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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5. 04:27

한나의 아이

(사무엘상 3:1-9)


몇 년 전,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스탠리 하우어워즈 교수가 <한나의 아이>라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그 책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될 의도가 없었다”(한나의 아이, 19, IVP). 자신이 유명하게 될 것을 예측하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정말 유명해진 사람들은 그렇다. 유명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은 저렇게 겸손한 고백을 하지 못한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이 회고록을 쓴 이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이 회고록은 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나를 지금의 존재로 만들어 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를 지금의 내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내가 어떻게 결국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었는지 알아내려면 하나님이 그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를 말해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난다”(한나의 아이, p. 22., IVP).

 

어떤 존재가 되는 일은 참 쉽지 않다. 존재가 되려면 끊임 없이 자기 자신과 화해해야 하고, 다른 존재와 교류해야 하며,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용어를 써,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한나에게는 아이(아들)가 한 명 있었다. 쉽게 얻은 아들이 아니었다. 고대사회에서는 흔한 일이듯, 한나의 남편 엘가나에게는 또 한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자식의 존재 여부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던 고대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끊어진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그래서, 자식이 없던 한나는 매일 울었다.

 

한나는 아이가 너무 갖고 싶었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전(성막)에 가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했다. 그러면서 한나는 서원했다. 주여 만약 아들을 주시면 그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끈질긴 서원 기도 끝에 한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이를 얻고,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고, 서원한대로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은 아이라는 뜻이다.

 

한나는 서원한대로 아들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데려가 하나님께 드린 후, 이렇게 기도한다. 좀 길지만, 중요한 기도이므로, 전체를 읽어본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 놓으셨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주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삼상 2:1-10, 표준새번역)

 

어렵게 얻은 아들을 서원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나가 주저함 없이 자기의 아이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 고백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아이를 갖는 일로 죽도록 고생한 한나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이었다. 한나의 아이, 사무엘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한나가 자신의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이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만큼 경건하고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과 이어 나오는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는 말이 교차한다.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사무엘이 살던 시대는 사사시대 말기였다. 그때는 시대가 혼탁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말씀을 안 하시는 게 아니라,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하나님의 말씀이 잘 안 들린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한나의 아이였다. 오늘 말씀은 똑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온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실 때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말씀인지 모르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고, 엘리 제사장도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모르고 세 번이나 사무엘을 돌려보낸다.

 

같은 상황을 엘리와 사무엘 두 사람은 동시에 놓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엘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은 이유는 그의 영혼의 혼탁함 때문이다. 대세사장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엘리이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영성이 그에게는 없었다. 자녀들과 그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통해 엘리의 영성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전해준 하나님께 받은 이상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경멸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행실을 해서 제사장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나쁜 행실을 하면,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이게 정말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나쁜 행실을 하면서도, 자기가 그렇게 하는 줄 모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한다. 이 얼마나 모순이고 못된 욕심인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의 삶을 망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엘리 제사장이 죽게 된 연유가 그렇다. 이스라엘의 평생 숙적,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하기 위하여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온다. 그 일을 수행한 이들이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만 자신들 가운데 있으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전령을 통해 전해들은 엘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나쁜 행실을 하면 자기의 삶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위태롭게 한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이유는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그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 처음에 아이 사무엘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무엘을 아이라고 칭한 것은 사무엘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조선시대 때, 총각과 어른의 구분은 상투를 틀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랐다. 남자가 상투를 트는 때는 결혼할 때이다. 결혼하면 비로소 어른이 되어 상투를 틀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으면 어른으로서의 상투를 틀지 않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난 적이 없으면 영적인 아이이다. 영적인 아이에 머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는 <한나의 아이>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록에서 자신이 어떻게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돌아본다. 그는 자신이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한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아이로 머물러 있었겠지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이다. 사무엘은 한나의 아이였고, 세례 요한은 엘리사벳의 아이였고, 예수는 마리아의 아이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아이였던 사무엘, ‘요한, ‘예수가 누군가의 아이로 머물지 않고, 사무엘이 되고, 요한이 되고, 예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두 인생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아이 사무엘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나는 경험을 통해서 아이라는 딱지를 떼 내고, 사무엘로 우뚝 선다. 그 이후에 사무엘에게는 더 이상 아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그것을 통하여 성장하고, 자기 백성을 영도하는 사사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누구인가? 아직까지 누구의 아이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났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존중할 것이요, 바른 행실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사무엘의 엄마 한나가 기도를 통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는 것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한나의 아이는 성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성한 사무엘이 되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아직도 아이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인가?



기도문


주여,

한나의 아이 사무엘이 장성한 사무엘이 되어

주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선한 일꾼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신실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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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