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8

아침묵상 시편 13편 - 고통의 문제

https://youtu.be/4HmG2y0gzzA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 여호와 내 하나님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데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 두렵건데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편 13).

 

마음 아프면서도, 참 아름다운 기도 시입니다. ‘고통의 문제’, 풀리지 않는 인생의 신비인데요, 성경은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를 가장 깊게 파헤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시인은 1절과 2절에서 언제까지(how long)’의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면서, 고통의 시간이 끝나지 않는 현실에 대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에서는 고통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고 있는데요, 무엇보다 시인이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 자체 때문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죠. 인간은 어떠한 고통스러운 일(힘든 일) 때문에 죽지 않고요, 고통 가운데 있는 나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때문에 죽습니다. , 본문에서 시인이 너무 고통스러운 이유는 원수들이 괴롭혀서가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기도가 아름다운 이유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깊은 절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끝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인데요, 시인이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헤세드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난 시편 6편을 묵상할 때 자세하게 말씀드렸던 하나님의 사랑이죠. 기억하시죠?)

 

성경 전반이 그렇습니다만, 특별히 욥기와 시편 등, 성경 외에 고통의 문제를 다룬 책 중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C. S. Lewis<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라는 책입니다.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 논증을 하는 책이라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닌데요, 열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제 7장은 고통의 구속적 효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통의 구속적 효과라는 말은 고통 안에는 ‘redemption 구원의 요소가 있다는 뜻입니다. C. S. Lewis가 조금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데요, 이렇습니다. “만일 고난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전히 구속하였다고 여기시거나, 혹은 구속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실 때까지 고난이 결코 중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167). 조금 무섭죠?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 살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네요.

 

C. S. 루이스는 이런 말도 합니다. “모든 해악들 중에서 오직 고통만이 남에게 줄 수도 없고 옮길 수도 없는 해악에 속한다”(170). 고통은 오롯이 자기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뜻으로 들리네요. 참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본인이 혼자서 모두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인생에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통 가운데서 죽어버리고 말까요? 여기에 대하여 시인은 매우 중요한 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죠. 고통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수 있지만, 시인이 고백하고 있듯이, 실질적으로는 그 고통 가운데 헤세드, 언약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고통 당하고 있는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믿음, 이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보면, 어차피 그 사람의 고통을 내가 나누어 가질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이 혼자라고 느끼지 않도록, 그 사람을 계속 돌봐 주는 겁니다. 기억하세요. 사람은 고통으로 죽지 않고, 고통 속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그 외로움 때문에 죽습니다.

 

갑자기, 김연자의 대중가요, ‘십분내로라는 노래가 떠오르네요. 거기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죠. “여자는 꽃이랍니다. 혼자 두지 마세요!” 그러면서, 내가 부르면 십분 내로 달려오라고 사랑을 속삭입니다. , 마음 짠하면서도 아름답죠?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보다, 지금 바로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두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울수록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고맙다고 말해보세요.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외롭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죽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을 이겨내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힘 내세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7

아침묵상 시편 12편 -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 되기

https://youtu.be/SxmovfEZwjc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시편 12).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말하는 것에 비유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셨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게 인지상정인데, 세상은 이와 반대로 돌아갈 때가 많죠. 기뻐하는 자들 한테 꼴보기 싫다 그러고, 우는 자들한테 손가락질을 하죠.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귀신 들려다 그러고,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게,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시인은 이런 현실을 탄식하고 있는데요, ‘악인의 아첨과 거짓이 만연하고, 의인이 끊어지고,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가 가련하고 궁핍한 자로 전락하는바로 그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자(하씨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를 뜻하고요, ‘충실한 자(에무님)’은 진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렇게, 경건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은 가련하고 궁핍한 자로 전락하고, 오히려, 아첨하고 두 마음으로 말하는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현실을 보면서, 시인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아첨하는 자들’,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 자들이고요, ‘두 마음으로 말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키죠.

