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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30. 15:46

거룩과 영광

(레위기 10:1-7)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실시한 직업만족도조사에서 목사가 3위를 기록했다.



판사가 1, 도선사가 2위를 차지했다. 3위인 목사에 이어, 대학교총장이 4, 전기감리기술자가 5, 초등학교 교장이 6, 한의사가 7, 8위가 교수, 원자력공학기술자가 9, 그리고 세무사가 10위를 차지했다.

 

평가 항목은 △발전 가능성, △급여만족도, △직업 지속성, △근무조건, △사회적 평판(자녀에게 직업을 권유), △수행직무만족도 였다고 한다. 사실, 이 뉴스를 접하고 걱정부터 든다.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직업만족도만 보고 목사 되기를 선택하게 될까 봐 서다. ‘직업만족도직업선호도는 다르다. 목사가 직업만족도에서는 수위를 차지했을 지 모르나, 목사는 여전히 선호 직업이 아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이발사 다음에 목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그만큼 목사는 직업 선호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직까지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과 같다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목회자들이 있지만, 목사가 구약의 제사장과 같다고 볼 수 없다. 왜 다른 지 모르는 목회자는 공부가 부족하거나,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하는 일이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의 제사장과 맞닿아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사장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목사가 되는 일이 그렇게 낭만적이거나 선호할 대상이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으로서 하기에 불가능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패러독스적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즘 목회자들에게는 설교가 굉장히 중요한 임무로 여겨지는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추앙되고 있는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설교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해야만 하는 숙명이 목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목사는 어쩌면 시시포스 신화의 주인공, 시시포스와 같은 운명에 처해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여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성별하여 세우라고 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성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운다. 성별 받아 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아론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따라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다. 레위기 9장은 아론의 첫 제사장 직무를 기록하고 있다.

 

아론의 첫 제사장 직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9장은 이렇게 끝난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더라”( 9:23-24).

 

그런데, 이어지는 10장의 이야기, 우리들이 오늘 함께 읽은 이야기에서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그 중에서 첫째와 둘째인 나답과 아비후가 대제사장 아론의 감독하에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한다. 게다가 이들은 모세와 아론을 따라 시내산에 올라갔던 인물들이다( 24). 그런데,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 그들의 실수는 이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1).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것 때문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이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분향한 것 때문이었다. 성경의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직업만족도 3라서 목사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를 죽음에 처하게 한 다른 불은 무엇일까?

 

다른 불에서 다른의 히브리어는 자르이다. 이는 이상한, 다른, 생소한, 낯선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 단어의 복수형인 자림이방인으로 번역된다. 영어로는 ‘strange, unauthorized, unholy’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다른 불하나님이 지정하시지 않은 불, 출처를 알 수 없는 불, 다른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로부터 온 불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을 그들(나답과 아비후)이 이렇게 다른 불을 가져다 분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안 나온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분향단 사건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이 있은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모세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9).

 

이러한 규례가 바로 언급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 데, 나답과 아비후는 회막에 들어갈 때 술 취한 상태였던 것 같다. 여기서 포도주나 독주(포도 외에 다른 것으로 담근 술)를 마신 것 자체가 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술 취한 것이 불러온 결과이다. 그들은 술 취한 것 때문에 자기들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이런 말이 있다. “의사가 통풍을 앓고, 공사 감독은 눈이 하나뿐이고, 변호사가 검사처럼 행동하는 지방에 사는 것은 불행하다.”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지 못하는 일은 불행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영광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3).

 

거룩과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존재 방식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거룩하게 경험하고 영광스럽게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지 못해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졌다. ,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과 영광은 구원론의 구약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광을 받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살아 있어라고 느끼게 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돈과 자식과 출세이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은 돈과 자식과 출세를 통해서 영광을 받을 때,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게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한다.

 

이것은 욥기서의 통찰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섬기는가?”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항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9-11).

 

사탄의 요지는 이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돈과 자식과 출세를 얻고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욥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의 돈과 자식과 출세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욥에게서 돈과 자식과 출세를 모두 걷어 가신다. 그런데, 욥이 그것 때문에 죽었는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종용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하고죽었는가?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돈과 자식과 출세를 다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1:21-22).

 

,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돈과 자식과 출세가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돈과 자식과 출세가 아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진실로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을 좇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에서 생각하는 영광, 생명을 얻기 위하여 돈과 자식과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면서, 참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돈과 자식과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말씀에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등장한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다. 그들의 가족들, 아버지 아론과 그들의 형제인 엘르아살과 이다말, 그리고 그들의 작은 아버지인 모세가 그들의 죽음을 직면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죽은 이들을 위하여 장례를 치르거나 가슴 아파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6).

 

리고,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7)”라고 하신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 머물라는 뜻과 같다. 무엇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가져다 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귀한 말씀이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토록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11:45).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 머물기 위하여,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나도 거룩하기 위하여 무슨 짓이든지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궁극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직업만족도 3이기 때문에 선택해야 할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될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은혜, 그리고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기꺼이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선택 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러니, 부디, 젊은이들은 세상이 말하는 직업만족도에 혹하여 목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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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