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1'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1.11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
  2. 2018.01.11 내 삶의 여리고성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1. 01:38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

(에스라 8:15-20)

 

오늘은 주현절이다. 공현절이라고도 한다. 교회력은 주현절을 지키며,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를 묵상한다. 하나는 동방박사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이다. 주현절(Epiphany) 또는 공현절은 예수의 신분(정체)이 세상에 공적(public)으로 드러난 것을 기념한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때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헤롯대왕을 찾아가 유대인의 왕,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을 물었다. 그 일로 인해 유대 땅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그 소란을 성경은 이렇게 전한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2:16).

 

위의 일이 있은 후 오랫동안 예수님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다가, 세례 요한이 등장한 후 예수님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 일은 바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이야기이다.

 

공현’, 즉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동방박사 이야기나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이 세상에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위험한 일이 닥쳤다.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애굽으로 몸을 피신해야 했고, 세례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며 그 시험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대한 위험성을 잘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감추는 일에 더 신경을 쓴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기술보다는 자기 자신을 숨기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성형수술과 소셜 미디어가 대표적이다. 성형수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숨기는 기술이다. 오래 전, 김아중이 주연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보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 때문에 힘든 일을 겪자 성형수술을 감행하는데, 그 이후 예뻐진 주인공은 예쁜 외모 뒤에 숨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좌충우돌한다.

 

셜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최근 페이스북이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숨긴다. 거기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실제 삶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행복을 연출할 수 있고, 자신의 이력이나 관심사를 조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고 자기 자신과 비교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 실망한다. 심지어, 남과의 비교 때문에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드러내는 일도 위험하지만, 자기 자신을 숨기는 일도 위험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숨기 일은 위험한 것을 넘어서 비겁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 그리고 타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않는 것만큼 위험하고 비겁한 일이 어디 있나.

 

공현은 자기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이다. 연예인처럼 유명해지는 것과 자기를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완전 다른 일이다. 유명한 연애인도 자기 자신을 감추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의 공현(주현절)은 자기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드러낸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의 죄악과 싸우며, 자기를 드려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공현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그러한 인생을 살기로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자리가 바로 세례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어 자기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지며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정의롭고 생동감이 넘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에클레시아)세상으로부터 불러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세상은 어둠으로 묘사된다. ‘어둡다는 것은 감춘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감출 때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를 빛으로 불러내신다. 하나님에 의해 어둠 속에서 불러내짐을 받고, 이제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빛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감추지 못한다. 아니, 감추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질 줄 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에스라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바벨론이라고 하는 어둠 속에서 부름을 받고 빛 가운데로 나와서 자기의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에스라는 두 번째 포로귀환을 이끈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오늘 이야기는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의 이야기인데, 이는 BC 458년을 말한다. 첫 번째 포로귀환은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BC 538년에 있었는데, 그때 포로귀환을 이끈 인물은 스룹바벨이었다. 2차 포로귀환은 1차 포로귀환이 있은 후, 80년 정도 뒤에 일어난 일이다.

 

80년이라는 세월은 적지 않은 세월이다. 3세대가 지난 세월이다. 3세대 정도면 아무리 포로로 잡혀갔더라도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도 남을 기간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2세대인 우리의 자녀들도 한국에 가서 살라고 하면 한국에 가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에스라가 이끄는 제 2차 포로귀한 멤버들은 이미 바벨론 땅에 정착해서 살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부르심과 소망은 단 하나였다.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의 회복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거기에 성전을 다시 지어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한 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사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하나님과의 언약대로 든든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다.

 

에스라는 이 비전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든든한 신앙 공동체를 함께 세울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에스라와 귀환공동체는 아하와 강가에서 삼일 머물면서 일행을 점검한다. 그런데, 에스라는 귀환공동체 가운데 레위인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이 귀환하는 이유는 든든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인데, 제사를 드리며 율법을 가르치는 사명을 맡은 레위인들이 없다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형국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감춘 레위인들을 본다. 레위인들이 귀환 행렬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예루살렘 귀환 시 자신들에게 부과될 과중한 사역의 염려 때문이었다.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이미 정착해서 잘 살고 있는데, 아무리 그곳이 고향이라고 하더라도,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래서, 에스라는 귀환공동체 중 학식 있는 사람들을 불러 바벨론 내의 유대인 정착촌인 가시뱌 지방의 족장 잇도에게 보내 예루살렘에서 봉사할 성전 종사자들을 모아 줄 것을 부탁한다. 에스라에게 파송을 받은 명철한 사람(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과 가시뱌 지방의 족장 잇도는 분명 레위인들에게 말씀에 근거한 비전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전에 마음이 움직인 레위인들은 모두 39명이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레위인들을 따라 나선 220명의 성전 수종자들을 보게 된다. 성경은 그들을 일컬어, ‘느디님이라고 부른다. ‘느디님은 누구일까? 역대상 9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그들의 땅 안에 있는 성읍에 처음으로 거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대상 9:2). 그리고 느헤미야 7장은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를 재건한 사람들 중 느디딤 사람들의 족보를 적고 있다.

