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4. 28. 05:40

아침묵상 시편 20편 - 간절함

https://youtu.be/yYnwAXABscI


오늘은 시편 20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시편 20편을 읽어보면, 아마도 모든 분들이, ‘이 말씀을 붙들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특별히 4절의 말씀,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같은 구절을 보면, 밑줄을 쫙 긋고, 외우고 싶고, 이 말씀대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이 구절을 읽어도,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지만, 성경을 그렇게 읽는 것은 성경 말씀을 너무 사유화하는 것이고, 개인적인 용도로 남용하는 것이 되겠죠. 개인주의가 심화된 현대 사회에서 성경의 말씀을 사유화하고, 개인화 하는 방식의 성경읽기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조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시편 20편에는 크게 세 부류가 등장합니다. 두 부류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구요, 한 부류는 암묵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부류는, 백성, , 그리고 제사장입니다. 이 세 부류가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위에서 살펴본 4절 말씀만을 보면, 이 시편은 복 받아라! 네 범사가 잘 될 것이다!’, 뭐 이런 류의 축복의 선언 같이 보이는데요, 그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20편에 흐르는 기류는 국가비상사태선포입니다. 1절에서 환난 날에전쟁의 때를 의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을 앞두고 있고, 왕은 적군에 맞서 출정을 하려는 찰나입니다.

 

아직까지도 전쟁이 멈추지 않은 지역이 있습니다만, 한국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세대도 있고, 전쟁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도 있습니다. 사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으신 어르신들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으면 전쟁에 대해서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게 될 텐데요, 젊은 세대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전쟁을 접하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가령, ‘진주만(Pearl Habour)’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그 영화의 메시지는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게 아니라, 영웅주의나 사랑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 진주만 폭격을 경험한 세대들은 전쟁을 낭만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러한 것이 예술의 역기능이죠. 그래서 플라톤 같은 경우는 <폴리테이아(국가)>에서 시인 추방론을 펼치기도 하는데요, 시인은 실재(reality)를 모방할 뿐, 실재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그렇죠. 전쟁을 모방할 뿐, 전쟁의 참상, 전쟁의 실재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거기에 흐르는 실재(reality)’를 최대한 상상하지 못하면, 말씀이 사유화되고, 개인화되기 쉽기 때문인데요, 지금 백성들은 왕의 출정을 앞에 놓아두고,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왕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는 겁니다.

 

백성들은 왜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왕의 승리를 기원할까요? 이것은 단순한 응원의 차원이 아닙니다. 왕이 전쟁에서 이기면 다행이고, 지면 어쩔 수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과 같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전쟁에서 이기면 평화를 누리지만, 왕이 전쟁에서 지면, 그 결과는 온 백성의 노예화, , 고통스러운 삶으로의 추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말씀은 결코 사유화 되거나, 개인화 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차라리 전쟁에서 죽는 것이 나은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공동체의 차원에서 읽고 적용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 혼자만 안위를 누리면 된다는 생각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죠. 당장은 나에게 별 문제 없을 지 모르지만, 결국, 공동체가 무너지면, 어느 시점에서는 나 자신의 삶의 근거도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백성과 왕과 제사장, 세 부류는 구분되는 것 같지만,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성은 왕의 승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왕은 백성의 기원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제사장은 백성과 왕의 기원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응답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 셋 중의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국가의 운명은 끝장인 것이죠.

 

공동체의 운명이 왕에게 달렸다고 생각할 때, 자기 일처럼 간절하게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을 백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공동체의 운명이 왕에게 달렸다고 생각할 때, 자기 일처럼 승리를 기원하는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지 않을 제사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흐르는 간절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간절함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선포한 기독교 공동체의 운명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면 우리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패배하면 우리는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는 정해진 날에 모여 간절함을 가지고, 왕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그게 예배입니다. 예배를 집전하는 성직자를 통해서 성령께서는 공동체의 간절한 기원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응답되었다고 선포하며 마음에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예배당을 나서며,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죠.

우리가, 시편 20편에 흐르고 있는 간절함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운명이 왕에게 달렸듯이, 우리의 운명도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것을 절실히 안다면, 예배자로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마음 깊이 알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함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 간절함이 여러분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