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3. 06:21

아침묵상 시편 26편 - 부족하지만 경건한 의인의 마음

https://youtu.be/yRzPahBD8Jo


오늘은 시편 26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6편은 성경에 담긴 150편의 시편 중, 그냥 평범한 아저씨 같은 시편입니다. 읽고 나도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 시편입니다. 탄원시로서,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시편은 아닙니다. 마음에 남는 멋진 구절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26편을 읽고 나니까, 윤동주의 서시가 떠올랐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다윗의 시라고 알려진 이 시편을 읽으며, 다윗의 마음과 윤동주의 마음이 오버랩 되는 것 같았는데요, 질곡이 많은 시절을 살았던 윤동주가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바랐던 것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도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바랐던, 그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죠.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는 살면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에 부끄러움 때문에 잠 못 이룰 때가 많습니다.

 

다윗의 삶도 그랬습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형들한테 미움을 받고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 자수성가한 요셉 정도가 있을까요? 다윗은 왕이었고, 주변 나라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벌인 터라, 주변에 원수가 널려 있었습니다. 외부의 적도 많았고, 내부의 적도 많았죠. 자식들 때문에 죽도록 고생도 하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아픔과 상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26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에게 이러한 요청을 합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양심을 단련하소서”(1).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부끄러움 천지인데, 하나님께, ‘나는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나를 시험해 보시고, 내 마음과 생각을 샅샅이 살펴보라고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기에,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요청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하는데요, 다윗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쎄드, 인자로 번역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입니다. 악인과 의인의 차이가 여기서 발생하는데요, 악인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믿는 사람이죠. 그래서 의인은 어느 순간에서도,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기대어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3-5).

 

시편 26편에서 시인은 세상의 두 무리를 상정하고 있는데요, 하나는 행악자의 무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는의인의 무리입니다. 시인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한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집회는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가 있는데요,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이것을 줄여, 흔히, “하늘엔 빛나는 별, 내 마음엔 도덕률이라고 말하죠. 칸트는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어떠한 도덕률이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자연법칙처럼, 박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도덕은 강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자유라고 보았죠. 그래서 그는 옳은 것이 좋은 것보다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옳은 것이 좋은 것보다 먼저다!” 참 멋진 말이죠.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넓게 봐서, ‘좋은 것옳은 것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니가 좋아하는 것을 해!’ 여기에는 이런 명제가 깔린 것이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그러한 현대인들의 생각에 제동을 거는 것이죠. 아니다! 좋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옳은 것이 먼저다.

 

어떠세요? 참 쉽지 않죠? 여러분들은 좋은 것을 행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옳은 것을 행하고 계신가요? 판단하기 쉽지 않죠?

 

하지만, 한 가지, 오늘 시편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 중에,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집회는 미워하고, ‘의인들의 집회는 사랑한다고 합니다. 악인들의 집회를 미워한다는 말은, 악인들의 가치관을 혐오한다는 뜻이고, 의인들의 집회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경건한 애정을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한 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우리는 옳은 것을 갈망하는지? 혹시, 악인들의 가치관에 마음이 미혹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마음의 양심을 가차 없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우리 안에 두 가지의 마음이 공존하면 좋겠습니다. 악인들의 가치관을 미워하는 마음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경건한 애정을 사모하는 마음! 그렇다면, 우리도, 윤동주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의 헤쎄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기대어 살아가는, 부족하지만 경건한, 의인의 마음이겠죠.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2. 05:58

아침묵상 시편 25편 - 멈추지 않고 우러러보기

https://youtu.be/50f66qt4ou0


오늘은 시편 25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5편은 알파벳 시인데요, 영어로는 아크로스틱(Acrostic) psalms라 하구요, 한자어로는 답관체 시라고 합니다. ‘밟을 답이고, ‘머리 관이죠. 그래서 답관체앞머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알파벳 첫 글자를 따라서 지은 시의 형식을 가리킵니다. Acrostic Psalms라는 말도 좀 어렵고, 답관체라는 말도 어렵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알파벳 시라고 하면 더 잘 이해가 갈 것 같네요.

 

히브리어 원어로 시편을 읽으면 참 좋겠지만, 원어로 읽는다고 그 깊은 뜻을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니겠죠. 어떤 언어로 읽든 차근차근 읽으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거기에 담긴 깊은 뜻을 잘 길어 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편 25편은 알파벳 시라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한데요, 그래야, 시인이 시의 구성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는 알파벳 시가 더러 등장하는데요, 그때마다 잘 기억해 두세요. 히브리어의 알파벳은 22개입니다. 그러면, 시편 25편은 몇 절로 되어 있을까요? 당연히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중간중간에, 나와야 할 글자를 빼고, 다른 글자를 넣기도 하는데요, 알파벳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여 시를 써 나가다가 중간에 글자를 빼고, 다른 글자를 집어넣는 것은 시인의 특별한 의도가 담긴 것이겠죠. 원어인 히브리어 외에 다른 말로 번역된 것에서는 그러한 의도를 전혀 눈치챌 수 없겠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요즘에 출간되는 주석서들은 히브리어 원전을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이라, 히브리어의 묘미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주석서들을 참고하며 시편을 읽어 내려가면, 시편에 담긴 풍성한 의미를 잘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시편 25편에서 시인은 1절에 알레프, 11절에 라메드, 그리고 22절에 를 의도적으로 자리하게 하여, ‘알라프라는 말을 구성해서, 이 시의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알라프배우다, ‘가르치다를 뜻하는데요, 시인은 시편 25편에서, 계속하여, 여호와께서 주의 도주의 길을 가르치고 교훈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의 도주의 길’, 사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 것이죠. ‘는 영어로 ‘way’라고 번역하고요, ‘‘path’라고 번역합니다. 주의 도와 주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알려 달라는 것이겠죠.

 

시인의 간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가르쳐 주신 주의 도’, ‘주의 길의 핵심은 사랑과 신실함입니다. 그냥 단순한 사랑과 신실함이 아니고, ‘언약적 사랑과 언약적 신실함를 말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은 이것에 근거해서 행동하시고, 우리 인간은 이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할 수 있는 것이죠.