 

느디님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그 뜻을 직역하면, ‘주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노예들이었다. 민수기(31:30)에 보면, 전쟁포로의 일부를 레위인들에게 주어 그들의 성전봉사를 돕게 한 일이 있다. 그들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지만, 포로나 노예로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되었고, 특별히 레위인들에게 귀속되어 성전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의 운명은 레위인들의 손에 달린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그곳의 포로로 끌려갔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느디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레위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얼마든지 자신들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레위인들과 함께 성전 봉사하는 일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레위인들과 함께 성전의 일을 감당하면서 느디님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를 가졌다. 포로로서, 노예로서 처음에는 자기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잘 몰랐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편 34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시편의 말씀처럼,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 피한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해를 맞아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든든히 세워 나가고자 한다. 2018,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은 에스라 817절의 말씀이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오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에 응답한 사람들의 숫자가, 레위인들 39명과 느디님 사람들 220, 도합 259명이었다. 거기에 더해,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에스라 8장의 전반부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가서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제사장과 다윗 자손(왕족)12족장의 자손들의 숫자를 보면, 1,514명이다. 거기에 그들의 부인들과 자녀들까지 합하면,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하여 이미 정착한 바벨론의 삶을 뿌리치고 따라나선 사람들의 숫자가 5,000명가량 된다.

 

이들은 바벨론 제국이 주는 안락한 삶에 머물며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에스라를 따라 나섰다. 제사장들이나, 다윗 자손(왕족), 12족장의 자손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전에는 전혀 존재감이 었었던 느디님 사람들,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벨론을 떠나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기 위해 떠난 이유는 단 하나이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다 안 사람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 품에서 살기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상에 숨어 있지 않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어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 있는 자로 살아간다.

 

우리도, 2018년도를 기점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자를 데리고 오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를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을 에스라 프로젝트라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벽과 성전을 다시 세운 자들의 이름이 에스라와 느혜미야에 당당하게 기록된 것을 본다. 거기에는 전혀 존재감 없었던 느디님 사람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라합과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기록된 것과 같은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이미 교회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실로공현한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우리 인생과 이 세상에 책임 있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 자기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어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세화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될 줄로 믿는다. 아멘.

 


기도문

 

주님, 우리는 동방박사를 통하여,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이 세상에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신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합니다.

세상에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한 일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고

자기의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여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하겠사오니,

우리를 들어 쓰셔서 주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시옵소서.

자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어

십자가 위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나의 아이  (0) 2018.01.15
도피성의 사회학  (1) 2018.01.13
내 삶의 여리고성  (0) 2018.01.11
행복하자  (0) 2018.01.04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  (0) 2018.01.0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1. 01:34

내 삶의 여리고성

(여호수아 6:15-27)

 

유명한 여리고 성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 최고(最古)의 성이었다. 가장 오래된 성이었다. 그 성이 무너졌다. 엄청난 일이다.

 

첫 번째 질문: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 산 자는 누구입니까?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17)

è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살았다.

 

두 번째 질문: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에 사용된 도구는 무엇입니까?

이에 백성이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패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20).

è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맞춰 소리지르다! (말씀에 맞춰 행했을 때)

 

세 번째 질문: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26).

è 저주를 받을 것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을 것 자손이 중요한 시절에 자손을 잃는 것, 모든 것을 잃는 것)

è 열왕기상 1634절에 보면 (누가 찾아서 읽어보시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리고 성을 재건하려 했던 인물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히엘이었다. 히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이름을 가진 자가,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살았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여리고 성에 대하여 말해보자. 최고로 오래된 것 오래된 나쁜 습관, 오래된 불순종.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성이 무너지면, 우리의 삶이 무너질까봐.

 

그러나, 그러한 걱정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위의 히엘처럼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도 우리의 삶은 안전하다. 죽지 않는다. 구원 받는다. 더 잘 된다.

 

우리는 그것을 라합에게서 본다. 라합이 구원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면서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했던 히엘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사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내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면, 구원 받는다. 우리의 영혼과 몸을 서서히 죽이는 오랜 나쁜 습관이나 오래된 불순종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방법도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안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인간적인 결심으로 한다. “그래, 올 해부터는 이거 안 할거야. 또는 그래, 올 해부터는 이거 할거야.”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러한 결심들이 희미해지고, 여리고 성이 내 안에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 절망만 깊어질 뿐이다. ‘나는 역시 안 돼.’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사용한 도구는 결심이 아니라, 말씀과 순종이다. 그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지이렇게 결심하고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 말씀에 순종해서, 엿새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조용히 돌고, 마지막 칠일 째는 일곱바퀴 돌면서, 마지막에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맞춰 함성을 질렀다.

 

내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만나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그 성을 어떻게 무너뜨릴 지 몰라,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또는 그들의 계략과 힘으로 무너뜨리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 성이었던, 아이 성 사건에서 드러나는 일이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만나고, 그 말씀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아이 성을 무너뜨리러 나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만나고 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나갔다가, 엄청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나가서 아이성을 무너뜨리는 것을 본다.

 

내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나 있다.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열망은 있으되,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은 없지 않은가.

 

새해 첫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올 한 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바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라합처럼 구원 받지 못할 뿐더러,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는커녕, 아이성처럼 도리어 나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이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열망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더 간절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면,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삶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피성의 사회학  (1) 2018.01.13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  (0) 2018.01.11
행복하자  (0) 2018.01.04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  (0) 2018.01.04
예수 사건  (0) 2018.01.04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