이런 말을 하면, 우리는 아주 손쉽게, 혀를 쯧쯧 차면서, 우리 자신은 아첨하는 자두 마음으로 말하는 자가 아닌 양,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기 쉽고, 우리는 마치 경건하고 충실한 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누구보다, 바로 나 자신에게 먼저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나마 이렇게 먹고 살 만하게 된 게, 이 세상의 번영 원리에 편승해, ‘아첨했거나 두 마음으로 말해서그런 건 아닌지, 우리는 정말로 경건한 자충실한 자가 되어서, ‘를 위해 핍박을 받은 적이 있는지, 한 번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싫어하면서 주변에서 경건한 자충실한 자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인이 의인으로 살기는 싫고, 다만, 주변에 있는 의인을 통해 대속받으려는 욕심을 갖죠. 이러한 마음을 놀부 심보라 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대속은 그러한 의미가 아닌데,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 자기를 대신해줄 존재를 찾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세상은 점점 더 대신사회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서비스의 발달은 나 대신해서누군가 그 일을 해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죠. 김혜수와 송강호가 주연했던 ‘YMCA 야구단영화에서 보면, 구한말, 선교사들이 테니스 치며 땀 뻘뻘 흘리는 것 보고, 양반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하죠. “저렇게 땀 흘리는 거, 아랫것들 시키지 왜 본인이 직접하나. 허허이렇게 대신 누군가 해주기를 바라는 사회에서는 어디까지 대신하는 일이 발생할까요? 결국, 사는 것, 죽는 것도, 나 대신 누군가 해주길 바라는 세상이 오게 될까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아무튼,

 

여러분, 누군가 자기를 대신하여’, ‘경건한 자충실한 자가 되어주길 바라지 말고, 우리 스스로 주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가련하고 궁핍한 자로 전락하더라도, ‘경건한 자충실한 자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시인이 고백하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더 크게 우리의 귀에 들려 올 것입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거짓과 속임수를 내려놓고, 순결한 주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6

아침묵상 시편 11편 - 우리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

https://youtu.be/Ekon6-Q4GiE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며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는도다 /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편 11).

 

지금은 저희가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지역에 살고 있는데요, 여기에 오기전 저희는 오랫동안 조지아 시골에 살았습니다. 조지아 시골에는 버거킹하고 맥도널드의 시설이 매우 잘 되어 있어요. 시설도 깨끗하고,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게 잘 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어렸던 그 시절, 버거킹, 또는 맥도널드에 자주 갔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맥도널드에 갔는데요, 실내 놀이터에 아이들을 풀어놓고, 저는 한 켠에 앉아서 맥도널드 음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눈을 들어서 아이들이 잘 놀고 있나 살펴보니, 큰 아이는 잘 놀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눈에 안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큰 아이한테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들려온 대답은 몰라였습니다.

 

갑자기 긴장이 되면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터널식 미로를 아래층부터 윗층까지 모두 빠른 속도로 기어서 둘러보았습니다. 어른이 들어가기에 좁은 공간이었는데, 그런 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미로를 둘러보았죠. 아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맥도널드 바깥과 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없었습니다. 절망이 다가왔습니다. 나의 사색된 얼굴을 어느 아주머니가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여자 화장실 혹시 보았어요? Did you see the inside of the woman’s restroom?” 다른 곳을 다 살펴보았는데, 거기만 살펴보지 못했었죠. 사내 아이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을 거라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화장실의 문을 여는 순간, 그곳에서 작은 아이, 찬유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화장실이 너무 급해, 여자 화장실인지, 남자 화장실 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가까운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던 겁니다. 그때 찬유의 나이가 4살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럴 만도 하죠.

 

그때 제 마음이,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짧은 순간에 십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사건을 겪은 이후, 저는 어디를 가든 아이들이 놀 때 책을 보거나 딴짓을 않고 아이들만 지켜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죠.