 

언약적 사랑과 언약적 신실함은 신약성경에서 은혜와 진리로 번역이 됩니다. 이 용어가 쓰이고 있는 곳은 요한복음 114절인데요, 그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증거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언약적 신실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육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시편 25편을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죄의 고백과 구원의 간구가 모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신실함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죄의 고백과 구원의 간구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1절에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마음이 참 좋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이것은 기도하며 손을 하늘로 향해 뻗는 자세와도 관련된 표현인데요, 자신의 영혼,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것이죠. ‘우러러보다라는 동사가 히브리어에서는 미완료형으로 쓰입니다. 미완료형이라는 말은, 그 행위가 멈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된다는 뜻인데요,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뻗어 자신의 영혼,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행동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삶의 태도가 정말 중요한데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지라도, 심지어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에라도,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적 성품, 그 사랑과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13절에서 그의 영혼이 평안이 살고, 그의 자손이 땅을 상속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을 우러러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신실함에 기대어 구원을 간구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평안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루, 그런 인생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1. 11:01

아침묵상 시편 24편 - 언약갱신

https://youtu.be/nqvIrYUBIkM


오늘은 시편 24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4편을 읽어보신 분은 어렵지 않게 아시겠지만, 뭔가 축제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요, 학자들의 주석에 따르면, 시편 24편은 언약갱신예배때 사용된 시편이라고 합니다.

 

시편 24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첫째 단락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고백이 나오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던져지고 있죠.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영광 중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죠? 사람이 동물인 것에 방점에 찍힌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는 말에 방점이 찍힌 말인데요,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책 <폴리테이아, 정치학>에서 규정한 인간의 본성으로 유명하죠. 인간은 사회성을 떠나서 생존할 수 없는데요, 혼자서 살아가는 게 힘들 뿐더러, 인간이라는 개체수가 엄청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은 대개 언약적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관계(relationship)’이라고 하죠. ‘관계,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아주 독특한 현상입니다. 사실, 이것이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언약이 존재합니다. 상거래도 언약이고, 교통 법규도 언약이고, 직장생활도 언약이고, 결혼생활도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심지어 신앙생활도 언약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언약을 맺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아주 대단한 존재이지요.

 

모든 관계는 언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언약을 갱신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언약의 샬롬(완전한 평화)’ 깨지기 때문인데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때때로 언약을 갱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우리는 처음 기독교인이 될 때, 세례식을 합니다. 언약이죠.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세례식에 가졌던,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 흐릿해집니다. 그때 우리는 갱신이 필요합니다.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confirmation 예식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처음 기독교인의 세례식에 참여하여, 나의 첫 언약을 갱신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회복, 갱신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묻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도덕적인데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동이 바르다는 뜻이고,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바르다는 것인데, 헛된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말하죠. 이런 사람을 일컬어 성경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자, 구원론적으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의인 밖에 없다는 뜻이죠.

 

살다보면, 우리의 바르지 못한 행실이, 우리의 바르지 못한 마음이 처음 언약의 샬롬을 깨뜨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에 머물 수 있으려면, 우리는 계속하여 처음 언약의 샬롬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갱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죠.

 

기독교 신앙은 처음 언약의 샬롬을 갱신하는 중요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고자 합니다. 깨끗한 손, 청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기대어, 그를 믿음으로, ‘처음 언약의 샬롬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기대어, ‘처음 언약의 샬롬을 잃지 않는 것이겠죠. 그래서 우리에겐 예배가 참 중요합니다. 예배란 바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긍정해 주는 언약갱신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 연약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언약의 샬롬을 쉽게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갱신 의식(ritual)을 자주 갖는 게 좋습니다. 하루 단위로, 일주일 단위로, 일년 단위로 갱신 의식을 갖는 게 가장 보편적이죠. 하루를 마감하며, 하루동안 잃었던 샬롬을 회복하는 의식,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한 주간 잃었던 샬롬을 회복하는 의식, 한 해를 마감하며, 한 해 동안 잃었던 샬롬을 회복하는 의식, 이렇게 부지런히 처음 언약의 샬롬의 회복하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샬롬을 누리고 있다는, 큰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품고, 시편 24편을 한 번 들어 보세요.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1. 18:45

아침묵상 시편 23편 - 행복의 조건

https://youtu.be/OJDXuvWSncE


오늘은 시편 23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3편은 가장 대중적인 시편이죠. 적어도 시편 23편 만큼은 낭독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공동번역 버전으로 낭독해 보겠습니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꿈 꿉니다. 무엇이 행복일까요? 행복에 관한 논의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쳐 왔던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시중에 나온 도서 중, ‘행복론에 관한 책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따르거나 아니면 비판하는 책들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시편 23편을 비교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분석해 보면, 굉장히 재밌는 것이 발견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시되는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과 선(좋은/good)과 행복을 연결시키는데요, 조금 거칠게 말해서, 행복은 인간의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행복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포스트모던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입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른 데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렇다 보니까, 현대인들이 더 불행하기도 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 보니, 자기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손쉽게 넘겨주기도 하기 때문인데요, 무엇이 행복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보니,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의 행복을 모방하거나, 대중적이고 획일적인 행복의 기준을 자신의 행복의 기준으로 삼기도 하죠. 그래서 결국 현대인들을 보면, 행복의 기준이 오히려 하나 인것처럼 보이죠. 쾌락, 명예, !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 이러한 요소들은 정작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하고 있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죠.

시편 23편에서 드러나고 있는 행복은 사뭇 다릅니다. 행복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데요,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제시하고 있는 행복의 조건 첫번째는 1절에서 드러나고 있는데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히브리 사람들의 독특한 시간 개념이 반영된 문장입니다. 여기에 미완료형 동사가 쓰이고 있는데요, 한국어에는 없는 문법입니다. 미완료형 동사는 미래 시점이나 지속의 의미를 지니는 동사인데요, 그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 안에서 통합되는 겁니다. 시간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요, 우리가 시인의 영성을 가져 하나님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과거의 아픔도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는 것이고, 불안한 미래도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로 볼 수 있는 시인의 영성을 지닌다면, 그 자체가 행복일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제시하고 있는 행복의 조건 두 번째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서 드러나고 있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 기름, 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 중, hospitality라는 게 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요, 주인은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 예의였죠.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집주인(호스트)이시고, 우리는 손님이라는 삶의 태도가 필요한데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이 땅에 온 손님인 우리들은 집주인이신 하나님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 주신 잔칫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배부르게 먹으면 되는 것이죠.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영성인데요, 우리가 살면서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집주인인 것처럼 상을 차리려 하니, 그리고 내가 집주인인데 그것을 몰라주나, 하는 섭섭한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죠.

