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1. 7. 14. 07:52

[대면예배와 성찬식이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조르조 아감벤의 <얼굴 없는 인간>은 팬데믹 시대의 생명정치를 그가 그동안 주장해 왔던 '예외상태'의 개념을 통해 짚어보는 책이다. 이 책에서 아감벤은 팬데믹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통치자들이 자신의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제도적 권력의 정당성'을 갈구했던 권력자들은 영구적 긴급 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팬데믹 상황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아감벤이 던지는 도전이다.

 

"기술-보건적 독재주의"를 그대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아감벤의 충고 앞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펼쳐 나가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나는 대면예배와 성만찬이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팬데믹 임에도 불구하고 '접속'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시키는 '접속'일 뿐, 사람과 사람 사이의 풍성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접속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접속되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가지고, 팬데믹 이후 우리는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최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교회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예배 논쟁과 성만찬 논쟁이다.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발생하고 있는 성만찬은 유효한 것인가? 이런 질문과 함께 팬데믹의 발생으로 인하여 강제적으로 시행하게 된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식에 대한 유효성을 묻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최대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분위기는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을 긍정하는 분위기이고,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분이라는 논리를 통해 그것들의 실행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이제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식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이렇게라도 예배드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오히려 크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을 '예외상태에 대한 용인'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는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에 너무 쉽게 찬성함으로써 '기술-보건적 독재주의'를 아무런 저항 없이 삶 속에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외상태(긴급사태)의 일상화는 필연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제한하게 된다. 보건, 또는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를 아무런 저항 없이 당국에 내놓게 되고, 신체적 접촉이 최소화된 사회에서는 사랑이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자유와 사랑을 잃어버린, 그저 신체만 가진 '벌거벗은 생명'이 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삶이라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기술-보건적 독재주의', 즉 우리의 생명을 무참히 축소시키는 생명정치에 저항할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필요하다. 예배와 성만찬이 그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대교회에서 박해가 일어 생명이 무참히 축소될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명의 풍성함을 증명한 것은 예배와 성찬식을 통해서 였다.

 

방역당국과 협조하여 팬데믹 국면을 잘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긴 하나, 팬데믹을 빌미로 '기술-보건 독재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축소시키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 또한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인들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할 때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1. 7. 14. 06:46

[한병철의 <고통 없는 사회>를 읽다]

 

"팬데믹은 어떤 다른 삶의 형태를 낳지 않는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생존이 된다"(33쪽).

 

가뜩이나 슬펐는데, 더 슬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 인간 존재는 덜 죽은 존재인 바이러스와 닮은 '생존의 존재'가 되었다. 바이러스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를 닮은 존재가 되어 생존의 히스테리적 존재가 된 것이다.

 

한병철이 파헤친 현대사회는 어떠한 고통도 거부하는, 진통사회이다. 고통을 몰아내려고 하는 사회, 고통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회,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축소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고통이 없는 사회, 이러한 사회는 요한계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천국'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만약 한병철의 진단대로 현대사회가 고통이 없는 사회, 진통사회라면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회 아닌가? 우리는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고통 없는 삶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진통사회와 결이 다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의 진통사회를 한병철은 이렇게 진단한다. "진통사회는 진실 없는 사회이며 같은 것의 지옥이다"(50쪽).

 

우리는 종말에 이른 것이 아니라, 아직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진통(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삶을 생존으로 축소시키려는 체제의 기획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유혹하는 진통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 올바로 저항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의 고통에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즉, 고통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필연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연대(solidarity)를 가로막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을 깨알같이 분리시켜 힘을 모으지 못하게 하고 통치를 원활하게 만든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54쪽). 인간은 고통의 존재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고통의 문화가 없으면 야만이 생겨난다"(54쪽). 진통으로 인하여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 그리하여 이 사회에 넘쳐나는 것은 마약과 폭력과 테러뿐이다.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니, 왠만한 자극으로는 전혀 살아 있다는 감동을 받을 수 없다.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61쪽). 현대사회는 왜 사람들의 정신이 공허할까? 우리 사회는 진통사회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피하고, 언제든지 진통된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미래가 안 보이고 답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이 동일한 곳에 머무르고 있으니, 어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한병철은 에른스트 융어의 고통에 대한 통찰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를 말해달라 그러면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해주겠다"(67쪽). 우리는 고통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고통을 환영하는가. 우리가 고통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관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고통은 정적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외부가 사유 안으로 침투하는 균열이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요즘 우리가 사회는 사회에 왜 이렇게 '혐오'가 판을 치는지 알게 해준다. 진통사회, 즉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회, 고통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외부', 즉 타자(other)를 쉽게 혐오할 수밖에 없다. 그 타자(other)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딜 의지도 없고 어떻게 견디는지도 모르고 오직 삶의 의미는 '생존'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한병철이 주고 있는 통찰 중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이것이다. "고통은 다른 가시성을 연다. 고통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지각기관이다"(73쪽). 고통을 잃어간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고통이 있어야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러한 세상을 향해 나아갈 텐데, 진통사회는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정신적 태로로서의 인내와 기다림 또한 침식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이다. 한병철은 기다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태도다. 이 기다림은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이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자신을 밀착시킨다."(76쪽).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 '마라나타'를 외쳤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다. 그들의 삶은 그것에 대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위에서 밝혀진 기다림의 정의(definition)처럼,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그들 마음대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들은 기다림에 자신의 삶을 밀착시켰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기다림'이었다. 이것은 고통이 가져다 준 하나의 선물이었고, 또다른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더이상 '기대'가 없다. 하나님 나라, 즉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순응/순종이 없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하며 살기 원한다. 우리의 삶에 더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밀착시키는 행위'인 기다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무엇에게로 우리의 삶을 밀착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저 허무하기만 하다.

 

생물학적 생명만이 생명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생명정치를 일삼는 현대사회에서 고통은 생물학적 생명을 못살게 구는 적(enemy)일 뿐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생명을 '진통'을 원한다. 그 진통의 구원을 베푸는 것은 더이상 사제가 아니라 의사(doctor)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 존재는 영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고통은 바로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진통사회, 더이상 고통 없는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신체로만 축소시킨다. 신체로만 축소된 생명은 이제 '생존'만을 삶의 목표로 가지게 된다. 바이러스 팬데믹 현상은 그러한 생존을 더 갈망하게 이끌고, 생명을 점점 더 축소시키고 있다. 이러한 때에 생존을 위하여, 생물학적 생명만이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것을 외치는 예언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생명의 가치가 은폐되고 있는 이 비극적인 시대에 우리는 생존을 넘어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팬데믹의 고통을 하루 빨리 없애려고 하는 다국적 자본주의와 맞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