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7. 26. 13:35

신인류의 사랑을 간구하는 기도

(엡 4:1-16)

 

주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난

신인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신인류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신인류의 사랑은 서로를 섬겨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합니다.

주님,

이것이 우리의 삶, 우리의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깨달아 알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성숙한 인간은

철부지 어린 아이처럼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남몰라라 하지 않고,

그 문제들을 책임감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봉사의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봉사의 일을 하기 원합니다.

주님, 그러한 일들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하나 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우리가 하나 되어,

우리의 삶의 문제, 특별히 기후위기의 문제를 잘 대처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생명을 빼앗기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는 자가 되어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옵소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26. 13:33

신인류의 사랑 (Love of New Human Race)

(에베소서 4:1-16)

 

바울은 1장부터 3장에 걸쳐 신학적인, 이론적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십자가, 부활, 승천)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그것은 계시로 주어진 것이기에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는 것은 복음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류 간의 교제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낳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이다.

 

한국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남자와 남자 군인과 여자 셋이 걸어가면, ‘남자 둘, 여자 한 명이 걸어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와 군인’이 걸어간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군인은 남자와 여자에 끼지 못하는 제 3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에베소서의 신학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의 있다. 남자와 여자와 그리스도인. 기독교가 탄생하고 나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매우 유별난 부류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라벨이 따로 붙었다.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신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처음 기독교 신앙이 생겨난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다원주의 사회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신앙 때문에 ‘순교’ 당하는 것은 굉장히 고귀한(noble)한 일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인식이 별로 없어서 ‘순교’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에베소서 4장부터 바울의 권면이 시작되는데, 권면은 단순히 해도 되고 안 되도 되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지금은 개인의 자유가 가장 큰 미덕인 시대이고, ‘자유’라고 하는 개념이 매우 사사화되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되었지만, 신학적 설명 다음에 나오는 권면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눈에 보이지 않는 것)가 실제로 이루어지게(눈에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실천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을 허물어 그 둘이 ‘하나’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담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담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담이 허물어져서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에베소 교회를 이루어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진리가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권면’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옵션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필연적으로 들어서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은 그들의 노력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선포했듯이, ‘하나 됨’은 그들이 노력해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3절에서 “힘써 지키라”라는 말은 헬라어 ‘테레인’을 옮긴 말인데, 이것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는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 됨’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하나 됨’을 지켜야 한다.

 

이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매우 위트 있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주 안에서 갇혀 있다”라고 말하는데,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채워진 차꼬를 3절의 “평화의 매는 줄”과 대비를 이루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쇠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감옥에 매여 있지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평화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하나 됨’에 매여 있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덕목들 네 가지를 말한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하여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식상해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추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겸손(humility)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인데, 이 용어는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용어이다(NIB, 61). 우리는 보통 “I am better than you!”의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 ‘경쟁’이라는 가치 아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일상에서 이런 가치 가운데 살아가면서 겸손의 덕목을 갖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You are better than me.” 참 어려운 과제다.

 

겸손뿐 아니라,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덕목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실제 삶에서 실행하기 쉬운 덕목들이 아니다. 그것을 바울도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매우 특별한 단어를 통해서 그러한 덕목들을 지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3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동사 “힘써 지키라(스푸타존테스)”이다. ‘스푸타존테스’는 ‘온갖 노력을 다 한다’는 뜻의 아주 절박한 표현이다. 자식이 병에 걸리면 그 병을 고쳐주려고 부모가 절박한 심정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 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즉,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4절에서 6절에 걸쳐 말하고 있듯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고, 주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시오’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님은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이 우주에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권세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귀신(어떤 영적 존재)도 국가도 자본(돈)도, 그 어느 것도 권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권세를 지니고 계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두려워 한다. 귀신도 국가도 자본도 그 어느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매우 전복적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7절에서 10절 말씀이다. 바울은 8절에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시편 68편의 말씀을 약간 다르게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어떻게 다르게 인용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조금 복잡한 논의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그것을 자세히 알지 못해도 된다. 다만,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어 교회에 사역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올라가셨다’, ‘내리셨다’, 이런 용어를 통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승천이다. 바울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에 일꾼들을 주셨음 강조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단지 교회가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주신 ‘선물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환기시켜야 하는 중요한 말씀이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이 무슨 목표를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절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사역자들을 교회에 선물로 주신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번째 것은 두 번째 것을 위해서 이고, 두 번째 것은 세 번째 것을 위해서이다. 사역자들을 세우진 첫 번째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적절하게 구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위해 구비시키는가? 그게 두 번째 이유인데, 사역자들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성도들을 적절하게 구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봉사(디아코니아)는 섬기는 일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먼저 섬겨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속성(nature)이다. 섬김을 잃은 그리스도인은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왜 섬기는가? 그것이 세 번째 이유인데, 그리스도인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적절히 구비되어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데, 그 섬김의 일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냥,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가? 교회의 몸집을 크게 불리는 것, 우리가 흔히 ‘부흥’이라는 것을 하는 것인가?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실마리는 13, 14절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 14절).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아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와 대조되는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는 이유, 그래서 우리가 봉사의 일을 하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 주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어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성숙한/mature) 분량에 도달하는 것은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성숙이다. 어린 아이처럼 철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내적 성숙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각 시대마다 내적 성숙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긴급한 문제들에 대하여 남몰라라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헌신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1703년에 태어나서 1791년에 세상을 떠났다. 전형적인 18세기 인물이다. 18세기 영국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는 도시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농부들이 일터를 잃고 도시로 몰려와 도시 노동자로 전락을 하게 되는데, 도시에 몰려든 농부들은 늘 빈곤에 시달렸다. 그 당시에는 사회보장 제도나 노동자 법이 발달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은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그들을 보듬은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기후위기 또는 기후재앙이다. 이 모든 것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얼마전 가디언 신문에서 지금 가장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한 것이 지구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뜻있는 국제 변호사들이 지구를 변호하고, 지구에 가하는 범죄를 법으로 정하여 처벌 받게 하기 위해 법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있다는 기사였다. 또 AP 뉴스에서 북극곰이 기후변화 때문에 어떻게 멸종해 가는지 말하면서, 인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것을 들었다. “We are next!” 정말 섬뜩한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이다.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새로운 인류, 신인류는 무엇을 하든지 오직 사랑 안에서 한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늘 고민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을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 것으로 축소시켜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고, 성숙한 인간, 내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냥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고 마는, 철부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인류의 사랑은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까? 어렵지 않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던 신앙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섬김의 일을 하는 것이다. 기후재앙을 만드는 일에 저항하며, 즉, 자본의 탐욕을 물리치며, 인간 생명의 젖줄인 지구를 지켜내는 것이 이 시대 신인류의 사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섬김으로 기후재앙으로부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지켜낼 것인가,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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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7. 19. 13:34