 

정리해 보면,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제시하고 있는 행복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시간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 우리가 사는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감사가 넘칠 것이고, 감사가 넘치는 삶은 행복한 삶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둘째, 우리는 집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것, 그래서 집주인이신 하나님이 차려 주시는 푸짐한 잔칫상을 감사함으로 배부르게 먹으면 된다는 것, 먹고 배 부르려고 우리가 스스로 상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힘 빼고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되겠죠. 그러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한 삶을 살고 싶으시죠? 그렇다면,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행복에 겨워 부르는 이 노래를 마음에 잘 새겨보세요. 시간을 좀 다르게 바라보시고,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힘 빼고 살아 보세요. 분명, 어느덧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와서 행복을 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30. 07:02

아침묵상 시편 22편 - 역사의 존재

https://youtu.be/qO9GrAvoX-E


오늘은 시편 22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시편 22편을 읽으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4개의 복음서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십자가 상의 7언이라고 하는 것 중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동일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그 절망, 그러한 감정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죠.

 

얼마전,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는 책을 조금 살펴보았는데요, 신앙은 현실에 뿌리는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좀 더 거창한 말로 표현하자면, 신앙은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함께 등장한 신학사상 중에 이신론(deism)’이라는 게 있는데요,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매우 긍정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처럼 이성을 사용하여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죠. 그렇다 보니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한 기색을 가진 신학사상이었죠. 계몽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이성을 통해 인간 스스로 역사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판명 나고 말았죠. 그 끝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뿐이었으니까요.

 

기독교를 역사의 종교로 부르는 이유는 역사의 발전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서 일하시며, 인간은 역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역사를 일구어 가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역사 속에 자리 매김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역사를 일구어 가시며, 우리를 부르셔서, 자신이 하시는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역사를 일구어 가신다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 소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특별한 임무를 수여 받은 Special Agent가 된 것과 같은 것이지요. 이것을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지루하거나 권태로울 겨를이 없는 것이죠.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다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시편 22편은 구체적인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한국 역사에 길이남을 장수, 이순신 장군이 생각납니다. 시편 22편에 드러나고 있는 다윗의 고뇌와 이순신 장군이 지은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에 드러나고 있는 고뇌는 같은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심리학의 발달 때문에 시편을 심리적으로 읽어내려는 경향이 많은데요, 그러나, 우리는 시편을 읽을 때 심리적으로 읽기보다, 역사적으로 먼저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지켜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죠. 그의 삶은 매일이 전쟁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왠지불안한 게 아니라, 실제 눈 앞에 보이는 적들 때문에 불안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목숨이 실제로 위태로운 사람이 겪는 그 실제적인 불안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시편 22편을 심리적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다윗에게 불안은 왠지 모를 불안이 아니라, 아주아주 현실적인 불안이었으니까요.

 

이순신 장군이 쓴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에서도 그 불안과 고뇌가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는 변방의 오랑캐를 감시하는 높은 망루를 말하고, ‘일성호가는 갈대 잎을 말아 만든 피리로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한 것이었죠. 지금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침입을 앞에 두고, 한산섬에 있는 높은 망루에 올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냥 걱정이 아니라, ‘시름에 차있습니다. 자신이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면, 온 나라와 백성이 왜적의 손에 어떠한 비참한 일을 당할지 뻔히 알기 때문이죠. 그때, 어디선가 처량한 피리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상상이 갑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사사시대와 같이 주변 나라들 때문에 가난과 핍박 속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살게 되었을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제강점기가 400년은 앞당겨졌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런 소망 없이, 죄의 지옥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 때로는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여,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도 다윗처럼 시편 22편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 속에서 일하시며,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 역사를 쉬지 않고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에 동참시키십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면, 주변이 평화로울 것이요, 주어진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실제적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역사를 이룬, 역사적인 인물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될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9. 11:04

아침묵상 시편 21편 - 서동요 지어 부르기

https://youtu.be/6ETNO3Tnet8


오늘은 시편 21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삼국유사에 <서동요>라는 노래가 전해져 옵니다. 서동은 남부여의 무왕의 아명, 즉 어릴 때 이름입니다. 어릴 때 가난하여 마(서여)를 캐고 다닌 것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하죠. 서동은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고, ‘는 노래를 뜻하는데요, ‘노래를 뜻하는 한 자가 두 개 있죠. ‘인데요, ‘는 악기의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뜻하고, ‘는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서동요는 서동이라는 사람에 대한 노래인데, 무반주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죠.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善化公主선화공주니믄

ᄂᆞᆷ 그ᅀᅳ지 얼어 두고

맛둥바ᄋᆞᆯ

바ᄆᆡ 몰 안고 가다

(양주동 역)

 

양주동 선생님의 번역으로 읽어보면 이런 뜻입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통정해 두고 / 맛둥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이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고자 하는 마음에, 이러한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며 다니게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요,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일은 미루어 두고, 들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서동요덕분에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게 됐고, 남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하죠. ,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시편 21편을 읽으면서, 불현듯 서동요가 생각나서 서동요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요, 시편 21편이 마치 다윗의 서동요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여, 다윗이 시편 21편을 지어 백성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치면, 왜 다윗은 그러한 일을 했을까요?

 

시편 21편은 크게 세 부분은 나눌 수 있는데요, 왕의 과거 행적을 노래하는 1절부터 6, 그리고 브릿지 역할을 하는 7, 왕의 미래 행적을 노래하는 8절부터 13절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이스라엘의 여느 왕과는 달리 수 많은 업적과 공을 쌓은 왕이죠. 사울 왕 시절, 다윗이 공을 세웠을 때, 백성들은 사울 왕을 보며, ‘천천세했다면, 다윗 왕을 보고서는 만만세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하여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질투심이 사울 왕을 병들게 하고 그 자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들죠.

 

다윗의 행적을 보면,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났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져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등에 업고, 나단 선지자를 찾아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삼하 7:2). 다윗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죠.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나단 선지자는 처음에 다윗의 제안을 좋게 여겼다, 밤새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다윗의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인지를 깨닫고, 다윗이 스스로 자신의 제안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다윗 네가 나의 집을 건축해 주는 것이 아니라, , 여호와가 너의 집을 건축해 주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을 들은 다윗은 자신의 교만한 생각을 꺾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마터면, 자신이 이룬 업적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인양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떨 뻔 했는데,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았던 것이지요.

 

이것은 그냥 제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다윗이 지은 시편이 바로 시편 21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백성들의 입에서 서동요처럼 울려 퍼지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는데요,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은 더 이상 자신이 쌓은 업적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물론 제 상상입니다.

