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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1.04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
  3. 2018.01.04 예수 사건
  4. 2018.01.04 내가 살 집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52

행복하자

(요한 1 3:13-24)

송구영신예배


1938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어른의 성장에 관한 연구]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거의 80년 동안 진행된 이 연구에서 밝혀내고자 한 것은,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가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질 좋은 관계가 행복을 불러온다.”

 

이 연구를 지위하는 월딩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찾아낸 결론은, 자신의 인간관계에 제일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남들과 연결관계가 강한 사람,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 깊게 연결된 사람이 더더욱 오래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질 좋은 인간관계라는 개념에 대해 정의에 관해서도, 윌딩거 교수는 당신이 믿을 수 있으며, 당신이 당신다울 수 있는 인간관계가 그러하다.”고 말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당신이 비난받는 기분을 느끼지 않고, 당신이 언제든지, 상대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인간관계는, 가족이거나, 연인일 수도 있고, 친구와의 우정일 수도 있다.

 

그 프로젝트에서는 돈과 명예와 행복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는데, 결론적으로 돈과 명예는 일종의 장막이나 연막의 역할만 할 뿐 행복의 조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가 있으면 더 행복하거나 남들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거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에서 돈과 명예는 새로운 인간관계는 가져올지언정, 그들 중 대부분은 결코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위해 돈과 명예를 추구하지만, 그와 연결된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애정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사랑이 질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낸다. 도식은 이렇다. 사랑 à 질 좋은 관계 à 행복한 삶. 쉬워 보이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까? 질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연구에서 말하기를 질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실함과 친절함, 인내심, 그리고 친밀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영국인이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사랑하는 영국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이라는 소설이 있다.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예전 20대 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좀 지루했었다. 이 책의 원제목은 <첫인상>이었다. 한 남자(다시)와 한 여자(엘리자베스)가 서로가 서로에게 받은 첫인상 때문에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결국 서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여자는 남자가 오만하다고 생각했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편견을 가지고 본다고 생각했다. 오만과 편견은 서로에 대하여 오해를 갖게 만들고, 관계의 평행선을 긋게 만든다. 그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은 남자가 자신의 오만을 인정하고, 여자가 자신의 편견을 벗어던지기로 한 순간부터이다. 이 말은 이러한 것을 뜻한다.

 

편견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고전 결박을 풀다, 154)

 

질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첫 번째로 방해 요소가 되는 것은, 위의 소설이 말하고 있듯이, ‘오만과 편견이다. 오만은 내가 남보다 약간 잘난 요소가 있으면 남을 깔보는 것이다.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남자가 오만했던 이유는 남자는 귀족이었고, 여자는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편견은 자기와 다른 요소가 있으면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을 말한다.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편견을 가진 이유는 남자가 자신과 다른 신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오만과 편견을 발견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행복의 조건인 질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데 큰 해가 되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서라도 내 안에 있는 오만과 편견을 조금씩 깨 나가는 게 좋다.

 

오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은 정말 아름답다. 이보다 아름다운 말씀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 사랑하지 않으면, 죽은 자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얼마나 죽은 자처럼 사는가. 끔찍하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산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5).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살인자로, 흉악범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신앙과 정비례한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사랑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신앙이 좋다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주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 나는 이 말씀을 사모한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를 실천하기 위해서, 결혼 7년 주년 때, 꽃다발이나 선물대신 생명보험을 들어서 집사람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너무 좋아했다. 우리 집사람은 매일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정말 나를 사랑하면, 이불부터 개라고. 말과 혀로는 하늘의 별도 수백 개 따다 주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설거지 한 번 안 하는 게 남편들의 형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꿈꾼다. 한국에 자이언티라는 가수가 있다. 목사님 아들이다. Zion은 시온을 말하고, T는 십자가를 가리킨다. 자이언티는 시온(예루살렘, 골고다)의 십자가라는 뜻이다. 목사님 아들답게 이름도 복음적이다. 어머니가 목사이고, 아버지는 택시기사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양화대교>라는 노래가 있다. 정말 유명한 노래이다. 가사가 이렇다.