 

오늘 말씀이 제 삶의 이런 에피소드를 생각나게 하네요. 시인은 여호와께 피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시인더러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합니다. “네 산은 객관적으로 안전해 보이는 곳, 안전을 보장해 줄 것 같은 곳을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인이 하는 짓을 보면, ‘마음이 바른 자’, 즉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고 의롭게 살아가는 의인을 못살게 구는데, 의인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데, 은밀하게 어두운 데서 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은밀하게, 알아채지 못하게 화살을 쏘는데, 그 악인의 화살에 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 법과 윤리가 흔들려 개인과 공동체가 무너지고, 악이 선을 이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의인으로 살아가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정말 중요한 고백인데요, 하나님은 의인의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에게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신다는 고백입니다. 아이들에게 눈을 떼고 딴 일을 하고 있었던 못난 저와는 완전히 다르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피하려고 하는데,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데, 다른 데를 보고 계시고 다른 일을 하고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를 돌봐주시는 분이시니, 실수하지 않으시고, 주님께 피하는 우리를 그 품에 안아 주실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죠? 그러니, 악인의 꾀를 따르거나, 악의 화살에 맞아 슬퍼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맡겨주신 자녀에게 눈을 떼지 말고 잘 살피고, 가정, 교회 등, 우리가 보살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보살피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4

아침묵상 시편 10편 - 숨어계신 하나님

https://youtu.be/CQZcBo0d2SI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편 10).

 

시편 10편은 전편인 9편과 함께 읽어야 하는 시편입니다. 9편과 10편을 일컬어, ‘알파벳 시편이라고 하는데요, 히브리어 알파벳 스물 두개를 문장의 처음에 배치하여 만든 시편입니다. 9편은 알레프부터 카프까지, 10편은 라멧에서 타우까지 쓰이고 있죠. 참 재밌죠?

 

숨어계신 하나님!’ 시인이 고백하는 하나님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대표적인 곳이 이사야 4515절이죠.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통해 세상을 뒤흔들었던 인물이 있죠.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루터의 신학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부르는데요, 루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루터의 숨어계신 하나님, 십자가 신학을 더 밀고 나간 책이 위르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인데요,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죠.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는 고난과 고통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마치 시인이 악인의 악행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악을 고발하는 자리이죠. 시인은 재판정에 들어선 것처럼,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악인의 악행을 낱낱이 고하고 있는데요, 악인의 악행이 귀를 열고 들어줄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악인은 자기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죠. ,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죠.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기의 악행을 절대로 벌하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7절에 있는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라는 말은 마음이 아플 지경입니다. 사탕을 혀 밑에 넣고 즐기듯이, 악인은 다른 사람의 불행, 재난, 고통, 죄악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악인이 이렇게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정말로 아무런 관심도 없으신 것일까요?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바로 흥미롭게도,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어계셔서,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고난과 고통을 거머쥐시고, 그 모든 악을 벌하시고 폐기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처럼, 숨어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악이 판을 치는 바로 그곳에서 악인의 팔을 꺾고, 악인을 심판하고계시는 것이죠. 그렇게 숨어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니는 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입니다.

 

마침, 이 방송이 나가는 날이 성금요일이네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숨어계신 하나님을 묵상해 보기 참 좋은 날입니다. 루터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발견했듯이, 우리도 십자가를 묵상하며, 악한 세상이지만, 그 안에 숨어계시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악을 심판하고 계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굳게 붙들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3

아침묵상 시편 9편 - 하나님을 아는 지식

https://youtu.be/_ywl1eogP0c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의 때의 요새이시라 /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 피 흘림을 심문하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99~10, 12~14, 18).

