육관 원장에게 아들을 잃게 되는데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체육관 원장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교도소로 찾아가죠. 그런데, 거기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체육관 원장은 아이의 엄마인 전도연을 향해,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 받아서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피해자, 자식을 잃은 엄마 전도연은 실성합니다. 자신이 용서 안 했는데, 누가 함부로 그를 용서하냐고요! 그 존재가 아무리 하나님이어도, 자신보다 먼저 용서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하며 분노하죠.
실존적인 죄를 지었든지, 안 지었든지, 연약한 인간에게 ‘참회’는 숙명입니다. 참회의 기도는 평생에 걸쳐 가장 많이 드려야 할 기도인 것이죠. 시인이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에서처럼,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고 있으면, 인간은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내적으로 죽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지런히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참회는 가해자 중심이 아닌, 피해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회는 죄 지어 놓고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편리한 속죄의 방편이 아닙니다. 참회는 유한한 존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대면하고,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표현하며, 진실을 통해 평화를 만들고자 하는 거룩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인간성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를 올바로 사용하면 참된 인간이 되지만, 참회를 자기 중심적으로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오늘 하루, 아니 평생에 걸쳐, 윤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으며”, 진실하게 참회하며, 인간성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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