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0. 11:37

아침묵상 시편 31편 - 그리하여도 나는

https://youtu.be/MrYzff_RZkc


오늘은 시편 31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거지를 가장하여 암행어사로 남원에 다시 돌아왔을 때, 변학도에게 술 한 잔 받으며 이러한 시 한 수를 읊죠.

 

金樽美酒(금준미주)는 千人血(천인혈)이요,

玉盤佳肴(옥반가효)는 萬性膏(만성고).

燭淚落時(촉루낙시)에 民淚落(민루락)이요,

歌聲高處(가성고처)에 怨聲高(원성고).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많은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았더라.

 

변학도의 눈에는 백성의 눈물이 안 들리고, 변학도의 귀에는 백성의 원망소리가 안 드렸지만, 이몽룡의 눈에는 백성의 눈물이 보였고, 이몽룡의 귀에는 백성의 원망소리가 들렸던 것이죠.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고, 누군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 눈물과 신음소리를 알아봐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시편 31편을 읽고 있노라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저마다 고통의 크기가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당한 고통의 크기를 서로 경쟁하고 자랑하듯 살아가면 안 되겠죠. 때로는 고통도 무기가 되죠. 본인의 고통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겪은 고통보다 작은 고통을 겪은 사람에 대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자랑하죠. 이러한 심리에 대해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매우 위험한 심리인 것을 지적하고 있죠. 아들러는 말합니다. “불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다.” 불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무기삼아 상대방을 지배하려 든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열풍을 몰고 왔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시편 31편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은 어디까지 고통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힘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겪고 있는 이러한 극심한 고통에 처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만약 이러한 극심한 고통에 처해지게 된다면, 그때 죽지 않고 살아갈 지혜를 얻게 된 것 같아서 또다른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인생을 반성하게 되기도 하는데요, 시인이 당하는 고통은 그가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데, ‘나는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시인은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고통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시인이 탄식하고 있는 고통은 겹겹입니다. 질병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고, 기력이 쇠하고 있고, 대적들의 중상모략과, 사회적 고립감,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배신감 등,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이 겹겹이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총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죠.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은 고립감 속에서, 아무도 자신의 눈물과 신음소리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때, 인간은 외로움 속에서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고통 때문에 죽지 않고, 외로움 때문에 죽죠. 그런데, 그러한 극심한 고통과 극심한 외로움 속에 있을 때, 누군가 나의 눈물과 신음소리를 알아봐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 자체가 희망이 됩니다. 그 희망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구요.

 

보물과 같은 시, 시편 31편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 세 번이나 인용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순교 당하면서 스데반에 의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복음 전하는 베드로에 의해,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우리의 고통과 시인의 고통의 간격이 커서, 시편 31편을 읽으며 우리는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당하고 있는 극심한 고통에 다가서면 설수록, 시인의 탄식이 남의 탄식이 아니라 자신의 탄식으로 체화되고, 시인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처럼, 시인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을 주의 손에 맡겼기에,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그리고 힘을 내어 일어나, 23절과 24절에서, 주를 의지하고자 하는 성도들(하시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고통/불행은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불행을 통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하는 마음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대신,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고통과 불행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경건이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요, 길을 잃은 자들에게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불행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입니다. “그리하여도 나는”,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베드로처럼, 나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