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이야기2019. 5. 16. 08:21

엄마, 사랑해

 

같은 풍경도 나이에 따라 달라 보인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 읽었던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불혹의 나이를 지나고 세상만사를 조금 알게 된 지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섯 살 난 작은 여자 아이(옥희)의 눈으로 그려진 엄마와 사랑방 아저씨의 사랑은 애틋하기 그지없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엄마와 아저씨 사이에서 우편 배달부노릇을 한 옥희의 눈에 엄마와 아저씨는 아무 일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어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안다. 1935년에 쓰여진 소설 답게 엄마와 아저씨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고 만다. 엄마는 24살 먹은 젊은 과부였고, 아저씨는 아빠의 친구였다. 그들의 사랑은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재밌는 한 장면은 아저씨가 엄마를 따라 교회에 가는 것이다. 아저씨는 예수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교회를 간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웃음 지어진다.

 

엄마는 기계가 아니다. 엄마도 사람이다. 엄마에게도 감정이 있다. 그런데, 엄마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감정을 감추며 사는 존재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동양 문화권의 엄마는 그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엄마가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엄마도 좋아하는 게 있고, 싫어 하는 게 있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가고 싶은 데가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러나, 그냥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에모리 유학 시절,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때, 나는 엄마랑 기숙사에서 6개월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60대 후반의 나이였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6년째 되는 해였다(2004). 기숙사에서 엄마는 나를 뒷바라지 해주시면서 살림을 하셨다. 찬장에 그릇을 채우고, 양념통을 채우고, 여러 부엌 살림을 채우시는 데, 엄마가 정말 즐거워하셨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6년 동안 혼자 지내시다가, 아들과 둘이서 지내며 부엌 살림을 하시면서 아버지와 신혼살림 차리시던 그때가 생각나셨던 모양이다. 삼시 세끼를 정성스럽게 차려주셨고, 내가 공부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안 주무시고 계시다, 내가 도서관에서 늦게 기숙사로 돌아올 때, 나를 맞아 주시던 그 표정은 마치 남편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엄마의 그러한 표정에 마음이 짠했다. ‘이렇게 새색시처럼 살림하고 밥상 차리고, 늦게 귀가하는 아들을 반갑게 맞아 주시는데, 아버지를 하늘 나라로 떠나 보내시고 얼마나 마음이 허전하고 힘드셨을까.’ 엄마는 겉으로 크게 내색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 없이 혼자 사시는 게 힘드셨던 것이다. 그러다 이렇게 신혼살림 차리듯 기숙사에서 아들과 지내니, 옛날 생각이 나서 신이 나셨던 것이다. 엄마도 여자였던 것이다.

 

어머니 날이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어느덧 여든 중반에 들어섰다. 카톡 통화 한 번 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버튼을 잘못 눌러 얼굴이 안 보이거나 음성이 안 들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제 엄마랑 화상 통화 한 번 하려면, 본격적인 통화에 들어가기 전부터 에너지가 반은 없어진다.) 여든 중반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여전히 화장품과 옷과 가방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신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아들한테 가까이에 있는 큰 아들 흉을 볼 때면 사랑 받고 싶은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 엄마는, 나이를 많이 드셨어도, 여전히 여자다.

 

이제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돼서 한국의 어버이날을 자꾸 놓치게 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미국의 어머니 날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엄마에게 카톡 전화를 걸어, 엄마 얼굴 보며, 엄마의 볼에 뽀뽀해 드리며, ‘엄마, 사랑해라고 말씀드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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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