 

오래전,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은 적 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사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 제목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 이 말은 제임스 패커의 책 제목이라기 보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외침입니다. 대표적으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외치며 탄식했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물론,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게 왜 중요할까요?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리니” ‘알다라는 단어는 꽤 유명한 단어죠.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합니다. 감각 기관을 통해서 얻는 지식과 함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굉장히 감각적인단어인데요, 부부나 연인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 안에는 인간성이라는 따스함이 베어 있지만, 인간 안에는 죄성이라는 불편함도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죠. 인간의 따스함은 누구가 좋아하고 받을 수 있지만, 인간의 죄성에는 사랑 없이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죠. 그래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 알아가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 없이 접근하면, 서로에게 큰 상처만 주고 관계가 끝장나기 십상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에게 다가서는 일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성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알게 되는 것인데, 거룩이란 완전함을 일컫는 말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에게 다가서려면, 사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냥 다가서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순간, 거룩하지 못한 인간은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에게 알린 바 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존재의 유한성으로 인해, ‘환란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다 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압제를 당하게 되고, 피 흘리게 되며, 몸과 마음이 궁핍하게 되고, 사망의 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러한 환란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힘써 알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피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요즘, 지구별의 모든 사람들이 바이러스 때문에 유형의, 무형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인은 사순절, 그리고 고난주간, 곧 있으면 부활절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이 시간, 우리는 잠잠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환란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힘써 알라! 나를 힘써 알라!”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주를 찾는 자,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우리,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힘써 알기로 해요. 그리고 주를 의지하기로 해요.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기억하시고 환란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2

아침묵상 시편 8편 - 우리는 인간입니다

https://youtu.be/83zHcCZNhuI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 81~5, 9).

 

시편 8편을 묵상하면서 하재연의 시 해변의 아인슈타인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무지한 언어를 가지고

낯설고 어두운 입술로

나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ㅡ 하재연의 시해변의 아인슈타인부분, 시집 <우주적 안녕>에 수록

 

성경을 비롯해서, 초대 교부들이 쓴 고문서들을 읽다 보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들의 고군분투가 느껴져 마음이 짠합니다. 지금 시각에서 그들의 삶의 자리를 들여다 보면 그들의 언어는무지한 언어일 때가 많습니다. 아직 생각이 다 발전하지 않았고,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현재의 지금보다 더 명확하지 않죠. 가령, 초대 교부문서들에서 발견되는 기독론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론에 비하면무지한 언어의 진술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무지한 언어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이성의 힘을 발휘하여진리를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그들의낯설고 어두운 입술에는 갈망과 용기와 희망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묻어납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잃고 삽니다(잊고, 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어쩌다’ ‘우리가 누구인지발견하죠. 어쩌다 발견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시편 8편의 시인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자는 연약한 인생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가장 깊은 찬양은 무엇일까요? 저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시인은 자기 자신을 사람또는 인자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에노쉬이고, 인자는 -아담인데요, 이것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대조되는 존재의 고백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또는 유한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인간은 아다마’()’에서 왔기 때문에 아다마()’로 돌아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아담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충분히 인간(fully human)’이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가 충분히 인간이되면, 우리가 누구인지 철저하게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주의 깊게, 지속적으로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도, 성경을 쓴 선지자들도, 그리고 초대교부들도 결국 하나님에 대한 상상과 발견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은충분한 인간되기였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해변의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는 해변에 서서 우주를 바라보며인간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의 시작은, 비록무지한 언어를 가지고 낯설고 어두운 입술로꺼내는 부끄러운 고백이라 할지라도,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1

아침묵상 시편 7편 - 피난처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

https://youtu.be/KkRQnjFWgHo


여호와여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살피소서 /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 바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편 7:8~10, 14~17).

 

얼마전 천문: 하늘에 묻다라는 영화를 보았는데요. 이 영화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우정과 업적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함께 측우기, 천문대를 발명했고,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발명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발명들의 혜택을 누리면서, 별 감흥이 없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영화에서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측우기와 천문대, 그리고 한글을 발명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반대와 시련을 겪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은혜는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밥 한 톨을 먹더라도, 감사의 마음으로 먹어야 하는 것이겠죠.

