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30. 07:02

아침묵상 시편 22편 - 역사의 존재

https://youtu.be/qO9GrAvoX-E


오늘은 시편 22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시편 22편을 읽으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4개의 복음서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십자가 상의 7언이라고 하는 것 중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동일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그 절망, 그러한 감정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죠.

 

얼마전,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는 책을 조금 살펴보았는데요, 신앙은 현실에 뿌리는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좀 더 거창한 말로 표현하자면, 신앙은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함께 등장한 신학사상 중에 이신론(deism)’이라는 게 있는데요,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매우 긍정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처럼 이성을 사용하여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죠. 그렇다 보니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한 기색을 가진 신학사상이었죠. 계몽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이성을 통해 인간 스스로 역사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판명 나고 말았죠. 그 끝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뿐이었으니까요.

 

기독교를 역사의 종교로 부르는 이유는 역사의 발전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서 일하시며, 인간은 역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역사를 일구어 가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역사 속에 자리 매김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역사를 일구어 가시며, 우리를 부르셔서, 자신이 하시는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역사를 일구어 가신다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 소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특별한 임무를 수여 받은 Special Agent가 된 것과 같은 것이지요. 이것을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지루하거나 권태로울 겨를이 없는 것이죠.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다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시편 22편은 구체적인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한국 역사에 길이남을 장수, 이순신 장군이 생각납니다. 시편 22편에 드러나고 있는 다윗의 고뇌와 이순신 장군이 지은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에 드러나고 있는 고뇌는 같은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심리학의 발달 때문에 시편을 심리적으로 읽어내려는 경향이 많은데요, 그러나, 우리는 시편을 읽을 때 심리적으로 읽기보다, 역사적으로 먼저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지켜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죠. 그의 삶은 매일이 전쟁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왠지불안한 게 아니라, 실제 눈 앞에 보이는 적들 때문에 불안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목숨이 실제로 위태로운 사람이 겪는 그 실제적인 불안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시편 22편을 심리적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다윗에게 불안은 왠지 모를 불안이 아니라, 아주아주 현실적인 불안이었으니까요.

 

이순신 장군이 쓴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에서도 그 불안과 고뇌가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는 변방의 오랑캐를 감시하는 높은 망루를 말하고, ‘일성호가는 갈대 잎을 말아 만든 피리로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한 것이었죠. 지금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침입을 앞에 두고, 한산섬에 있는 높은 망루에 올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냥 걱정이 아니라, ‘시름에 차있습니다. 자신이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면, 온 나라와 백성이 왜적의 손에 어떠한 비참한 일을 당할지 뻔히 알기 때문이죠. 그때, 어디선가 처량한 피리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상상이 갑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사사시대와 같이 주변 나라들 때문에 가난과 핍박 속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살게 되었을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제강점기가 400년은 앞당겨졌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런 소망 없이, 죄의 지옥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 때로는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여,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도 다윗처럼 시편 22편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 속에서 일하시며,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 역사를 쉬지 않고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에 동참시키십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면, 주변이 평화로울 것이요, 주어진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실제적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역사를 이룬, 역사적인 인물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될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