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7. 09:30

사막에 길을 내어라

(마가복음 1:1-8)

 

대림절(Advent)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마가복음인데,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이야기이다. 세례 요한이 자기의 사역을 시작하며 선포한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있는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의 세례 요한과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씀의 요지는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먼저 들어보자.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이사야 40:3-4)

 

사막에 길을 내어라.’ 성경의 언어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막상 깊이 묵상해보면 참 어렵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참으로 멋진 말이고 장엄한 말이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막상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사막에 길을 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오늘 이것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려 한다.

 

이사야서 40장은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로 시작한다. 북이스라엘은 BC 721년 쯤에, 남유다는 BC 586년 쯤에 망하고, 이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70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사야 40장은 제 2 이사야로 불리는 선지자의 예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을 때, 그들을 향해 선포된 예언의 말씀이다. 이사야는 구원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속박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은 정말 복음(기쁜 소식)’ 그 자체이다.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속박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 때에 백신개발완료소식이 들려오는 것과 같다. 바이러스의 전파가 최고점을 찍어 모든 경제와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전세계인들이 손해가 막심함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동을 자제하면서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곧 백신이 배포되면 모든 고통을 덜어내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속박에서 해방될 것을 믿는 소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막에 길을 내어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 길을 내면, 그 길을 통하여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로 와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한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통하는 길은 사막이다. 그들은 굽이굽이 사막 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강제이동을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들었을 때,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배경이 사막(광야)인 것은 같고, ‘그의 길을 예비하라는 메시지는 같으나, 세례 요한의 선포는 이사야의 선포보다 한층 더 영적이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한층 더 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세례 요한의 다음과 같은 선포 때문이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1:4/공동번역 개정판).

 

다시 말해, ‘사막에 길을 내어라고 했을 때,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의 질문 앞에서 세례 요한은 그 방법으로 회개, 세례, 죄 용서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선포가 좀 더 영적인 표현이지만, 사실, 이사야의 선포도 세례 요한의 선포와 다르지 않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에게도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그들이 진짜 사막에 가서 작업을 해서 사막에 길을 내라는 뜻이 아니라(그렇게 할 수도 없다. 포로들이 어떻게 자유롭게 나가서 작업을 하겠는가), 뭔가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방식은 영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영적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육체적이다).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과 우리에게 임하셔서 행하시는 구원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영적인 방식을 통해서 오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은 매우 육적(실제적)이라는 뜻이다. 이 둘의 긴장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한 방식은 영적이다. 이사야의 말처럼 문자적으로하나님이 사막에 난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당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게 그들에게 온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즉 영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오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심을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구원은 매우 육적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사막에 길을 내는 법이다. 물론, 세례 요한 당시의 이 선포는 영적이라기보다 매우 육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세례 요한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서의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영적임재를 성육신처럼 실제적으로 느끼고 신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바로, 사막에 길을 내는 일,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는 일, 이 불가능한 것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은 바로 기도로부터 시작한다.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은 이사야가 말하고 있듯이,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것과 같다. 골짜기, 산과 언덕, 절벽, 비탈진 곳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행위를 일컬어 세례 요한은 회개라고 부르고 있다. 회개와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회개가 기도고, 기도가 회개다. 사막에 길을 내는 행동은 회개다. , 기도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를 얼마나 오래하느냐, 또는 얼마나 깊게, 진지하게 하느냐는 나중 문제이고, 우리의 삶에 기도 행위 자체가 존재하느냐를 물어보자.

 

우리는 매일 같이 아우성치며 산다. 사는 게 힘들다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뭔가 모를 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힘듦과 답답한 삶을 놓아두고, 기도의 행위를 얼마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가. 내 삶이 그야말로 사막 같아, ‘골짜기와 산과 언덕, 그리고 절벽과 비탈진 산골길로 가득 찼음에도, 그것을 평지로 만들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러 오시게 만들어 주는, 사막에 길을 내는 기도를 얼마나 진지하게 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유튜브를 보지만, 기도하기 위해 촛불을 켜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은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이다. 그리고 나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를 받는 일은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계속 영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세례는 존재의 거듭남이다. 존재가 거듭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사야는 우리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40:6-7).

 

기도의 행위로 들어가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세례를 받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일쑤다. 바쁨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부추김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바쁘게 사는 이유는 세상의 유혹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은 인간을 과도하게 긍정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어!’ 마침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어서 우리는 그 세상 유혹에 금방 넘어가 나의 존재를 바쁨에 내어준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4:13). 이 말씀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채워주는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용한다.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사막에 길을 내는 행위, 다시 말해, 나에게 실제적인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이 겸손한 고백, 이 진실한 고백, 내 존재의 인식, 이것이 바로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일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기도의 행위를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한 인간은 이제 어떠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공동번역 개정판).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에는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를 보면, ‘헤세드라는 용어를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 지를 비교하고 있다.

 

이사야 40 6절 말씀은 이렇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 여기서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로 헤세드이다. 인간의 헤세드(아름다움, 사랑)는 꽃에 비유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인간의 헤세드는 꽃이 시듦과 같이 곧 시들고 만다. 이와 대조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이사야 40:8/개역개정). 꽃처럼 금방 시드는 인간의 헤세드와는 달리, 하나님의 헤세드(언약적 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영원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할 때영원히 선다(야쿰 레올람)’는 말의 뜻은 세상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다는 매우 정치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어떠한 권세(그것이 돈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영원하지 못하고,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구원자이시다.

 

대림절. 참 구원자이신 하나님, 어떠한 권세와도 견줄 수 없는 분이 오고 계신다. 그 분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방식(성육신)으로 오고 계신다. 그러니, 구원을 받고 자 하는 자는 그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은 매우 영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부활의 방식을 통하여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어떤 권세도 줄 수 없는 참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사막에 길을 내는 일에 나의 온 존재를 기울이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그렇다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은 사막에 길을 내어야 한다그래야 그 길을 통해 구원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오신다그래서 그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영적이어야 한다회개(기도)와 세례와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이다그러나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그러므로 구원 받기를 갈망하거든촛불부터 켜야 한다기도 행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어느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소망해야 한다주님께서 우리가 예비한 그 길을 통해 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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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