가치관의 변화를 간구하는 기도

(엡 3:14-21)

 

주님,

우리는 어느덧 최후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파멸과 구원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날을 돌아보면

우리는 마치 파멸을 맛보기 위해 안달 난 존재처럼 살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 위에 놓여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제하고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최후의 인간, 우리가 바로 탕자입니다.

우리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

우리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시기에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속사람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향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파멸의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로 옮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무엇보다 우리의 기도를 바꾸게 하옵소서.

기도할 때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에 관한 기도는 좀 내려놓고,

속사람의 건강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하는 것에 대한 기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갈망에 대한 기도를 하게 하옵소서.

최후의 인간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가치관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게 하옵소서.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9. 13:31

최후의 인간

(에베소서 3:14-21)

 

본문은 바울의 기도문이다. 바울 서신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기도문이 들어간다는 것과 전반부에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후반부에는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를 한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 중에 에베소서는 좀 더 특이하다. 다른 서신에서는 기도문이 앞부분에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앞 부분 외에 이렇게 중간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기도문을 기점으로 에베소서는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와 후반부의 실천적인 이야기(권면)로 나뉜다.

 

전반부의 신학적인 이야기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혔다.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문 사건이고, 그리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함께 세워 나간다.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세워진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에베소 공동체를 위해 바울은 기도한다.

 

기도는 참 따스한 인간의 유산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 깊은 사랑의 행위가 없다.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기도 안에 ‘나의 이름(장준식)’이 불린다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다. 기도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도하는 한, 긴 기도는 필요 없다. 짧게, 그의 이름만 불러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내 기도 안에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법이다.

 

유대인의 평소 기도법은 서서 기도하는 것이다. 서서 기도하는 것은 서서 말씀을 받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기에 서서 말씀을 받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에 서서 기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무릎 꿇고” 기도한다. 서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간절함이 배어 있는 기도가 바로 무릎 꿇고 하는 기도이다. 무릎 꿇음은 경외심, 복종, 겸손의 의미가 강력하게 들어 있다. 성경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표적인 장면은 세 군데 등장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둘째는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셋째는 바울이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작별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 어떤 자세로도 기도할 수 있다. 누워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고, 앉아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앉아서 기도를 제일 많이 한다. 기도를 좀 더 오래하기 위한 편의이다. 서서 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 자세인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시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서서 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누워서도 기도하고 앉아서도 기도하지만, 기도의 기본 자세는 서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또한 기도의 자세 중 무릎 꿇고 하는 기도가 가장 간절한 기도의 자세라는 것도 알아 두면 좋겠다.

 

바울의 기도를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굉장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 등의 가치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바울의 기도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현재 추구하는 가치관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바울의 기도는 세 개의 간구와 한 개의 영광송으로 이뤄져 있다. 우선 세 개의 간구를 먼저 보면, 첫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속사람(the Inner Man)은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독특한 용어이다. 로마서(7:22/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와 고린도후서(4:16/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에도 나오는 용어이다.