 

하나님은 악의 문제를 다루실 때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신다”. 어디서 본 문장인데요. 마음에 남는 문장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다윗 왕을 생각할 때, 그는 위대한 왕이고, 하나님의 복을 자손대대 누린 복 있는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가 누린 복과 영화는 손쉽게 그에게 온 것이 아니죠. 그에게는 수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시편 7편의 표제(시의 제목)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입니다. ‘구시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다윗 왕의 살아 생전, 다윗 왕을 몹시 괴롭힌 사람 같습니다. 다윗 왕(시인)은 무고한 자신을 고소하고 괴롭힌 자의 말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탄식하며 구원을 간구합니다.

 

여러분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한 일을 경험했을 때, 어떠한 행동을 하시나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많은 악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 그 악에서 구원을 받게 될지, 시편은 우리에게 깊은 지혜를 줍니다. 그 지혜는 바로, 기도인데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시편은 하나님은 악의 문제를 다루실 때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죠. “주님, 저는 저 사람에게 공격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절대적인 의나, 완전함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억울한 심정을 하나님께 여과없이 아뢰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시인은 어려움 중에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간구합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죠. 지인이나, 가족, 단체, 회사, 인맥, 또는 물질, 이런 것에 의지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지혜를 꼭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피난처 삼아 하나님께 의로운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악인을 멸해주실 것입니다.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서에서 하만이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멸절 시키려던 자기의 꾀에 스스로 멸망했듯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악인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멸망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만을 피난처 삼고, 하나님께 의로운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0

아침묵상 시편 6편 - 고통 탈출법

https://youtu.be/82CHxbbqxMk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편 6:1~2, 4, 6, 9).

 

살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리는 문득 하나님께 징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리고, 마음은 한없이 위축되고 작아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시편 6편의 시인도 동일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시편에는 탄식시가 많은데요. 탄식한다는 것은 고통으로 신음한다는 뜻이고,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편에 탄식시가 많은 이유는, 그만큼 산다는 것은 탄식할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시편 6편에 묘사되고 있는 시인의 탄식은 어마무시합니다. 시인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뼈가 떨린다고 표현하고 있죠. 성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신체를 통해 감정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는 힘의 원천이고, 온몸을 연결하는 부분으로서, ‘자기 자신’, ‘감정의 자리’, ‘건강’, ‘고통과 슬픔의 자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뼈가 떨린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지금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으며, 삶 전체가 사시나무 떨 듯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고통은 어떠한 고통일까, 상상하기 쉬운 고통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가 시인에게서 배워야 할, ‘고통 탈출법이 있습니다. 4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슈바 아도나이!)” 시인은 현재 자신이 고통 속에 있는 이유를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돌아와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하나님께 돌아오시기를 간청할 때, 그 근거를 헤세드, ‘언약적 사랑에 두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질 때, 성경에서 말하는 헤세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적 사랑이기에, 이 헤세드는 무한하죠.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당신의 때문이죠.

 

그리스도인은 다음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언약을 맺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떠나버리셔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과 느낌이 들 때, 헤세드의 사랑에 호소하며,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간청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조금 건방져 보일수도 있겠는데요, 하나님은 헤세드에 호소하는 간청에 꼼짝 못하십니다. 그러니, 시인처럼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시인처럼 헤세드에 호소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고통 탈출법인 것이죠.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 한 번, 헤세드에 호소해서 기도해 보세요. 시인이 8절 이하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셨다는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입술에서, 반드시, 흘러나올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9:20

아침묵상 시편 5편 - 나의 왕, 나의 하나님

https://youtu.be/J6sY2ZwC0CQ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나이다 /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편 5:1~3, 11~12).

 

레위기 공부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시대(성전시대)의 고대 이스라엘은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에 발맞추어 시편에서도 보면, 아침에 드리는 기도가 있고, 저녁에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시편 4편이 저녁에 드리는 기도라면, 3편과 오늘 살펴보는 시편 5편이 아침에 드리는 기도이지요.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서 좋은 잠을 주무시고 싶으신 분들은 시편 4편의 말씀으로 기도하시면 좋구요,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실 때는 시편 3편과 5편이 좋겠죠.

