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6. 08:22

아침묵상 시편 35편 - 영혼을 괴롭게 하기

https://youtu.be/oDC7XW2hh4E


오늘은 시편 35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성경의 시편은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죠. 그 중에서 1권은 시편 1편에서 41편까지 인데요, 대부분 다윗의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다윗이 겪은 구체적 사건이 표제로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다윗의 시로만 표기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데요, 다윗의 시편은 사무엘상하에 걸쳐 전개되는 다윗 이야기와 오버랩시켜 읽으면 더 생생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35편은 다윗의 이야기 중, 사무엘하 16장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종 시바 이야기와 엮어서 읽으면 풍성한 영감을 얻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죠. 그의 인생에는 비극이 많았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은 셋째 아들 압살롬과 사이에서 생긴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고 한 사건이죠. 흔히 이것을 역모라 하는데, 역모가 아들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서 참 슬픈 일이죠. 그리고 그 역모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하여,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공격을 피해 피난을 떠나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다윗은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급히 피난을 떠납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 왕이 아들 때문에 초라해진 상태입니다. 그러던 중에,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다윗 왕을 찾아옵니다.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 그리고 여름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삼하 16:1)를 가지고 다윗 왕 일행을 맞이 합니다.

 

푸짐한 음식을 대동하여 자신 앞에 나타난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마주한 다윗은 시바에게 이것을 가지고 자신 앞에 나타난 저의를 묻습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그러자 시바는 그 저의를 말하지 않고, 아주 상투적인 대답을 합니다.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삼하 16:2).

 

그러자, 다윗은 다르게 질문합니다.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삼하 16:3). 여기서 네 주인은 사울 왕을 가리키고, ‘주인의 아들므비보셋을 가리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 왕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죠.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죠. 사울 왕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마지막 최후를 맞이했을 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벳은 이제 겨우 5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 였습니다. 그 이후, 사울 왕의 죽음으로 사울 왕가가 멸망하고, 그 남은 식솔들이 다급하게 왕궁을 빠져나갈 때 유모가 그만 어린 므비보셋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는 평생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참 가슴 아픈 얘기죠.

 

다윗은 사울 왕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사울 왕가에 자비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 재산을 돌려주고,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에 들인 후,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합니다. 요나단이 죽기 전, 다윗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난길에 자신을 알현하러 온 시바에게 다윗이 네 주인이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너의 주인,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시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삼하 16:3). 시바의 대답에 의하면, 다윗의 선대를 받아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산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배신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바의 말을 듣고, 자신의 피난길을 도운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하사합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한 광경이죠.

 

바로 이 정황이, 시편 35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5절까지의 구절이 그것입니다.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같이 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하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다윗은 과거에 그들이 병들고, 아픔을 당했을 때에, 그들을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했고, 그들을 친구나 형제처럼 대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함께 슬퍼했다고 말하고요. 그런데, 이제 다윗의 실패를 보며 그들은 한 통속을 이루어 기뻐하고, 은밀히 자신을 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고 토로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공격을 피해 피난길을 떠날 때, 다윗이 겪은 수모를 생생하게 기록한 것 같은 생각을 너무도 명백하게 들게 만드는 진술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나의 부류는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의 부류는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죠. 위에 전개된 이야기를 보면, 므비보셋은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인 것 같고, 다윗은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인 것이죠.

 

그런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엘하에서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시바가 다윗에게 고했듯이, 므비보셋이 그렇게 다윗을 배신한 게 아닌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죠. 이 사건은 불의한 시바가 정치적 계산에 의해 다윗을 선대했고, 그 일 덕분에 불의한 시바는 다윗의 의로움으로 인해 큰 재산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다윗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고, 므비보셋은 참수당하지 않았으며, 시바는 쫓겨나지 않고 재산을 가지게 됐죠.

우리는 시편 35편을 읽으며, 아주 쉽게, 시인에게 감정을 이입을 하여, 자신이 시인의 입장인 양,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곤 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은 시인처럼 의로운 사람이 되고, 자신을 괴롭히는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악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읽기를 아전인수격 성경읽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말씀을 지극히 사사롭게 유용하는 것이죠.

 

시편 35편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시인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읽어버리고 말면, 우리는 오히려 시편 35편에서 시인이 고발하고 있는 악인이 되고 맙니다. 시인이 말하는 악인은 이런 사람인데요, “다른 사람의 고통과 고난을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뽐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약 시인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시편 35편을 읽어버리고 말면, 우리는 우리의 대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기뻐할 것이고, 자신이 그들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양, 자기 자신을 뽐내게 될 것입니다.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보다 우리는 시편 35편을 통해서, 시인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13절에서 내 영혼을 괴롭게 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이는 케노시스의 영성을 간직한 것이지요.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읍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한없이 가난하게 만드는 일이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원수를 갚아 주셨을 때, 악인의 추락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 기도는 정의를 이루는 것이지, 자기 만족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정의는 신비한 것입니다. 원수 갚음으로 인해 내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 정의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일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해지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의 자기만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억울한 일을 당한 우리가 진실로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해지는 법을 배우며, 신비한 방식으로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께 나의 억울함을 온전히 맡기는 법을 배워야겠죠. 그럴 때, 위에서 말한 다윗, 므비보셋, 그리고 시바에게서처럼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평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해지는 영성을 가지는, 겸손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