 

근거 없는 상상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편 21편을 보면, 다윗이 그렇게 큰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고,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적 사랑(헤세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1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다윗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것은, 즉 다윗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의 힘과 주의 구원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7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고 싶었고, 다윗이 흔들리지 않고 계속하여 업적을 쌓을 수 있는 이유는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 즉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이 이런 노래를 지어 백성들이 부르게 했다면, 다윗은 교만해지려 해도, 교만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잠깐 교만으로 채워졌다가도, 백성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며,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서동이 서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여, 결국 흠모하는 선화공주와 결혼에 이르게 되고, 무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겠지요.

 

우리도 살면서, 때로는 이러한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아니면, 결심한 어떠한 일을 끝까지 잘 마치기 위하여, 짧은 노래를 지어, 가족들이나, 친구들, 또는 회사 동료들에게 부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것이 리마인드가 되어, 길을 잃지 않고, 서동처럼, 다윗처럼, 마음의 소원, 그 부르심을 끝까지 이룰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8. 05:40

아침묵상 시편 20편 - 간절함

https://youtu.be/yYnwAXABscI


오늘은 시편 20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0편을 읽어보면, 아마도 모든 분들이, ‘이 말씀을 붙들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특별히 4절의 말씀,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같은 구절을 보면, 밑줄을 쫙 긋고, 외우고 싶고, 이 말씀대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이 구절을 읽어도,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지만, 성경을 그렇게 읽는 것은 성경 말씀을 너무 사유화하는 것이고, 개인적인 용도로 남용하는 것이 되겠죠. 개인주의가 심화된 현대 사회에서 성경의 말씀을 사유화하고, 개인화 하는 방식의 성경읽기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조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시편 20편에는 크게 세 부류가 등장합니다. 두 부류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구요, 한 부류는 암묵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부류는, 백성, , 그리고 제사장입니다. 이 세 부류가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위에서 살펴본 4절 말씀만을 보면, 이 시편은 복 받아라! 네 범사가 잘 될 것이다!’, 뭐 이런 류의 축복의 선언 같이 보이는데요, 그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20편에 흐르는 기류는 국가비상사태선포입니다. 1절에서 환난 날에전쟁의 때를 의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을 앞두고 있고, 왕은 적군에 맞서 출정을 하려는 찰나입니다.

 

아직까지도 전쟁이 멈추지 않은 지역이 있습니다만, 한국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세대도 있고, 전쟁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도 있습니다. 사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으신 어르신들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으면 전쟁에 대해서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게 될 텐데요, 젊은 세대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전쟁을 접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가령, ‘진주만(Pearl Habour)’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그 영화의 메시지는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게 아니라, 영웅주의나 사랑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 진주만 폭격을 경험한 세대들은 전쟁을 낭만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러한 것이 예술의 역기능이죠. 그래서 플라톤 같은 경우는 <폴리테이아(국가)>에서 시인 추방론을 펼치기도 하는데요, 시인은 실재(reality)를 모방할 뿐, 실재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그렇죠. 전쟁을 모방할 뿐, 전쟁의 참상, 전쟁의 실재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거기에 흐르는 실재(reality)’를 최대한 상상하지 못하면, 말씀이 사유화되고, 개인화되기 쉽기 때문인데요, 지금 백성들은 왕의 출정을 앞에 놓아두고,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왕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는 겁니다.

 

백성들은 왜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왕의 승리를 기원할까요? 이것은 단순한 응원의 차원이 아닙니다. 왕이 전쟁에서 이기면 다행이고, 지면 어쩔 수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과 같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전쟁에서 이기면 평화를 누리지만, 왕이 전쟁에서 지면, 그 결과는 온 백성의 노예화, , 고통스러운 삶으로의 추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말씀은 결코 사유화 되거나, 개인화 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차라리 전쟁에서 죽는 것이 나은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공동체의 차원에서 읽고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 혼자만 안위를 누리면 된다는 생각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죠. 당장은 나에게 별 문제 없을 지 모르지만, 결국, 공동체가 무너지면, 어느 시점에서는 나 자신의 삶의 근거도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백성과 왕과 제사장, 세 부류는 구분되는 것 같지만,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성은 왕의 승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왕은 백성의 기원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제사장은 백성과 왕의 기원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응답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 셋 중의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국가의 운명은 끝장인 것이죠.

 

공동체의 운명이 왕에게 달렸다고 생각할 때, 자기 일처럼 간절하게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을 백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공동체의 운명이 왕에게 달렸다고 생각할 때, 자기 일처럼 승리를 기원하는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지 않을 제사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흐르는 간절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간절함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선포한 기독교 공동체의 운명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면 우리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패배하면 우리는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는 정해진 날에 모여 간절함을 가지고, 왕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그게 예배입니다. 예배를 집전하는 성직자를 통해서 성령께서는 공동체의 간절한 기원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응답되었다고 선포하며 마음에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예배당을 나서며,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죠.

우리가, 시편 20편에 흐르고 있는 간절함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운명이 왕에게 달렸듯이, 우리의 운명도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것을 절실히 안다면, 예배자로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마음 깊이 알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함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 간절함이 여러분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7. 09:01

아침묵상 시편 19편 -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https://youtu.be/s1Og_-0b9k4


오늘은 시편 19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19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1절부터 6절까지는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고요, 7절부터 마지막 14절까지는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고 있죠.

 

오늘은 신학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학문이죠. 영어로 ‘God-talk’라고 합니다.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죠.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감각으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까, 하나님이 존재하는 지, 존재하지 않는 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신학이라는 학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긍정합니다. 그러면, 신학의 과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요,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길고 지난한 논의이죠.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다음 진술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이 (Spirit)’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은 인간이 지닌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라는 뜻인데요, 그렇다 보니, 신학에서는 계시(revelation)”라는 용어가 하나님 존재 증명, 하나님 인식을 말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그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인식하려고 노력해도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는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이고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비로소 인식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편 19편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를 두 가지로 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은 자연(nature)’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과, 율법(성경)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즉 자연(nature)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해 두셨다고 말하는 신학의 분야를 일컬어 자연신학(natural theology)’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또는 성경에 증언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라는 소위 정통신학과 경쟁하는 신학의 개념입니다.

 

느슨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 진영 내에서도 보수신학은 성경만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주장하고요, ‘진보신학은 성경 외에도 자연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일상적인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요, 성경만을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주장하고 믿는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과학적 발견, 특별히 진화론 같은 것을 극명하게 거부하는 신앙의 형태를 보이고요, ‘자연신학을 받아들이는 기독교 진보 진영에서는 과학의 발견을 적극 수용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구성하고 있죠.

