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9. 06:29

아침묵상 시편 30편 - 슬픔 뒤에는 기쁨이

https://youtu.be/B6OpY5Y9LNQ


오늘은 시편 30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30편은 찬양시로 분류되는 이 시편에는 한아름 커다란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시편을 성문서 또는 지혜서라고 하는데, 지혜서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시편이죠.

 

우선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요,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이게 모두 엮여 있습니다. 시인은 병들어 죽게 되었던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시인이 죽기를 바랐던 원수들이 기뻐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병을 고쳐 주시고, 죽음에서 살려 주시고, 원수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죠.

 

그러한 상황을 시인은 매우 대조되는 두 동사를 사용하여 보여주고 있는데요, 하나는 내려가다라는 동사이고, 다른 하나는 끌어올리다라는 동사입니다. 요즘은 수돗물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물 사용이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왠만한 집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씩 있었죠. 개인 집에는 없더라도 동네 중심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저도 어릴 적 살던 동네 중앙에 우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어린 호기심에 우물 속을 들여다보곤 했죠. 매우 깊었습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 보면 어릴 때 보았던 우물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질 지 모릅니다.

 

시인이 1절에서 쓰고 있는 나를 끌어 내사(딜리타니)’라고 하는 단어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쓰는 말입니다. 3절에서도 비슷한 단어가 쓰이는데요, 시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냈다고 고백하고 있죠. 모두, 어딘 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그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짐을 당하는 상황을 표현한 단어들입니다. 아마도, 어릴 적, 우물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이 말이 더 깊이 다가오실 겁니다. 바로 그런 상황을 묘사한 것이니까요.

 

한마디로, 시인은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것이죠. 그런데, 시인이 죽다 살아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2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물에 빠진 나를 동네에 살던 누군가 구해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는데, 누군가 살려줬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는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할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와 똑 같은 심정으로, 자신을 스올, 무덤과 같은 병에서, 죽음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전하고 있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구원을 실제로 경험하는, 이러한 영적 감수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영적 감수성이 없으니,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인데, 그것을 경험으로 경험하지 못하니, 저절로 나와야 할 감사와 찬양이 억지로 강요에 의해 겨우 나오는 것 아닐까요?

 

5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와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죠. 그런즉, 슬픔 뒤에 기쁨이 오도록 그 길을 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나, 슬픔 뒤에 기쁨이 오지 못하도록 그 길을 막는 자는 누구의 자녀라고 불러야 할까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그의 <팔복>에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를 여덟 번 쓰고, 그 끝에 "저희가 영원히 슬퍼할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슬픔 뒤에는 기쁨이 와야 하는데,

누군가 기쁨이 오는 그 길을 막고 있기에, 영원히 슬플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탄한 것이겠죠. 아직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이러한 비통한 현실이 반복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와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여기에 순복하여 영원한 슬픔을 영원한 기쁨으로 바꾸는 자는 하늘의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나, 슬픔을 영원한 슬픔으로 머물도록 방치하는 자는 하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10절에서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슬픔을 당한 후에, 기쁨이 반드시 오도록, 그래서 그 기쁨 덕분에 앞서 겪었던 슬픔이 기억조차 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반드시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11절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인이 6절과 7절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어리석은 일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야겠는데요, 시인은 자신이 형통할 때, 자만심에 빠져 모든 것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생각하죠. 그러나, 시인은 10절에서 다음과 같은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면서, 4절에서, “주의 성도들을 불러모아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자고 권고합니다. “주의 성도들은 히브리어로 하씨다이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말하는 히브리어 헤쎄드에서 온 말이죠.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경건한 자, 언약 백성을 일컬어 하씨딤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헤쎄드에서 온 말입니다. 경건한 자, 하나님의 백성은 하씨딤”, ,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고,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충만히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이웃들과 충만하게 나눕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거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슬픔 뒤에 기쁨이 오도록 그 길을 내는 일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는 주님과 함께, 슬픔 뒤에 기쁨이 오도록, 그 길을 내는 헤쎄드의 백성, “하씨딤이 되어,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