 

속사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다. 우리말 ‘마음(속사람)’이라는 말도 참 예쁜 말이지만 헬라어도 참 예쁘다. 속사람(마음)을 ‘카르디아’라고 한다. 히브리어도 예쁘다. “레브.” 영어로는 ‘heart’, 또는 ‘mind’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심장, 또는 마음. 아무튼, 속사람이란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인데, 사람됨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기에 ‘속사람(the inner ma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곳도 바로 ‘속사람’이다. 그러니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속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현대인들의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대개 육신의 건강, 몸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병든 육신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데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누군가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낯설어 할 뿐만 아니라, 매우 이상한 감정이 들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속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겉사람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두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한계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은 “지식을 초월하는,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아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수준에만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헤아리고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잴 수 있는 만큼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서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만다. 그렇다 보니, 우리 삶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억압이 일어날 뿐이다.

 

세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대담한 기도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수준까지 이르기를 구하는 것인데,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구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엡 4:13)하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개념과 유사(마 5:48)하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경지까지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보다 더 대담한 기도는 없다. 이것은 기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기도의 마무리를 영광송으로 하고 있는데,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경험 때문이다. 바울의 하나님 경험은 20절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영광송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영원무궁토록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모든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의 기도는 ‘속사람’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에 대한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리고, 기도의 마무리는 영광송이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루어 주신 분이라는 고백을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바울의 기도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치관과 매우 이질적이다. 우리 시대는 겉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둔다.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고, 물질 세계에 대한 깊이를 알려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 세계에 대하여 알게 된 지식으로 물질적 풍요, 즉 겉사람에 대한 풍요를 누리려 할 뿐이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쉽게 말해, 물질적 부자되는 것에만 관심 있다. 우리 시대는 영광송이 사라졌다. 풍성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족함과 모자람의 감정을 주입시키기 시대에 살고 있기 대문이다.

 

요즘 지구가 아주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바이러스 팬데믹에 더해, 유럽에서는 대홍수사태를 겪고 있고, 미국에서는 유례없는 더위와 가뭄 사태를 겪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이런 헤드라인이 떴다. ‘No One Is Safe’: “Deadly flooding in Europe, vicious heat in America: Wealthy nations are waking up to the idea that climate disasters can reach them too.” 이 기사는 정말 씁쓸한 기사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뉴욕 타임즈에서 말하고 있는 ‘wealthy nations’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지고 성장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들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 기후위기의 주범들 아닌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기도에서 간구하는 것, 속사람의 강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들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탕자의 이야기의 현실판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인간의 최후 말이다.

 

최후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파멸당하는 인간일까, 아니면 구원받는 인간일까? 우리는 구원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지구를 이렇게 망쳐 놓고 이렇게 환란이 가득한 지구에서 휴거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지구에 사는 한, 우리는 지구의 흥망성쇠와 함께 할 것이다. 지구가 고통 당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고통 당할 것이다. 지구가 번성하면 우리 인간도 함께 번성할 것이다. 즉, 우리는 지구의 멸망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지구의 번영과 함께 구원받게(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인가?

 

위의 기사에서 Wealthy nations(부유한 국가들/선진국)는 모두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국가들이다. 그들이 기후변화의 주범 아닌가? 그만큼, 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사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쓰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썼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인간 자신이다. 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을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고 종교의 영역에 가두고, 이성이 신앙 안에서 작동하도록 하지 않고,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여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조차 개입하지 못하는 이성의 고유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근대의 사고방식),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성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싶은가? 파멸인가? 구원인가? 죽음인가 생명인가? 우리는 마치 파멸을 경험해 보고 싶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겉사람에게만 관심 있을 뿐 속사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겉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매우 발달되어 있는 반면, 속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와 수치는 전혀 없다. (혈압이 높으시네요? 당뇨가 있으시네요? 짠 거 덜 드시고, 음식 조심해서 드세요. 이런 말은 해도, 속사람의 건강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기도를 하루에 세 번 하시고, 예배에 빠지지 마세요. 그리고 성경읽기를 하루에 한 장씩 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세계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려고 할 뿐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원소 주기율표는 있어도, 그리스도 사랑 주기율표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물질적 충만만 바랄 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파멸만 남은 것 같고, 그것을 지금 우리는 현실판으로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작은 우리의 기도부터 바꾸는 데 있다. 기도할 때 ‘‘(신체적) 건강, (물질적) 성공, (어떤 고난(고통)도 없는) 행복’에 관한 기도는 좀 내려놓고, 속사람의 건강에 대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하는 것에 대한 기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정도까지 충만해지려는 갈망에 대한 기도로 우리의 기도를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우리의 속사람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아니라 엉뚱한 것이 충만하게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알아야,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성경공부의 자리, 교제의 자리, 선교와 봉사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한 것들이 영적인 치유의 자리라는 것이 보이게 된다. 

 

이러한 기도와 깨달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어둠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불빛도 소중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다.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 피어날 때(또는 겉사람과 동등하게 속사람의 건강도 신경 쓸 때), 물질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기를 소망할 때(물질 세계에 대한 관심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관심을 둘 때),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려고 갈망할 때, 그러한 가치관으로 새롭게 삶을 규정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 최후의 인간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인간이다. 파멸이 아닌 구원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를 자꾸 파멸로 몰고 가는 가치관을 내려놓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치관(속사람/그리스도의 사랑/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다시 옷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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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1. 7. 14. 07:52

[대면예배와 성찬식이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조르조 아감벤의 <얼굴 없는 인간>은 팬데믹 시대의 생명정치를 그가 그동안 주장해 왔던 '예외상태'의 개념을 통해 짚어보는 책이다. 이 책에서 아감벤은 팬데믹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통치자들이 자신의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제도적 권력의 정당성'을 갈구했던 권력자들은 영구적 긴급 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팬데믹 상황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아감벤이 던지는 도전이다.