 

어떠한 신앙의 형태가 옳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여러 논쟁이 있고, 타협하기 어려운 신학적인 포인트들이 있는데요, 그러한 복잡한 신학 논쟁들은 잠시 내려 놓고, 오늘 시편 19편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우리의 마음이 신학적 논쟁으로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에서 4절을 눈 여겨 보시면, 시인이 아주 신비로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연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자연신학을 말하는 것이죠?), 그 방식이 매우 신비롭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겠죠. 그런데, 한국어로 말하고로 번역된 말은 야비아라는 히브리어인데요, 물이 쏟아져 나오는 형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쉬지 않고 솟아 나오는 샘물처럼 지속적으로 풍성하게 흘러 내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당연히 자연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할텐데요,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할까요? 바로 이것 때문인데요, 자연이 물처럼 쏟아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기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기관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방식으로 자연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물처럼 쏟아내고 있어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게다가,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보세요. 성경 시대 당시에는, 과학적 지식이 모자랐던 관계로, ‘신화적 세계관을 가진 세계였는데요, 많은 이들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던 때입니다. 태양신을 모시던 사람들이 많았었죠.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태양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창조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태양을 아주 활기차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태양의 운행을 신혼방에서 나오는 신랑달리기를 기뻐하는 힘센 장사에 비유하며, 태양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계시하는 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논쟁을 뒤로하고,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여러분은 저 태양을 바라보며, 또는 달을 바라보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 결을 느끼며, 들에 핀 풀 한 포기를 보며, 저만치 핀 들꽃을 보며,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보며, 아니면, 고이 잠든 아기의 숨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느끼시는지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니다, 라는 신학적 논쟁은 어느 면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논쟁이기도 하지만, 그 논쟁에 파묻혀 지극히 작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서도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놓쳐버리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아름답지 않나요?

 

봄이 깊어지고 있는데요, 오늘 하루 주어진 일과를 열심히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꽃집에 들러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 들고 들어가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화병에 가지런히 꽂힌 프리지아가 뿜어내는 그 아름다움 향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경험하는 신비로운 저녁 시간을 맞이해 보는 것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4. 18:22

아침묵상 시편 18편 3부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https://youtu.be/p32JacGt6Qs


안녕하세요? [아침마다 새로우니]의 장준식 목사입니다.

 

오늘은 시편 18편에 대하여 세 번째 묵상을 합니다. 오늘로 18편 묵상을 마칠까 합니다.

 

우리는 시편 18편의 고백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이유를 알 수 있는데요, 다윗은 본인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거나 우쭐대지 않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왕권을 의탁합니다. , 자신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자신은 그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신을 기꺼이 낮출 줄 알았죠.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자신이 왕으로 세움 받은 목적을 이루면서 살았던 다윗, 그는 시편 18편에서,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과 이스라엘을 악인과 열방에서 구원하셨는지를 노래합니다.

 

50절까지 있는 긴 호흡의 시입니다만,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왕권과 구원하심을 노래하고 선포하는지, 잠깐 시간내서 시편 18편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시편 18편의 1절과 2절은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라, 그 구절에만 집중해도 시편 18편 전부를 묵상한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고백하죠.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라함을 옮긴 말인데요, ‘라함은 문자적으로 모태에서 나오는 사랑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라함은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죠. 그래서 라함은 보통, ‘긍휼’, ‘자비’(Mercy)로 번역합니다.

 

라함은 보통 마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태에서 나온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아버지가 자녀들에 대하여 가지는 마음, 또한 형제/자매가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자매에 대하여 가지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라함인 것이죠.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1절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이나이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라함의 마음을 가지고 시인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 오히려 더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라함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왠지 하나님이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하는 표현인 것 같아요.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바로 라함의 마음이시겠죠.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는 간구를 자주 마주칩니다. 특별히,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에게 긍휼과 자비를 간구했던, 수많은 가난한 자를 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긍휼과 자비를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긍휼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셨죠.

 

예수님의 마음에는 라함의 사랑이 가득했던 것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든, 육신이 가난한 자든, 물질이 가난한 자들을 보았을 때, 라함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곧 자신과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 자매로 바라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을까요.

 

파드레 마르셀로 로시 신부가 쓴 <아가페>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쉽고 잔잔한 용어로 풀어가며,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책인데요, 그 책 전반에 흐르는 아가페 사랑의 본질은 라함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이 이웃을 향하여 어떠한 사랑을 행할 것인가, 라는 것을 로시 신부는 묻고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지셨던 바로 이 마음, 이 사랑! 우리가 이웃을 향하여 동일하게 가져야 할 마음, 사랑인 것이죠. 고통을 겪고 있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보았을 때, 우리가 라함의 마음을 가진다면, 이 사람이 이 아니라, 나와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 자매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듬어 주고, 위로하며, 함께 이겨 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신앙은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일입니다. 나만 예수 잘 믿어 천국 가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구원은 총체적인 것이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궁극적 구원이 아닐런지요. , ‘라함의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 그래서 이웃을 나와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 자매로바라보게 되어, 긍휼과 자비를 가지게 되는 것! 그래서 나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구원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라함의 사랑에 한발짝 더 다가서는, 신비로운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3. 06:19

아침묵상 시편 18편 2부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https://youtu.be/1Ylxwgh6gRg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시편 18편을 묵상하며 하루를 열어봅니다.

 

어제 유진 피터슨 목사님 이야기를 하며 시편 18편의 묵상을 시작했는데요, 다윗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사무엘상하에 걸쳐서 장대하게 펼쳐지고 있죠. 다윗과 관련해서 흥미진진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요, 그 중에서 단연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로 꼽을 것입니다.

 

시편 18편은 이렇게 시작을 하죠.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2).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시인(다윗)의 언어를 보면, 모두 전쟁용어입니다. ‘’, ‘반석’, ‘요새’, ‘피할 바위’, ‘팡배’, ‘구원의 뿔’, ‘산성’. 시인은 지금 전쟁 용어에 빗대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에는 원래 왕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 체계에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면서 주변 나라들로부터 너무도 괴롭힘을 당하니까, 사사 또는 선지자로 불렸던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세운 왕이 사울이었고, 사울에 이어 다윗이 왕이 된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제 1원인은 외적의 침입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놓으면 외적이 침입해 모두 빼앗아 가는 일이 반복되어,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정말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에게는 무엇보다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일이 첫 번째 임무였습니다. 사울 왕의 생애도 그렇고, 다윗의 생애도 그렇고, 그들 모두 전쟁이 일상인 왕이었죠.

