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시편 18편 3부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안녕하세요? [아침마다 새로우니]의 장준식 목사입니다.
오늘은 시편 18편에 대하여 세 번째 묵상을 합니다. 오늘로 18편 묵상을 마칠까 합니다.
우리는 시편 18편의 고백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이유를 알 수 있는데요, 다윗은 본인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거나 우쭐대지 않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왕권을 의탁합니다. 즉, 자신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자신은 그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신을 기꺼이 낮출 줄 알았죠.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자신이 왕으로 세움 받은 목적을 이루면서 살았던 다윗, 그는 시편 18편에서,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과 이스라엘을 악인과 열방에서 구원하셨는지를 노래합니다.
50절까지 있는 긴 호흡의 시입니다만,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왕권과 구원하심을 노래하고 선포하는지, 잠깐 시간내서 시편 18편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시편 18편의 1절과 2절은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라, 그 구절에만 집중해도 시편 18편 전부를 묵상한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고백하죠.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라함’을 옮긴 말인데요, ‘라함’은 문자적으로 ‘모태에서 나오는 사랑’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라함은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죠. 그래서 ‘라함’은 보통, ‘긍휼’, ‘자비’(Mercy)로 번역합니다.
‘라함’은 보통 마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태에서 나온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아버지가 자녀들에 대하여 가지는 마음, 또한 형제/자매가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자매에 대하여 가지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라함’인 것이죠.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1절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이나이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라함’의 마음을 가지고 시인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 오히려 더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라함’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왠지 하나님이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하는 표현인 것 같아요.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바로 ‘라함’의 마음이시겠죠.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는 간구를 자주 마주칩니다. 특별히,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에게 ‘긍휼과 자비’를 간구했던, 수많은 ‘가난한 자’를 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긍휼과 자비를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긍휼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셨죠.
예수님의 마음에는 ‘라함’의 사랑이 가득했던 것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든, 육신이 가난한 자든, 물질이 가난한 자들을 보았을 때, 라함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곧 자신과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 자매로 바라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을까요.
파드레 마르셀로 로시 신부가 쓴 <아가페>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쉽고 잔잔한 용어로 풀어가며,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책인데요, 그 책 전반에 흐르는 아가페 사랑의 본질은 ‘라함’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이 이웃을 향하여 어떠한 사랑을 행할 것인가, 라는 것을 로시 신부는 묻고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지셨던 바로 이 마음, 이 사랑! 우리가 이웃을 향하여 동일하게 가져야 할 마음, 사랑인 것이죠. 고통을 겪고 있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보았을 때, 우리가 ‘라함’의 마음을 가진다면, 이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나와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 자매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듬어 주고, 위로하며, 함께 이겨 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신앙은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일입니다. 나만 예수 잘 믿어 천국 가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구원은 총체적인 것이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궁극적 구원이 아닐런지요. 즉, ‘라함’의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 그래서 이웃을 ‘나와 같은 태에서 나온 형제, 자매로’ 바라보게 되어, 긍휼과 자비를 가지게 되는 것! 그래서 나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구원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라함’의 사랑에 한발짝 더 다가서는, 신비로운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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