 

[Verse 1]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Verse 2]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엄마 아빠 두 누나

나는 막둥이, 귀염둥이

그 날의 나를 기억하네

기억하네

 

[Hook 1]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Verse 3]

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

"엄마 백원만" 했었는데

우리 엄마 아빠, 또 강아지도

이젠 나를 바라보네

전화가 오네, 내 어머니네

뚜루루루 "아들 잘 지내니?"

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

나 양화대교 "양화대교"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행복하자.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버드 프로젝트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일서의 말씀이나,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라.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시 십자가에서 예수를 이렇게 표현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괴로웠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이고, 예수가 행복했던 이유는 그가 모든 인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 사랑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인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명령)이다.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계명이라는 뜻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뜻이다.

 

이 도식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 à 질 좋은 관계 à 행복한 삶. 나는 새로운 해를 맞아 여러분과 하나님 앞에서 선언한다. 나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힘써 지킬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행복한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계명, 사랑하는 일을 성실히 행하는 자에게, 행복의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는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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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51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

(누가복음 2:20-40)


마지막 주일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주일과 마지막 날이 겹쳤다. 달력은 마지막 날을 가리키지만, 교회력은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라는 뜻은, 우리는 아직도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성탄절은 25일 하루만 지키고 마는 행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에 새겨진 도장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언젠가부터 성탄절이 되면 한국에서는 타종교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거는 현상이 생겼다. 그리스도인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쓴다. 그러면서, “예수님, 생일 축하해요.”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이것은 성탄절에 대한 명백한 오해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기독교인들이 1225일을 성탄절(Christmas)’로 지키는 이유는 그날 예수님이 탄생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다른 전통에 서 있는 동방정교회 같은 경우는 1225일이 아니라, 16일이 성탄절이다. 우리가 쓰는 달력은 1582년 그레고리오 교황이 만든 그레고리 달력이다.

 

로마제국의 전통을 계승한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쓰는 달력과 비잔틴 전통을 이은 동방정교회가 쓰는 달력은 다르다. 전통에 따라 계산법이 달라,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12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지만, 동방정교회는 1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다. 우리는 성탄절을 이미 보냈지만, 동방정교회 입장에서는 아직 성탄절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날짜를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교회의 전통마다 성탄절의 날짜가 다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성탄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부터 성탄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진 (바울) 서신서에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서신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죽음)와 부활, 그리고 재림이다. 이 말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자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실제 육신을 가진 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잠시 이 땅에 왔다 하늘로 다시 올라간 존재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 전통 교리로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육신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이것을 부정하면,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다.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성육신을 부정했다. ‘성탄절 이야기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대응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입장에서, 타종교가 성탄절에 내거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는 복음의 왜곡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여느 인간이 탄생한 것처럼 축하 받을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 없이 예수님의 탄생 축하운운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신성모독이다. (물론 그러한 일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오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구약에 제시된 제사법을 잘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팔일 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남자) 자식과 동물의 첫 수컷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대속이 필요했다 (13:2, 11-15, 8:16-17).

 

그러한 의식의 역사적, 신학적 근거는 출애굽 사건 때 일어난 유월절 사건이다. 출애굽 당시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사람이나 짐승의 장자(첫 새끼)를 죽이는 재앙이었는데, 유월절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와 첫 새끼들은 모두 구원 받는다.

 

그리고, 또 하나 등장하는 의식은 정결예식이다. 정결예식은 레위기 12장에 나오는데, 모든 산모는 아이를 낳은 후 산혈로부터 깨끗해지지 않으면 성전에 접근하거나 성물에 접촉할 수 없다. 산모는 일정 기간이 지나 성막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1년된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은 형편이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에는 할례와 정결예식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으로 나온다. 특별히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드리기 위해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대로 성전에서 할례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다. 그런데,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27). ‘성경의 감동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선 아기 예수는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한 명은 시므온이고, 다른 한 명은 안나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마침 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간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경은 시므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1) 그는 의롭고 경건했다. 2)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3) 성령께서 그 위에 계셨다. 한 마디로, 시므온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성숙한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을 유지한 신앙인이었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71월호, 262)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이렇게 찬송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시는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이 말씀은 내가 성찬식 후에 기도드릴 때 사용하는 기도문 문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구원을 눈으로 본다.)