 

"기술-보건적 독재주의"를 그대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아감벤의 충고 앞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펼쳐 나가야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나는 대면예배와 성만찬이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팬데믹 임에도 불구하고 '접속'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시키는 '접속'일 뿐, 사람과 사람 사이의 풍성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접속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접속되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가지고, 팬데믹 이후 우리는 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최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교회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예배 논쟁과 성만찬 논쟁이다.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발생하고 있는 성만찬은 유효한 것인가? 이런 질문과 함께 팬데믹의 발생으로 인하여 강제적으로 시행하게 된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식에 대한 유효성을 묻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최대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분위기는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을 긍정하는 분위기이고,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분이라는 논리를 통해 그것들의 실행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이제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식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이렇게라도 예배드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오히려 크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을 '예외상태에 대한 용인'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는 비대면예배와 사이버 성찬에 너무 쉽게 찬성함으로써 '기술-보건적 독재주의'를 아무런 저항 없이 삶 속에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외상태(긴급사태)의 일상화는 필연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제한하게 된다. 보건, 또는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를 아무런 저항 없이 당국에 내놓게 되고, 신체적 접촉이 최소화된 사회에서는 사랑이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자유와 사랑을 잃어버린, 그저 신체만 가진 '벌거벗은 생명'이 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삶이라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기술-보건적 독재주의', 즉 우리의 생명을 무참히 축소시키는 생명정치에 저항할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필요하다. 예배와 성만찬이 그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초대교회에서 박해가 일어 생명이 무참히 축소될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명의 풍성함을 증명한 것은 예배와 성찬식을 통해서 였다.

 

방역당국과 협조하여 팬데믹 국면을 잘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긴 하나, 팬데믹을 빌미로 '기술-보건 독재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축소시키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 또한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인들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할 때이다.

Posted by 장준식
카테고리 없음2021. 7. 14. 06:46

[한병철의 <고통 없는 사회>를 읽다]

 

"팬데믹은 어떤 다른 삶의 형태를 낳지 않는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생존이 된다"(33쪽).

 

가뜩이나 슬펐는데, 더 슬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 인간 존재는 덜 죽은 존재인 바이러스와 닮은 '생존의 존재'가 되었다. 바이러스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를 닮은 존재가 되어 생존의 히스테리적 존재가 된 것이다.

 

한병철이 파헤친 현대사회는 어떠한 고통도 거부하는, 진통사회이다. 고통을 몰아내려고 하는 사회, 고통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회,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축소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고통이 없는 사회, 이러한 사회는 요한계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천국'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만약 한병철의 진단대로 현대사회가 고통이 없는 사회, 진통사회라면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회 아닌가? 우리는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고통 없는 삶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진통사회와 결이 다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의 진통사회를 한병철은 이렇게 진단한다. "진통사회는 진실 없는 사회이며 같은 것의 지옥이다"(50쪽).

 

우리는 종말에 이른 것이 아니라, 아직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진통(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삶을 생존으로 축소시키려는 체제의 기획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유혹하는 진통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 올바로 저항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의 고통에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즉, 고통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필연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연대(solidarity)를 가로막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을 깨알같이 분리시켜 힘을 모으지 못하게 하고 통치를 원활하게 만든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54쪽). 인간은 고통의 존재이다. 한병철은 말한다. "고통의 문화가 없으면 야만이 생겨난다"(54쪽). 진통으로 인하여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 그리하여 이 사회에 넘쳐나는 것은 마약과 폭력과 테러뿐이다.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니, 왠만한 자극으로는 전혀 살아 있다는 감동을 받을 수 없다.

 

"정신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새로운 인식에, 더 높은 앎과 의식의 형태에 도달한다"(61쪽). 현대사회는 왜 사람들의 정신이 공허할까? 우리 사회는 진통사회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피하고, 언제든지 진통된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미래가 안 보이고 답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이 동일한 곳에 머무르고 있으니, 어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한병철은 에른스트 융어의 고통에 대한 통찰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를 말해달라 그러면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해주겠다"(67쪽). 우리는 고통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고통을 환영하는가. 우리가 고통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관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고통은 정적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외부가 사유 안으로 침투하는 균열이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요즘 우리가 사회는 사회에 왜 이렇게 '혐오'가 판을 치는지 알게 해준다. 진통사회, 즉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회, 고통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외부', 즉 타자(other)를 쉽게 혐오할 수밖에 없다. 그 타자(other)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딜 의지도 없고 어떻게 견디는지도 모르고 오직 삶의 의미는 '생존'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한병철이 주고 있는 통찰 중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이것이다. "고통은 다른 가시성을 연다. 고통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지각기관이다"(73쪽). 고통을 잃어간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고통이 있어야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러한 세상을 향해 나아갈 텐데, 진통사회는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정신적 태로로서의 인내와 기다림 또한 침식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이다. 한병철은 기다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태도다. 이 기다림은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이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자신을 밀착시킨다."(76쪽).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 '마라나타'를 외쳤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다. 그들의 삶은 그것에 대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위에서 밝혀진 기다림의 정의(definition)처럼,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그들 마음대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들은 기다림에 자신의 삶을 밀착시켰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기다림'이었다. 이것은 고통이 가져다 준 하나의 선물이었고, 또다른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더이상 '기대'가 없다. 하나님 나라, 즉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순응/순종이 없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하며 살기 원한다. 우리의 삶에 더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밀착시키는 행위'인 기다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무엇에게로 우리의 삶을 밀착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저 허무하기만 하다.