 

그러므로 시편 18편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것을 읽는 우리 독자들에게는 일상적인 용어가 아니나, 그것을 쓴 다윗에게는 너무도 일상적인 용어들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맞닥뜨린 삶의 현실에서, 일상에서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자동차의 사용이 일상인 현대인들의 용어로 다윗의 고백을 바꾸어 보면, 이렇지 않을까요? “나의 엔진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주는 나의 핸들이시요, 브레이크이시며, 윈쉴드이시요, 네비게이션이시나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조금 우스꽝스러워도,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일상 용어를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 서툴러서 그런 것일 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이렇게 일상용어를 사용하여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해석하며, 일상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일상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상상하는 상상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요. “다윗은 베들레헴 언덕과 풀밭에서 아버지의 양을 돌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또 가까이 계신 분이신지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고 또한, “그는 양을 지키며 사자와 곰과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상시 늘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경배해 온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곰의 사나움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기도하고 노래하며, 묵상하고 찬미하는 가운데 형성된 그의 상상력 속에는 양, , 사자를 모두 압도하는 더 크고 거대하며 강한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었다.”(57-58).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생겨난 어떠한 위대한 힘 때문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다윗의 일상성과 상상력에 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일상은 그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겠죠. 신앙의 깊이는 일상에서 쌓아야 하는 것이지, 어떠한 특별한 때에 쌓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일상에서 쌓은 신앙의 깊이가 어떠한 특별한 때에 발휘되는 것이겠죠. 일이 발생했는데, 그때 신앙의 깊이를 쌓으려 한다면, 우리는 이미 발생한 일에 압도되어 신앙의 깊이를 쌓을 겨를도 없이, 휩쓸려 내려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골리앗 같은 팬데믹 현상 가운데서, 골리앗의 체구와 야만성, 잔인성에 압도되어 안절부절 못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압도되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간구하는 다윗과 같은 영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 같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문장으로 오늘 묵상을 마쳐볼까 합니다. “신앙의 길은 각자가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듯이 하나님 믿기를 배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일은 말하고 걷는 것만큼 중요하며,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의미 있으며, 가장 인간적인 일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공적이며 가장 사회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일이기도 하다”(61).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2. 07:28

아침묵상 시편 18편 1부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https://youtu.be/LDPP1r27vJk


오늘은 시편 18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18편은 50절로 구성된, 긴 시편인데요, 그래서 오늘 한 숨에 18편 전체를 다 묵상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몇 번에 나누어 묵상해 보기로 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유진 피터슨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은 주로 IVP 출판사에서 출간이 되었죠. 그때 저는 20대 중후반을 지나고 있었는데요, 강남역에 있었던 사랑의 교회 앞에 라 비블이라는 기독교서점에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들을 사서 읽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담이지만, 거기서 C. 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원서도 구입한 기억이 나네요. 아직도 그 책들은 제 서재에 꽂혀 있습니다.

 

시편’, 하면, 다윗이 떠오르는데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서 제목은 <Leap Over a Wall>이고, 부제는 ‘Earthy Spirituality for Everyday Christians’입니다. 원서 제목에서 책 내용을 알 수 있듯이, 뭔가 벽이 앞에 가로 막고 있는데, 그것을 뛰어넘는 일에 대한 지혜를 담은 책인 것이죠.

 

우리는 대개 “spirituality(영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하늘 나라 일을 생각하는데요, 피터슨 목사님이 부제목에서 ‘earthy spirituality’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영성은 저 하늘 나라의 일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가 두 발붙이고 사는 땅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성은 다름 아닌 ‘everyday Christians’ , 평범한 일반 성도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신도들을 위한 영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2018년도 1022일에,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는데요, 그분의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몬타나(Montana)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죠. 몬타나주는 브래드 피트(Brad Pitt)가 주연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한데요, 그 자연환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은 지금 다시 읽어도 그 깊이와 넓이가 대단한 작품입니다. 아니, 공부를 좀 더 하고 들여다보니까, 그분의 영성의 깊이와 넓이가 조금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안타까운 마음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을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읽었다면, 한국 기독교가 지금 이렇게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을텐데…”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조금 들어야 볼까 합니다. 이런 말을 하십니다.

1)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는 인간적(human)이라는 단어와 그리스도인다운(Christian)이라는 단어가 동의어였다.” (12)

2)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을 향한 갈증은 인간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다. 이는 성, 권력, 안정, 명성을 향한 욕구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한 욕구이다.” (17)

3) “인간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너그럽게 봐주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놀랍도록 존엄한 존재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 세 거룩한 신비! 세 신성한 무한! – 으로 계시하는 성경에서, 인간(human)이라는 말은 결코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예로운 호칭으로 쓰인다.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19)

 

이러한 말들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인간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문장입니다.

 

특별히,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다윗 이야기의 주인공이, 즉 다윗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나칠 정도로 각종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삶을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합니다.

 

지금 우리는 각종 전문가들을 지나칠 정도로 중시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 ‘전문가가 아닌일반인은 거의 바보로 취급당하며,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서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할 사람으로만 여긴다. 그 결과는 그리 고무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 몸을 돌보는 일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개인의 건강 수준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왔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습 책임을 교육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스스로 사고할 줄 모르고, 인류의 문화 유산과 역사에 대해 무지하며, 광고와 정치의 조롱 섞인 조작 행위에 대해 무방비 상태인 대중을 만들어 놓았다.” (31)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을 가합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한 책임을 종교 전문가들에게 내맡겼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범퍼 스티커와 TV 유명 인사들이 대중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배하고 있으며,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공연 구경과 영양가 없는 종교 상품 구매에만 강박적으로 빠져 있을 뿐이다. 종교 메시지 전달과 종교 상품 판매는 인류 역사상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해졌다. 이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전문가에게 의존하도록 훈련받아 온 일반 평신도들은 여전히 믿음과 기도, 원수 사랑과 낯선 이를 환대하는 일에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 (31-32)

 

그러면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신앙이라는 모험을 감행한 사람은 대부분 평신도였다고 말하며, 종교 전문가들의 허세에 겁먹지 말고, 수동적인 종교 소비자로서의 존재에서 벗어나, 다윗처럼, 능동적인, 현실 속에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신실하게 대면하는,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라고, 힘 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35)

어떠세요? 제 말이 맞지 않나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저서들을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읽었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 어려움을 겪지 않고, 시대를 이끄는,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는 존재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즉 전문 성직자로서 하고 싶은 일은, 전문가의 특권을 내세우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공부수련으로 터득한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리며, 여러분 스스로 일상에서, 현실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신앙인으로 우뚝 서는 것을 도와 드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여러분이 흥하시는 것을 도와 드리기 위하여, 저는 쇠하는 것,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편 18편을 묵상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시편 18편은 진실로, 현실에서 우러나온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위에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듯이, 여러분의 삶을 전문가 집단에게 맡기지 마세요. 전문가에게 맡기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의 삶을 깊고 넓게 가꾸어 보세요.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신, 여러분의 것입니다. 시편을 통해, 현실에서, 일상에서 꽃을 피우는 신앙의 길을 배우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1. 11:13

아침묵상 시편 17편 - 결심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기

https://youtu.be/eeDMfHgZN1E


오늘은 시편 17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1절을 읽어보면, 지금 시인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지금 시인의 삶 속에는 불의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그 불의에 맞서, 시인은 지금 하나님께 정의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죠.