 

시편 5편의 1절 말씀은 참 절절합니다. 시인이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주님,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내 심정을 좀 헤아려 주세요!” Give ear to my words, O Lord, Consider my groaning!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내 심정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별로 없죠. 부부 간에도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잖아요.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지,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거나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부부 간에도 서로 서운해 하는 게, 우리네 연약한 인생입니다.

 

내 심정을 좀 헤아려 주세요!’ 시인의 기도를 읊조리면 읊조릴수록, 마음이 짠합니다.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데요, 그 중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누구로 고백하는지, 어떻게 의지하는지를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시인은 지금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나요?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히브리어로, 나의 왕은 말키라고 하고, 나의 하나님은 벨로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헌신과 확신을 담은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칭은 역사적인 구원 사건이나 주님과 맺은 언약을 전제한 상황을 나타내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참된 재판장이리사는 것을 고백하는 호칭입니다. 그러니까, ‘말키, 벨로하이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제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동일한 구원을 간구하는, 신뢰와 확신의 기도인 것이죠.

 

시인은 아침에 기도합니다. 아침은 히브리어로 보케르라고 하는데, ‘동트는 새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새벽에 기도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새벽에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과 연결시켰죠.

 

요즘에는 그러한 새벽에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라는 메타포들이 많이 흐릿해지고, 아침은 기도하는 시간,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출근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만연해져서, ‘아침의 의미가 성경시대만큼 영적이지못한 게 사실입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이 통 트는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하루에 단 5분이라도 따로 떼어,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말키, 벨로하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구원을 간구하는 불쌍한 인생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호위해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마음이 답답하거든, 말키, 벨로하이를 부르며, 여러분의 답답한 심정을 주님께 아뢰어 보세요.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7:21

아침묵상 시편 4편 - 평안히 누워 자기

https://youtu.be/AA18sQB0BEY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 내가 평안히 눞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편 4:6b~8).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평안히 누워서 자고 있는 바로 그 모습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면, 평안히 누워서 자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근심 걱정이 쌓이기 때문이죠.

 

시편 4편의 시인도 평안히 누워서 자는 게 어려웠습니다. 인생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압박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평탄치 못하게 하는 인간들이나 어떠한 일들에 대하여 욕을 실컷해주면 좋겠는데,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편안히 잠들 수 없는 그 순간,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자들의 처분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히려 권면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며 죄를 짓지 말라. 자리에 누워 조용히 생각하라”(4).

 

시인은 하나님께 주의 얼굴을 비추어 달라고간구합니다. 이것은 민수기 6장에서 배운 기도일 겁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6:25-26).

 

그렇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죠. 시인이 사모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굴(파님/임재/영광)을 보여주셨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완벽한지,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와우! 이런 기쁨이 우리의 마음에 있다면, 걱정 근심이 우리를 둘러 싼 들,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걱정은 나를 완전히 죽이지 못합니다. 골로새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기쁨(곡식과 새포도주가 풍성할 때)도 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나를 완전하게 죽이지 못하는 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 걱정 근심에 휩싸일 이유가 없죠. 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에너지와 시간 낭비하며 살 필요가 없는 것이죠.

 

기억하세요. 우리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 마음에 있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상태를 일컬어 성경은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평안히 누워서 주무세요. 사실, 시편 3편은 아침에 드리는 기도이고요,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4편은 저녁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시편 3편에서 아침에 이렇게 깰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을 한 것처럼, 시편 4편에서 시인은 내가 이렇게 평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이런 시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7:20

아침묵상 시편 3편 -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https://youtu.be/e9NU7Sf1IOA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빰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편 3:1-8).

 

벌써 4월이 왔습니다.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 중에 첫 문장은 매우 유명하죠. “April is the cruelest month”라는 말입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그렇지 않아도 봄비가 내렸고요, 그 봄비로 인해서, 나무들이 온갖 꽃들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봄이 왔는데요, 아마, 지금 그 누구도, 봄이 왔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며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봄은 자연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오는 것이구나!” 자연에 봄이 왔지만, 인간의 마음에 봄이 오지 않으니, 봄은 봄이 될 수 없는 것이죠.