 

생물학적 생명만이 생명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생명정치를 일삼는 현대사회에서 고통은 생물학적 생명을 못살게 구는 적(enemy)일 뿐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생명을 '진통'을 원한다. 그 진통의 구원을 베푸는 것은 더이상 사제가 아니라 의사(doctor)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 존재는 영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고통은 바로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진통사회, 더이상 고통 없는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신체로만 축소시킨다. 신체로만 축소된 생명은 이제 '생존'만을 삶의 목표로 가지게 된다. 바이러스 팬데믹 현상은 그러한 생존을 더 갈망하게 이끌고, 생명을 점점 더 축소시키고 있다. 이러한 때에 생존을 위하여, 생물학적 생명만이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것을 외치는 예언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생명의 가치가 은폐되고 있는 이 비극적인 시대에 우리는 생존을 넘어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팬데믹의 고통을 하루 빨리 없애려고 하는 다국적 자본주의와 맞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7. 12. 13:47

“이 교회를 보라!”고 외치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엡 3:1-13)

 

놀라우신 주님,

우리에게 당신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주시는 주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의지를 겸손히 내려놓고

믿음으로 주님의 지혜에 반응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자꾸 우리의 자유와 의지로 반응하려고 하니

우리의 신앙 가운데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오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괴로움만 넘쳐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성령의 은총을 부어 주셔서

계시로 드러나는 주님의 지혜를 믿음으로 받게 하시고

우리를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교제인 교회되게 하셨사오니

주님의 은혜를 계시로 받은 우리들이 받은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들,

성경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그 말씀 가운데서 주님의 지혜가 드러나거든 믿음으로 받게 하시고

풍요로운 주님의 지혜를 담지하고 있는 교회를 세워 나가며

‘이 교회를 보라’고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외치는

구원받은 거룩한 주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12. 13:43

이 교회를 보라!

(에베소서 3:1-13)

 

(에베소서를 보면, 교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주 필연적이다.)

 

본문을 보면,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은혜의 경륜, 계시, 그리스도의 비밀, 비밀의 경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하나님의 각종 지혜, 예정 등이 그것이다. 비밀, 계시, 경륜’ 이런 단어들은 본문의 분위기를 왠지 신비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된다. 단어 자체가 그러한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렇지,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 수 있도록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워서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경륜’과 ‘비밀’이다. 헬라어로 각각 ‘오이코노미아’ 그리고 ‘뮈스테리온’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오이코노미아, 경륜은 직무, 사명, 살림살이 등으로 번역된다. 한자어 ‘경륜’으로 번역하다 보니, 한자어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진다. 오히려 영어가 쉽다. 오이코노미아는 영어로 economy이다. 오이코노미아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다스림을 의미하는 ‘노미아’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오이코노미아를 풀어서 말하면, 집을 다스리는 것이다. 집안 살림을 잘 매니지먼트(관리하는 것)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2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고 말할 때 이것을 풀어보면, ‘하나님이 나한테 너희를 위하여 맡겨 주신 일(직무/사명)을 잘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맡겨 주신 일을 잘 하는 것을 오이코노미아, 즉 경륜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맡겨 주신 일 자체를 비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비밀은 ‘뮈스테리온’을 번역한 말인데,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서 드러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정기간 숨겨져 있다가 계시에 의해 드러난 바로 그 일을 잘 감당하다가 지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게 참 재미 있는 건데, 그가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가 그가 얼마나 그 일을 잘 감당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계시로 인하여 드러난 비밀(뮈스테리온)이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2장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것을 3장 6절에 요약해서 적어 놓았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정말 좋은 소식(복음)이다. 공동 상속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헬라어로 ‘함께’를 뜻하는 ‘쉰’과 몸을 뜻하는 ‘쏘마’가 결합된 말인데, 이것은 ‘같은 몸에 속한, 같은 몸에 속한 지체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같은 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그 둘을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서로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가 된다. 바울 당시에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혁명적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계시였다. 바울에게 이러한 계시가 알려지기 전까지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이 계시가 알려지고 난 뒤에 그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러한 비밀을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시로 알려지는 하나님의 비밀(뮈스테리온)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받은 사람은 그것을 불가항력적으로 ‘믿음으로’ 밖에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무엇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오해한다. 믿음이 인간의 의지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인간의 의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전달되면 인간의 의지는 온데 간데없어지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것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로 받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순종과 감사와 찬양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마리아(the Virgin Mary)이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전한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28-31).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뮈스테리온(비밀)을 계시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뮈스테리온이 계시로 임하면,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뿐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그리고 이어지는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와 더불어 나오는 것이 마리아 찬가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이렇게 순종과 감사와 찬양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믿음의 가치를 잘 모를 뿐더러 굉장히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든지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좋다. 그 누구도 나의 의지와 반하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롭다.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 너무 젖어 있다 보니, 자유와 은혜를 구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 마저도 자신의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받을지 안 받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이만한 믿음’을 보기 힘든 것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지(믿음)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을 개인의 의지와 연결시키는 매우 근대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다”라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도 믿음을 그 사람의 의지라고 잘못 해석한다. 우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네가 그렇게 인정하니, 너의 그 의지 덕분에 구원받는 거야’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에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와의 만남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고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믿음(신앙)으로 밖에 그 사건을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반응하는 믿음인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결국, 은혜와 믿음은 한 켤레의 구두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필연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인간의 믿음을 이끌어 낸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밖에는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로 또는 다른 것으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하자면, 믿음은 굉장히 수동적인 개념이다. 그냥 수동이 아니라, 신적 수동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은혜가 initiative(우선적으로 촉발)해서 생겨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난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가만히 끊고자’했다. 즉, 파혼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의 사자가 꿈 속에 나타나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0-21).