 

불의에 맞선 정의의 호소! 살아가면서, 우리는 불의한 일을 종종 맞닥뜨리게 되는데요,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일을 아뢰며, 신원하여 주시기를 간청하게 되죠.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은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죠. 남이 자신한테 저지른 불의한 일을 생각하며, 분에 못 참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께 의를 호소할 수 있지만, 본문에서 시인이 하는 것처럼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라고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의로울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의가 형편없이 모자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인은 밤에 하나님이 자신을 감찰해 주시기를 바라고, 아침에 깨어나서는 주의 형상으로 만족한다고 고백합니다. 지금은 밤이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지만, 고대 유대인들은 밤이 하루의 시작이었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시인이 밤에 자신을 감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정의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이죠.

 

우리는 대개 하루를 지내고 난 뒤, 밤에 하루를 돌아보며 반성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하루를 이렇게 잘못 살았을까, 내가 왜 그 순간에 그렇게 말했을까, 또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후회하고 반성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루의 시작을 의롭게 시작하는데, 하나님께 마음을 다 보여드리고, 하나님이 감찰하셨을 때 흠을 찾지 못할 정도로 순전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3절 말미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렇게 먼저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아무런 결단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시작한 시인은 아침이 밝았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이리다.”

 

대개, 후회하는 삶을 산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형상)을 볼 면목이 없죠. 후회로 가득한 하루를 산 사람은 시인처럼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라며, 자신의 삶 가운데 발생하고 있는 불의한 일을 하나님께 아뢰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반성할 뿐입니다. “나나 잘하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기로 결단하며 하루를 시작한 사람과, 하나님과 그러한 교감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산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는데요, 결과적으로 하루를 살며 의로움을 드러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주님, 그래도 제가 최선을 다 했는데, 이것 밖에 안 되네요라고 말하는 것과, 시도조차 안 해본 것과는 그 삶의 질이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 17편에는 아주 아름다운 문장이 나오는데요, 8절 말씀입니다.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시인은 의롭게 살기로 결단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악인들에게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구합니다. “주님, 나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세요! 주님,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세요!” 너무 예쁜 간청이죠. 특별히 눈동자 같이 지켜달라는 말은 영어로 “Keep me as the apple of the eye”라고 하죠. 누군가 예뻐서 죽을 때, 영어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죠. “You are the apple of my eye.”

 

하나님이 우리를 예뻐라 하시면, 당연히, 악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건져주시겠죠. 우리가 하나님께 이러한 간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 하루를 끝마칠 때 나는 왜 이렇게 살았지?’라고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거야!’라며 결심하는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 이렇게 결심하면서 시작한 하루는 분명 복된 하루, 행복한 하루, 후회 없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결심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너무도 예뻐하셔서,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9. 09:37

아침묵상 시편 16편 - 주님만이 나의 재산이시다

https://youtu.be/YRHVLMgIWHs


오늘은 시편 16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오늘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편 16편을 묵상해 보려 하는데요, 한 구절씩 읽고, 그 한 절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읽어나가려고 합니다.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동사를 현재형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과거형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서 뜻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요, 동사를 과거형으로 보면, 시인은 지금 주님께 피하여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면, 이렇게 읽히죠. “내가 주께 피하였나이다! 주여, 나를 지켜주소서.” 이것은, ‘지켜 주시면 피하겠다는 조건문이 아니라, ‘이미 피했으니까, 지켜달라는간청문인 것이죠. 저는 이 뜻이 참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주님께 피하고 보는 것이죠. 주님은 나의 피난처되시니까요. 그러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겠죠. 여러분, 무슨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주님께 먼저 피하고 보세요. 주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겁니다.

 

2절에서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하는데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주님을 떠나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말이죠. 살다가, 왜 나는 이렇게 행복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시면, 한 번 자신을 돌아보세요. 내가 혹시 주님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닌지요.

 

3절에서 시인은 참 마음이 따스한 고백을 하는데요,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우리는 기쁨을 먼 곳에서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기쁨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곁에 있습니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죠.

 

길가메시 서사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길가메시가 친구의 허무한 죽음을 경험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나죠. “어차피 죽어야 하는데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한탄하면서요. 방황하던 길가메시는 선지자를 만나는데요, 그가 길가메시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길가메시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다시 집에 돌아가 원하는 일을 하며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거라. 그리고 좋은 친구들과 종종 만나 맛있는 것을 먹고 술도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라. 길가메시야, 인생이란 네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것이란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때가 많지만,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면, 삶의 자세가 분명 달라질 겁니다. 옆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세요.

5절에서 시인은 매우 독특한 고백을 하는데요, 이것은 여호수아서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제비 뽑아 분배 받는 것에서 온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별로 감흥이 없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겠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고 말씀하신 것일 겁니다.

 

5절 말씀은 쉽게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재산이시다!” 우리는 돈, , , 뭐 이런 것을 재산(property)으로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을 모으고 지키는 데 힘을 쏟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참 엉뚱한 고백을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재산이십니다!” 이 말씀을 실제로 삶에서 구현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부잣집 도련님 출신인 성 프란체스코가 대표적이죠. 엄청난 재산을 부모한테 물려 받은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탁발수도사(밥 빌어먹는 수도사)가 됩니다. 프란체스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도 주님만이 나의 재산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했기 때문이죠. 너무 아름다운 고백이고 삶이죠. 이런 말씀과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욕심이 얼마나 과도한지를 알 수 있고요, 그 욕심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는 것도 배워야겠죠.