 

그리고, 이어서 아기 예수를 알아본 두 번째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안나다. 안나는 시므온과 다른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안나는 여자 선지자였고, 아셀 지파 출신이고, 나이가 많았다.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 과부가 된 지 84년이 되었거나, 나이가 84세이다. 어느 것이든, 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나이다.) 그리고 안나는 성전에 머물면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한 안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한다.” 안나는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서 아기 예수와 조우한 시므온과 안나의 입술을 통해서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신앙고백을 한다. ‘아기 예수는 모든 이를 속량할 구원자, 즉 메시아이시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는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였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누구로 만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엇, 또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슨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들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세계의 수도 The Capital of the World>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거기에 보면, 탕자처럼 집 나간 아들과 그를 애타게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을 찾을 수 없자, 아버지는 신문에 한 줄 광고를 낸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아버지는 신문광고대로 아들이 몬타나 호텔에 나와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갔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호텔 앞에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800명의 청년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에서 파코는 매우 흔한 이름이다. 그 광고를 보고 800명이나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위로받고 평안 가운데 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용서 받고, 화해하고, 위로 받고, 평안 가운데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파코이다. 시므온과 안나도 그랬다. 그런데, 그들은 일생이 다 가도록, 그 어느 것에서 참된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인내하며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약속대로 죽기 전에 하나님의 위로(구원)’를 만났다. 그 위로(구원)는 바로, 아기 예수였다. 참된 위로와 구원을 만난 시므온은 마침내 평안 가운데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 그리고 안나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만난 뒤, 그 위로와 평안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전한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탄절기를 보낸다. 성탄절기, 그리고 성탄절기가 자리잡고 있는 연말에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의 감정을 뒤섞어, 먹고 마시며 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의 삶에 대해서 묵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의롭고 경건하게,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았던 시므온.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던 안나. 그들의 신앙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 신앙인지 돌아보야 한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그리고 안나처럼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이 여느 한 인간의 축하 받아야 할 탄생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선,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위로와 구원의 성취라는 것을 깨달아, 우리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살든지 죽든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의 신앙으로 함께 고백해 보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아멘.

 


기도문

 

주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탄절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시므온과 안나의 경건한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을 본 받아,

우리도 그들처럼 이렇게 신앙고백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구원을 기다리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안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위로와 구원을

세상에 전하며 사는

신실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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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45

예수 사건

(마태복음 1:18-25)

 

사건은 시간 속에 일어난 일을 말한다. 사건은 시간에 몸 담고 있는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사건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과 사건이 벌어진 후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사람은 특히 사건을 통해 인생이 바뀐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만약 예수의 탄생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면, 복음서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서 전하는 바울 서신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거기에는 모두 예수의 십자가(죽음)와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에 대한 이야기만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그의 탄생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누군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누군가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소?’라고 물으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사람들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탄생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의 업적과 죽음을 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탄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예수의 탄생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삽입된다. 보통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과는 다르다. 보통은 남녀가 결혼하여 동침을 해서 생명을 잉태하게 되지만, 예수는 남녀의 동침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성경의 내용 중 가장 곤혹스러운 내용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과학시대에 이러한 이야기는 잘못 얘기했다가는 사기꾼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존재는 성령이다. 주의 사자(천사)가 요셉의 꿈에 현몽하여 이렇게 말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사람이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지극하신 역사라는 뜻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리고 부활할 때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늘 말씀은예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 가지를 말해 준다. 첫째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예수아(죠쉬아), 즉 여호수아와 뜻이 같다. ‘여호와(하나님)는 구원이시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다시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에서도 계속 들려지는 이야기다. 특별히, 출애굽 사건은 그것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기 위함이 제시된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선포한다. 성경의 죄는 실정법적인 죄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죄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해지는 죄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신데,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뜻은 우리가 생명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뜻이다. 지금도 우리는 생명에서 멀어져, 죽음의 일만 하며 산다.

