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시편 19편 -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오늘은 시편 19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19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1절부터 6절까지는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고요, 7절부터 마지막 14절까지는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고 있죠.
오늘은 신학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학문이죠. 영어로 ‘God-talk’라고 합니다.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죠.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감각으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까, 하나님이 존재하는 지, 존재하지 않는 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신학이라는 학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긍정합니다. 그러면, 신학의 과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요,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길고 지난한 논의이죠.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다음 진술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이 ‘영(Spirit)’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은 인간이 지닌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라는 뜻인데요, 그렇다 보니, 신학에서는 “계시(revelation)”라는 용어가 하나님 존재 증명, 하나님 인식을 말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그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인식하려고 노력해도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는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이고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비로소 인식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편 19편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를 두 가지로 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은 ‘자연(nature)’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과, 율법(성경)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즉 자연(nature)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해 두셨다고 말하는 신학의 분야를 일컬어 ‘자연신학(natural theology)’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또는 성경에 증언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라는 소위 정통신학과 경쟁하는 신학의 개념입니다.
느슨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 진영 내에서도 ‘보수신학’은 성경만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주장하고요, ‘진보신학’은 성경 외에도 자연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일상적인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요, 성경만을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주장하고 믿는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과학적 발견, 특별히 진화론 같은 것을 극명하게 거부하는 신앙의 형태를 보이고요, ‘자연신학’을 받아들이는 기독교 진보 진영에서는 과학의 발견을 적극 수용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구성하고 있죠.
어떠한 신앙의 형태가 옳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여러 논쟁이 있고, 타협하기 어려운 신학적인 포인트들이 있는데요, 그러한 복잡한 신학 논쟁들은 잠시 내려 놓고, 오늘 시편 19편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우리의 마음이 신학적 논쟁으로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에서 4절을 눈 여겨 보시면, 시인이 아주 신비로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연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자연신학을 말하는 것이죠?), 그 방식이 매우 신비롭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겠죠. 그런데, 한국어로 ‘말하고’로 번역된 말은 ‘야비아’라는 히브리어인데요, 물이 쏟아져 나오는 형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쉬지 않고 솟아 나오는 샘물처럼 지속적으로 풍성하게 흘러 내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와, 그렇다면, 우리가 당연히 자연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할텐데요,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할까요? 바로 이것 때문인데요, 자연이 물처럼 쏟아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기관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방식으로 자연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물처럼 쏟아내고 있어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게다가,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보세요. 성경 시대 당시에는, 과학적 지식이 모자랐던 관계로, ‘신화적 세계관’을 가진 세계였는데요, 많은 이들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신(하나님)’으로 인식하던 때입니다. 태양신을 모시던 사람들이 많았었죠.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태양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창조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태양을 아주 활기차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태양의 운행을 ‘신혼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달리기를 기뻐하는 힘센 장사’에 비유하며, 태양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계시’하는 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논쟁을 뒤로하고,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여러분은 저 태양을 바라보며, 또는 달을 바라보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 결을 느끼며, 들에 핀 풀 한 포기를 보며, 저만치 핀 들꽃을 보며,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보며, 아니면, 고이 잠든 아기의 숨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느끼시는지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아니다, 라는 신학적 논쟁은 어느 면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논쟁이기도 하지만, 그 논쟁에 파묻혀 지극히 작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서도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놓쳐버리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아름답지 않나요?
봄이 깊어지고 있는데요, 오늘 하루 주어진 일과를 열심히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꽃집에 들러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 들고 들어가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화병에 가지런히 꽂힌 프리지아가 뿜어내는 그 아름다움 향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경험’하는 신비로운 저녁 시간을 맞이해 보는 것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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