 

이때 요셉이 취한 것은 믿음이다. 그냥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주의 사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 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온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낳자 그 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처럼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임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마치 이런 것이다. 바닷가에 있다가 거대한 쓰나미를 맞닥뜨리면, 거기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쓰나미에 불가항력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란 그런 것이다.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믿음 외에 없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랑은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다. 쓰나미처럼 임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은혜(하나님의 사랑)는 믿음(인간의 사랑)으로만 받을 수 있다.

 

에베소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났을 때 (“그 심오한 계획(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공동 상속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가 생겨났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제 한 몸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렇게 교회는 인간의 의지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항력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에베소교회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적대감(이질감)을 내려놓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한 몸, 즉 교회가 되었다. 이제 에베소교회는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을 동일하게 전하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바울은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10절).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고 나니까, 거기에 교회가 생겨났다. 그리고 복음으로 구원받고 서로 화해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전달할 사명을 가진다.

 

이 교회를 보라! 이것은 내가 니체의 책 <이 사람을 보라!>를 따라서 정해 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원어의 제목은 ‘ecce homo 에케 호모’인데, 이것은 니체가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가져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쓴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어렵기로 유명한데, 그렇다 보니 지금도 니체의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 읽고나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니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니체는 수많은 책을 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에 별로 큰 수익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그동안 쓴 책에 대한 해설책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을 보라!>이다. 그의 마지막 책이지만, 니체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보시오 이 사람이오.’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이 책은 크게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챕터마다 붙은 제목이 매우 독특하다. 첫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현명한지”이고, 두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영리한지”이다. 세 번째 챕터는 “왜 나는 이토록 좋은 책들을 쓰는지”이고, 마지막 챕터는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이다. 앞의 세 챕터의 제목 자체도 특이하지만, 네 번째 챕터도 특이한데, 거기에 속한 두 개의 장은 각각 ‘전쟁 선언’, 그리고 ‘망치가 말하다’다. 그런데 제목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이 사람을 보라!>의 각 챕터에 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랬다. 현명하고 영리한 자가 쓴 좋은 책이니, 사람들이 많이 보고 뭔가 깨달음을 얻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책을 <이 사람을 보라!>로 정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교회를 보라!>로 외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담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지혜를 세상에 알려야 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로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히 성경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다른 집단도 성경을 교회처럼 전투적으로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전투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 우리들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으로 그 은혜를 불가항력적으로 받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사도 바울처럼 사명을 감당하다 감옥에 갇혀도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그렇게 감옥에 갇힌 것을 자신이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증거로 삼는다.

 

성경인 에베소서를 연구하고 묵상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이 교회를 보라!>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여기서 ‘이 교회’는 지역교회라기 보다 보편적인 교회를 말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좀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왜 요즘 우리 교회들은 세상을 향하여 <이 교회를 보라!>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에서 길게 설명한 것처럼, 믿음을 ‘자유로, 자신의 의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믿음을 자유의지와 혼동을 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계시로 드러났을 때 우리가 그 은혜에 불가항력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꾸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걸러내려고 하고, 그렇다보니, 결국 우리의 삶 속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감사와 찬양이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말로 해서, 요즘 우리는 현저하게 하나님의 지혜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비밀의 ‘보물창고’인,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창고’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데 엄청 게을러졌을 뿐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맞닥뜨리는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고백을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믿음의 신앙생활, 즉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이기적이고 미약한 자유와 의지에 근거한, 매우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간절히 바라기는,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로 드러나는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입한 자유와 의지를 겸손히 내려놓고, 진정 믿음으로 밖에는 반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될 때, 교회는 다시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이 교회를 보라!>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같다. 우리, 그러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 위하여, 함께 성경을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임하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믿음으로 응답하자. 순종과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찰 뿐 아니라, 삶의 의미가 넘쳐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 이러한 교회 공동체, 얼마나 행복한가. <이 교회를 보라!>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그날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