 

구원이란, 죽음의 일을 하는 나쁜 놈이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의 도덕적 상태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천국으로 옮겨준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이란 죽음의 일을 하던 존재가 생명의 일을 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어떻게?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존재와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삶과 일치된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처럼 십자가를 질뿐 아니라, 예수처럼 죽게 되고, 예수처럼 부활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고난을 받으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처럼 한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아,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생명이란 원래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생명 사건이란 없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하는 것처럼, 자판기에서 뽑는 것처럼,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봄부터 울어 댄다.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국화꽃은 핀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렇게 조바심 낼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인내이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가장 마지막에 인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인내)는 지루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셋째로, 예수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누가 나와 함께 하는지를 아는 것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진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하셨다. 그가 죽을 때만 아니라, 그가 태어날 때도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하셨다. 예수 사건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알려준다. 아무리 어두운 인생의 터널을 지날 지라도 두려워하지 말 것은, 다윗이 고백한 대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의 삶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은 사건이다. 그 사건을 경험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으로 인도되었음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참된 평안이 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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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35

내가 살 집

(삼하 7:1-12)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사랑은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인의 마음 같다. 어떤 대상에 대한 열망과 사모는 아름다움을 낳는다.

 

본문 앞 이야기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이야기이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춤추며 찬양했다. 이 일을 두고 다윗의 부인 미갈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 일로 인해 미갈은 평생 자식을 갖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내는 일은 귀한 일이다. 그러한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면 안된다. 미갈이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춤추며 찬양했다면 미갈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아마도, 미갈에게서 난 자식이 다윗을 이어 왕위를 굳건하게 이어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윗의 열심에 대한 미갈의 비웃음 때문이었다. 안타깝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 공간적 배경은 예루살렘이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었다는 뜻이다. 참 감격스러운 말이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든 적이 있었는가?

 

지금도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못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유엔 회원국들이 모여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지위 결정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며 찬반 투표를 했고, 압도적인 표차이로,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을 거부했다. 향후 국제정세가 어떻게 될지, 우려된다.

 

예루살렘의 지위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보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영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된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예루살렘은 고대로부터 누구나 탐내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곳을 놓아두고 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 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오랜 세월동안 예루살렘은 주인 없는 땅이었다.

 

지금까지도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뜻)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세운 장본인이 바로 다윗이다.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때 다윗은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렸으면 좋겠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한 이유는 양심의 가책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여전히 장막(텐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 나단을 불러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를 보면, 다윗의 생각이 그렇게 좋은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우선, 이런 질문부터 해보자. 하나님께 집이 필요한가? 많은 사람들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교회당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편재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편재성이란, 하나님은 어디에든 임재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전, 또는 교회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두어 놓으면, 사람들은 성전, 또는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섬길 뿐, 그 바깥 삶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놓고,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러한 잘못과 착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표적인 예를 아모스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5:21-23).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며 여호와께 집을 지어드려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되물으신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 만약 하나님이 다윗의 계획을 긍정하셨다면, 이렇게 되묻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저 다윗이 계획을 칭찬하셨을 것이다. “아이고, 고맙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던 날부터 이제까지 건축된 성전에 거하지 않고 장막과 성막 안에 거했던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느 지파에게도 자신을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다윗 같은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지금 본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윗이 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부담감 또는 자책감, 그리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집을 짓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사무엘하 7장은 소위, 다윗 언약이 세워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언약에 대한 신탁을 내리시는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다윗의 집, 다윗의 나라, 그리고 다윗의 왕위에 대한 약속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가지를 영원히 보전하시고, 영원히 견고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다윗 언약이 중요한 이유는 이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림절 네번째 주일을 맞아, 사무엘하의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말씀은 누가복음이다. 누가복음 1장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리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0-33).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을 지어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어주시는 집은 이런 집이다.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삼하 7:11). 이러한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었더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으면, 그곳에서 평안히 쉬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견고한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다윗에게 주신 약속,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는데, 그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은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집에 살고 있는가? 내가 사는 집은 내가 내 힘으로 지은 백향목 집이 아니라, 내가 살 집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영원하고 견고한 집이다. 내가 살 집은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지 못하는 곳이다.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우리의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평안히 쉴 집을 건축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하고 견고한 집을 받아들자. 우리 모두 그 집에서 평화롭게 영원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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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