 

시편 3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꽂힙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그렇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서 빨리 백신이 개발되어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이 백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라는 것이죠.

 

구원이 백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과학을 무시한 미신적 기도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과학을 무시하면 안 되지만, 과학을 맹신해서도 안 됩니다. 현대인들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우상숭배는 과학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과학을 존중하지 맹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과학을 존중하십시오. 과학의 성과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과학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과학이 마치 하나님인양 믿고 신뢰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구원은 과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지금 [아침마다 새로우니]를 청취하고 계신 분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하십이오. 오늘 말씀 5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젯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이렇게 오늘 아침 깨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7). 그리고, 지금 현재 인류의 가장 큰 원수요 악이 되어버린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시니컬한 미소를 날리며, 이렇게 말하십시오. “너는 이제 큰 일 났다. 하나님께서 네 뺨을 치시고, 네 이를 꺾으실 것이다!”

 

지금 우리가 기도한 것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신경질 내지 말고, 짜증내지 말고, 감사함으로 평안을 누리십시오. 주님께서 곧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7:19

아침묵상 시편 2편 - 자유란 무엇인가

https://youtu.be/5a17no6Z-KU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편 2:6-8).

 

시편 1편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복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고, 이곳 시편 2편에서는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를 따르는 자가 복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왕권, 통치를 잘못 이해합니다. 시편 2편에서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죠. 이방 나라들이나 민족들이 분노하는 이유, 세상의 군왕들이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가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아 간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보통 자유의 개념을 오해합니다. 어딘가에 예속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는 굉장히 법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입니다. 자유가 법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쉽지 않은 것이긴 한데요, 하지만, 자유라는 것은 지배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배의 상태에 들어오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노예를 생각해 보세요. 노예는 그 사회의 법적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법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죠. 그래서 그들에게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노예는 지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법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죠. 노예 해방이란, 그들이 비로소 그 사회의 법적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자들에게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자유란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법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2편에서 하나님이 비웃으시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법이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라고 외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법 안으로 들어와 그 법 안에서 살기 위하여,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바로 그러한 사람이 자유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누구에게,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법에 묶여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법에, 성령의 법에 묶여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는 내게 묶여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너는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야!”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시면서,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 “너는 내꺼야!”라는 이 말씀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묶여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늘 하루, 그 누구, 그 무엇에게도 자유를 빼앗기지 않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5. 07:18

아침묵상 시편 1편 - 복 있는 사람

https://youtu.be/dyzHdXanJzM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쉬레입니다. 아쉬레는 히브리어의 첫 자음 알레프로 시작합니다.

1장 마지막 말씀의 망하리로다는 토베드로, 히브리의 마지막 자음 타우로 시작합니다.

재밌는 구성이죠. 복 있는 사람은 멸망하게 될 악인과 멀리 하라는 메시지를, 언어유희를 통해서도 전해주고 있는 것이죠.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는 충고, 의논, 조언을 뜻하는데, 중요한 결정과 계획에 아주 유용한 도움을 뜻합니다. , 복 있는 사람은 중요한 결정과 계획이 있을 때, 악인들과 의논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란 수다쟁이, 비웃는 사람, 남을 깎아내리고 험담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오만한자의 자리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자리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입니까? 중요한 결정과 계획 앞에서, 누구와 의논을 하시고, 누구의 조언을 들으십니까?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앉아 계십니까?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리에 앉아 계십니까?

 

오늘 하루, 혹시, 중요한 결정과 계획을 한 것이 있으시다면, 누구와 의논하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시는 게 어떨런지요? 누군가 붙잡고 의논하고 조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고, 바쁘고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를 잠시 멈추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지혜를 간구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는 자가 복 있는 자이고, 그런 자는 이미 복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만사가 형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복 있는 자에게 지금 막 지어내신 창조로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