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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8. 09:41

나실인 삼손

(사사기 16:23-31)

 

성경이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다른 점은 이야기(narrative)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한데, 진리는 진술되기보다 이야기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진리는 정의할 수 없다. 진리는 그저 이야기 될 뿐이다.

 

성경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 중에서 단연 삼손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아마도, 성경의 이야기 중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이야기를 둘만 꼽으라고 하면, 삼손과 솔로몬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삼손은 힘을 상징하고, 솔로몬은 지혜를 상징한다. 힘과 지혜를 상징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이유는 그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투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힘과 지혜를 원한다. 왜 일까?

 

이 세상은 경쟁사회이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과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된 사회진화론 (허버트 스펜서)에서는 결국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고 한다. ‘적자생존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힘과 지혜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삼손의 힘과 솔로몬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손 이야기와 솔로몬 이야기에 열광한다.

 

보통 사람들은 삼손 이야기와 솔로몬 이야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성경을 읽으며 삼손과 솔로몬에게 주어졌던 힘과 지혜가 자신들에게도 주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삼손에게 주셨던 힘과 솔로몬에게 허락하신 지혜를 주시옵소서!”

 

본문에 등장하는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신을 섬겼다. 다곤은 히브리어의 물고기뜻하는 다가또는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왔다고 여겨지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물고기 모습을 하고 있는 다곤신이 풍요와 생산을 주관한다고 믿었다.

 

삼손 이야기와 솔로몬 이야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삼손과 솔로몬에게 주어졌던 힘과 지혜를 간구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풍요와 생산의 신이라고 믿었던 다곤신을 섬기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상숭배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사람은 하나님마저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는다.

 

삼손은 나실인이었다. 나실인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사람이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가정에 자식이 생길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그런데, 그 자식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바쳐진) 사람으로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하는 나실인이었다 (13).

 

나실인으로서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20년간 지낸다. 사사가 곧 나실인은 아니다. 사사는 삼손의 이었고, ‘나실인은 삼손의 이었다. ‘은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고, ‘소명이나 사명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직업이라는 말은 소명이나 사명을 어떠한 기능을 통해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은 내적인 일이고, ‘은 외적인 일이다. 이 두 개의 일이 잘 조화되어야 아름답다.

 

나실인으로서 삼손은 외적인 에 대한 일을 비교적 잘 감당했다. 그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었으므로, 숙적 블레셋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사람들을 많이 물리쳤다. 그가 나귀 턱 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을 천 명을 죽인 일은 그가 얼마나 힘이 장사고 얼마나 블레셋에게 큰 위협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의 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여호와의 사자가 전해준 것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으로서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은 다른 말로하자면, 그의 마음이 다른 것에 빼앗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향하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것이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삼손의 이었다. 그런데, 삼손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해내지 못한다. 삼손이 사사로 세워진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부정한 블레셋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삼손의 인생을 보면, 그는 처음부터 부정한 것에 마음을 두었다. 그는 블레셋 도시 중 하나인 딤나에 가서 부인을 얻는다.

 

그 일을 놓아두고 삼손의 부모는 삼손을 만류한다.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이하려 하느냐”(14:3).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삼손은 할례 받지 아니한즉 부정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 했다.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이 꼬여가며 부지중에 블레셋 사람들을 여럿 무찌르지만, 그것은 나실인과 사사로서의 소명 가운데 일어난 일이기보다는 그런 와중에도 삼손을 들어 쓰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14:4).

 

하나님이 금지하신 일을 기어코 하려고 하는 삼손의 인생은 점점 꼬여갔다. 첫 결혼 시도를 실패로 끝낸 삼손은 계속하여 부정한 것과 관계를 맺는다. 삼손은 결국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문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삼손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부정한 것과 관계를 맺는 일은 겉으로는 즐거워 보여도 속으로는 패망의 지름길이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어야 하는 나실인삼손은 결국 부정한 여인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것 자체가 실패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나실인삼손의 인생은 그때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블레셋 방백과 들릴라의 꾀에 넘어간 삼손은 자신의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비밀을 누설하게 되고, 그 대가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셰익스피어의 극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 왕자는 죽느냐 사는냐 (To be, or not to be),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고 죽기로 각오한다. 그래서 <햄릿><오셀로>, <리어왕>, <맥베스>와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의 작품으로 불린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성경의 삼손 이야기도 비극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영이 임하는 은총을 받고 태어난 삼손이었지만, 그 특별한 은총이 무색할 정도로 삼손의 최후는 초라했다. 그는 두 눈이 뽑혀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블레셋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블레셋의 다곤 신보다 열등한 신으로 만들었다.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큰 잔치를 벌인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24). 이 말은 이런 뜻이다.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보다 힘 세고 더 위대하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불러 자기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한 것은 단순히 삼손을 욕보인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도 삼손은 여전히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한다. 블레셋에게 조롱거리가 된 삼손은 마지막 힘을 다해 원수를 갚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건물의 기둥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한 뒤,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28).

 

그리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고 외친 뒤, 기둥을 무너뜨려 다곤 신전을 주저앉게 만들고, 그 곳에 있던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마감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평가한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아 있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30).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삼손의 인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라고 말한다. 삼손은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평가라는 것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310월 호, 93) 햄릿이 비극인 이유는 그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죽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삼손도 마찬가지다. 그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고 죽는다.


삼손은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그가 하나님께 마지막 힘을 간구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의 눈을 뺀 블레셋에게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삼손 이야기의 진짜 비극은 이것이다. 그는 나실인으로서의 업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삼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삼손이 살던 사사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전히 삼손의 힘과 솔로몬의 지혜만을 간구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면서 산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살려 하기 보다는 힘과 지혜를 소유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한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에 집중하면서 사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힘과 지혜가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삼손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슬프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31).

 

'소라와 에스다올은 삼손의 인생에 있어 특별한 공간적 배경을 지닌 곳이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13:24-25).

 

나실인 삼손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 시작한 곳이 소라와 에스다올사이였다. 하나님은 그를 처음 부르셨던 곳으로 다시 불러 들이신다. 그리고, 그곳에 먼저 장사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눕게 하신다.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었던 나실인 삼손은 사는 동안 하나님께 구별된 인생을 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여전히 구별하셔서 처음 부르신 곳으로 불러 그의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눕게 하신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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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