 

크리스틴 헬머는 자신의 저서 <교리의 종말> 1장에서 북미에서의 신학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교단 신학교는 전례 없는 재정 압박을 겪으며, 교회를 섬길 다음 세대 종교 지도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킬지 고심하고 있다. 전임 사역자라는 전통적인 모델은 갈수록 불가능해 보인다. 이로 인해 급격히 변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일하며 살 목사를 교육하는 창조적이지만 또한 벅찬 새로운 방식을 탐색하게 된다. 신학교 건물과 떨어져서 열리는 온라인 과정, 집중 강좌, 주말반이 미래의 추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미래는 언제나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들로 흐르리라고 보는 확신에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정당하지만 말이다). 성직자들이 사역으로 얻은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때를 예견하며, 전문적인 훈련과 대안적인 직업 준비 모두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교육 모델이 개발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문제는 아니지만 ㅡ 사례비를 두고 교구회(vestry)와 계속 싸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투쟁만 생각해 보더라도 ㅡ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영구적 위기의 맥락에서는 특별히 절실한 문제이다"(29-30쪽).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심화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삶을 위기로 몰고갔다. 1997년 한국이 겪은 외환위기(IMF 사태) 이후 한국의 경제체제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바뀐 뒤, 한국사회는 '헬조선'이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의 삶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종교 분야도 예외일 수 없다.

 

경제적 불평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기후위기, 그리고 영적 빈곤 상태 등 현재 우리가 겪는 모든 사회적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당연히, 현재 교회 내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 문제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인간의 삶(공동체)을 무너뜨렸는지를 알려면, 재독 한인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를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만약 이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거나 이러한 목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단이나 교회, 또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와 소통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교회 환경도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따라 부익부빈익빈, 즉 경제적 불평등 상황이 반영되고 있다. 대형교회는 계속 부흥할 것이고, 나머지 교회는 점점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는 마치 대형백화점이나 대형마트만 살아남고 동네상점들이 문을 닫는 것과 같다. 아마존 공룡 때문에 지역상권이 죽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인데, 무엇보다 지역상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지역의 특수한 문화가 파괴된다는 뜻이고, 그만큼 생명의 다양성이 축소된다는 뜻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한 대형교회가 획일화시킬 수 있는 일종의 상품이 아니다. 신앙은 생명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성을 띌 수밖에 없고,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합창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이 획일화될 때, 그것은 정치가 획일화 되어 전체주의를 낳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신앙 생태계는 다양하고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이 끊임없이 재탄생하며 세대와 세대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는 다양한 지역과 현장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맞선 목회적 전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목회 형태이다. 위에서 크리스틴 헬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을 위해서 "전문적인 훈련과 대안적인 직업 준비 모두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교육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현재의 신학생, 또는 목회자가 다른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거나 또는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을 넘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는 전자가 우세하다. 현재 신학교를 다니는 신학생이나 또는 목회를 하는 목회자가 경제적인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카페를 운영하거나 여타 다른 스몰비즈니스를 겸하여 하는 형태의 목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발전하면, 완전히 다른 개념의 목회가 형성될 것인데, 신학교를 간 사람들이 신학 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어 스몰 비즈니스 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이 후에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를 병행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다.

 

내가 공부한 에모리대학교에서는 이미 오래전 부터, 내가 그곳에서 공부한 2000년대 초반부터, 전문대학원들(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비즈니스스쿨, 신학전문대학원)끼리 교차 지원과 학점공유를 실행했다. 일례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이 신학전문대학원(Candler School of Theology)의 과목을 들으며 일정과목을 이수하면,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장과 신학전문대학원 졸업장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신학교가 이제 '신학'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자신들만의 영역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에서 '신학 또는 교회'는 살아남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전통적인 '전임사역자(담임목사)' 모델로는 목회활동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자립교회'는 아직 '자립교회'가 되지 못했고, 언젠가는 '자립교회'가 될 거라는 소망 안에서 그들을 '비전교회'라고 부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자립교회'와 '미자립교회'의 구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종교 자체가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감행해야 한다. 이 구조조정은 커리큘럼의 변화를 넘어서 신학생을 키워내는 방식 자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신학교는 신학교 담을 넘어 일반대학교들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신학생을 일반대학교에 보내 교육 받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일반대학교 학생들을 적극 유치해 신학교육을 받아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 바탕 위에 목회를 구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신학교는 더욱더 대학원 중심의 교육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감리교회는 그런 면에서 다른 교단에 비해 뒤처져 있다. 감리교회는 아직까지 대학원 중심의 신학교육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중심의 신학교육을 펼쳐 가되, 다른 일반대학교의 전문대학원들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그들과 학사교류, 학점교류 등의 공유를 통해서 신학생이 다른 학문을 공부하여 경제적인 문제를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넘어 다른 학문을 하는 학생들이 신학교육을 받게 함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기반 위에 목회를 구상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한다.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는 전통적 목회에 대한 일탈이 전혀 아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신학교나 교회 또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이중직 또는 사회적 목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듬고 해결하려고 하는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목회적 전략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서도 아직도 복음의 능력을 믿으며 그 복음으로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부름 받아 나선 이들'의 목회가 '이중직 목회 또는 사회적 목회'를 통해 활짝 피어나길 기대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1. 7. 7. 10:35