 

16편의 다른 구절도 아름다운 구절이 많은데요, 마지막 11절의 구절을 묵상하면서 마칠까 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여기서 보이신다는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단어입니다. 육신의 모든 감각이 그것을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모든 감각이 생명의 길을 안다면, 인생이 다른 것에서 생명의 길을 찾지 않겠죠.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길을 알고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주의 오른쪽은 주님이 거하시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보이신 생명의 길이고, 그분은 승천하시어 주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또한 11절의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라는 고백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은 묵상을 마치면서, 제가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을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세요!

 

우리의 피난처 되시고, 우리의 행복이 되시며,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신 하나님과 함께 오늘도 생명이 충만한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7. 17:53

아침묵상 시편 15편 - 덕스러운 말, 또는 침묵 하기

https://youtu.be/0av2b8uwyTQ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시편 15).

 

시편에는 유사한 시편이 몇 있는데요, 어제 살펴본 시편 14편은 53편과 매우 유사하고요, 오늘 살펴볼 15편은 24편과 평행을 이루는 시편입니다. 특별히, 15편과 24편은 예배하는 자가 성전에 가서, 성전에 입장할 때에 부르는 시편으로 알려져 있죠.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예배라고 표현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시인은 성전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주의 집에 들어가서 주님을 뵙고, 주님과 함께 교제 나눌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누구입니까?”

 

영어에 RSVP라고 있죠. 프랑스어의 ‘Répondez s'il vous plaît’에서 온 단어인데요, “please respond”라는 뜻입니다. 초청장을 건네고, 올 수 있는지, 오지 못하는지, 미리 알려 달라는 말이죠. 누구의 초청을 받으면, 초청장이 있어야 하고,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초대하시는데요, 하나님의 초청장, 즉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좀 특이합니다. 돈 많은 사람도 아니고, 잘 생기고 예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옷을 잘 입은 사람도 아니죠. 시인이 알려주고 있는 자격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참 특이하죠.

 

정의와 공의는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하는 마땅한 윤리를 말합니다.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고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 정의와 공의입니다. 시인은 그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죠.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은 정직하게 행하는 것’, ‘공의를 실천하는 것’,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8개 정도를 말하고 있는데요, 1) 혀로 헐뜯는 말을 하지 않는 것, 2)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3) 친구나 동료에게 누명을 입히지 않는 것, 4) 타락한 사람을 멀리하는 것, 5)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것, 6) 손해를 봐도 맹세한 것은 지키는 것, 7) 돈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지나치게 받지 않는 것, 그리고 8)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인데요, 공동체 생활이 중요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행동은 공동체의 존속과 그 구성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게 좋았고, 반대로 공동체를 번영하게 하는 행동은 장려된 것이죠.

 

요즘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많이 무너지고, 관계가 매우 파편화된 사회이죠. 우리는 상대방이 없어도 생명을 부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그렇다보니, 막말과 못된 행동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발되면서 사회가 매우 어지러워졌습니다. 특별히, 첫번째 구체적인 행동인 혀로 헐뜯는 말을 하는 일이 인터넷 매체 등에서 너무 악독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허무는 말’,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도 있는데요, 얼마전 악플 때문에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일도 있었죠. 이웃을 해하는 어떠한 일도 하면 안 되지만, 특별히, ‘허무는 말 하는 일, 즉 혀로 헐뜯는 말 하는 일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생명을 허무는 말은 내다버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세워주는 덕스러운 말을 하도록 노력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하는 말이 허무는 말인지, 세우는 말인지, 분간이 안 될 때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 하는게 훨씬 좋을 때도 있죠. 그렇게 말을 조심하는 것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 지의 자격 조건이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하는 말을 조심하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덕스러운 말을 하는, 또는 침묵하는, 복된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
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16. 08:28

아침묵상 시편 14편 - 선하게 살기

https://youtu.be/EMrrpX92oxg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편 141~3).

 

작년과 재작년 한국에서 많이 팔린 책 중에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세속(secular)’이라는 말이 있죠. 좋은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대개세속적이라는 말은속물적이라는 뜻으로 통하거나, ‘신을 믿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를 일컬어세속적이라고 하는데요, 최근 이러한세속적인 사람들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에서는세속(secular)’라는 용어를 가치 중립적인 용어로서, ‘무종교적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책의 저자 필 주커먼(Phil Zuckermann)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에 위치한 피처 칼리지의 사회학과 교수인데요, 그 자신이무종교인입니다. 그는 종교 없는 삶을 택한 사람들이 늘어가는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면서종교 없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서,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덜어내려고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연구를 통해,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 가치를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신뢰와 생각의 자유, 지적인 탐구, 아이들의 자율성 함양, 진리 추구, 황금률(남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남에게 해주어라!)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공감적 호혜를 도덕성의 바탕으로 삼기, 죽음의 불가피성 받아들이기, 내세가 아닌 지금의 세상을 기초로 하는 온건한 실용주의로의 삶을 항해하기, 그러면서 설명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심오한 존재의 한가운데서 때때로 깊은 초월감을 만끽하기등이 바로 그것이다(24).

 

그는 이어서무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활력과 의욕, 열정, 끈기를 갖고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또 이 세상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므로 세상을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것신이나 구원자보다 가족과 친구들을 더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타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또 갓난아기나 폭풍우, , 눈물, 조화와 내적인 것들, 대수학, 용서, 오징어, 아이러니 같은 삶의 설명할 수 없는 경이들에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보호테이프를 붙이지 않고 이것들 속에서 기쁨과 충족감을 발견하는 것…”(24-25).

 

저자가 연구를 통해 밝혀낸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 가치들을 보면종교를 가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이 세상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므로, 이 세상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종교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겼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들은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일텐데요, ‘세속적인 삶’, 즉 종교 없이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도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없다라고 그 마음에 생각하며, 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무신론을 실천으로 나타내는데요, 그들은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토브)’, 참 멋진 말이죠. 하나님이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루하루 창조를 끝내실 때마다, 창조하신 피조물을 바라보시며, ‘선하다(good)’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우리는 선한 존재입니다. 위에서 필 주커먼이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에서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렇게 선하게 살아갈 수 있고, 선하게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신 것을 알고 고백하고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물론,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경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질없는 짓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신 이유가 경쟁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우리는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선한 창조에 경탄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대로 선하게살면 됩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든, 작은 일도 괜찮습니다, ‘선한 일을 해보세요. 내 마음에 기쁨이 있고, 상대방의 마음에 용기를 주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 잔잔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러한 선한 일을 해보세요.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노래하는, ‘충분한 그리스도인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