그리스도의 내어 줌을 본받기 간구하는 기도

(엡 2:11-22)

 

주님,

십자가 위에서 화해를 이루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신 그 놀라운 일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더 이상 감춰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세상이 눈으로 보도록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새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약속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자신들 만이 특별한 구원을 받은 줄로 생각하고

담을 다시 쌓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무효화시키는 어리석은 일인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주님, 복음을 붙들게 하옵소서.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 없이, 모두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어 줌'을 본받아 아직도 쌓여 있는 담이 있거든 그것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가져오는 복되고 흥미진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새로운 인류로 만들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7. 10:30

십자가와 화해와 평화

(에베소서 2:11-22)

 

 

이방인

 

나는 누군가에게 이방인이다

아니 나는 모두에게 이방인이다

저녁거리,

그 쓸쓸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노을로

고개를 돌리는 건

여기에서는 불경한 짓이다

그 너머 있는

무지개 마을을 상상하는 건

여기에서는 교수형감이다

이들에게 어제는 먼 미래와 같고

먼 미래는 태초와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마음조차

괴로운 상상인 것은

이들에게 내일은

아직 경험되지 못한

감각의 바깥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석양에 기울어지는 그림자만

나를 바싹 뒤쫓았을 뿐,

내가 거리를 돌며 본 건

옛날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오싹한 느낌,

그들은 모두 예전에

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이방인이다

 

(장준식 作)

 

위의 시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내가 이방인인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죽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본 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곳에서 나는 얼마나 이방인인가. 죽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존재는 낯선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본문은 우리의 존재를 굉장히 낯설게 만든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 무할례자들. 여기서 무할례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깊은 차원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라는 뜻은 구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라는 뜻이다. 마치 위의 시에서 ‘나(시적 자아)’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이방인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채 이 세상에서 희망도, 하나님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12/공동번역개정판)

 

내가 언젠가 한 번 밝힌 적이 있는데, 미국 와서 가장 힘든 상황 중 하나는 내가 여기에서 ‘people of color(유색인종)’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유색인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한국인이고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나는 유색인종이라고 불린다. 이는 철저하게 백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이다. 이처럼, 본문에서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접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에베소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한국인들은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중화민국/세상의 중심인 나라)과 부자(父子)의 나라, 또는 형제의 나라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방인은 아니었다. 우리 한국인들처럼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예로부터 우리는 중국 이외의 나라들은 모두 ‘오랑캐’로 불렀다. 일본은 왜놈이라고 불렀다. 중국과 한국 이외의 나라들에게 ‘놈’자를 붙였다. 그러다 최근에는 중국조차도 ‘놈’자를 붙여서 부른다. ‘중국놈’.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는 갑자기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밀려난 정도가 아니라,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무할례자, 즉 ‘이방인’으로 불린다.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에베소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굉장히 안심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즉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엡 2:13). 이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는 분에게 관심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만약 우리가 신약성경, 그 중에 에베소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복음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서를 열심히 읽어볼 것이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그가 흘린 피는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길래 구원에서 멀리 있던 이방인인 우리들을 이제 하나님과 가까운 존재로, 즉 구원받은 존재로 만드는가? 그의 피흘림, 즉 그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죽음은 왜 여느 사람들의 죽음과 다른 것일까? 그냥 일반 사람들의 죽음은 그냥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것일 뿐인데,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죽음인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신약학자 중 한명으로 불리는 루크 티모시 존슨(Luke Timothy Johnson)은 그의 책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The Real Jesus)>에서 이런 말을 했다. “복음서의 근본적인 초점은 예수의 이적이나 그분의 지혜로운 말씀이 아니다. 복음서의 공통된 초점은 그분의 삶과 죽음의 성격에 맞춰져 있다. 모든 복음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동일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또한 네 복음서 모두는 제자도란 곧 그런 메시아적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서는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특정한 교리를 배우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신 바로 그 본보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Johnson 1996).

 

여기서 그분의 삶과 죽음의 성격이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내어줌”을 의미한다.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자기를 내어주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엡 2:14-15a).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화해사건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화해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친구랑 싸운 뒤 화해하는 것, 또는 부부싸움 뒤에 화해하는 것 등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싸움을 많이 하고 산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싸움은 부부싸움이다. 싸움 뒤에는 평화가 없다. 부부사이에 담이 생긴다. 그런데 그 담이라는 게 아주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담이 쌓여 있었는지 모르게 무너지고, 그리고 아주 간단한 사과 한마디로 그 담은 쉽게 무너진다. 이처럼 화해는 좋은 것이다.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적 싸움을 경험한다. 국가 간의 싸움이 발생하면 평화가 없다. 그래서 실제로 국경에 담을 쌓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담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거나, 그저 관광지로 바뀌고 만다. 국가 간의 싸움도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쌓인 담은 부부싸움에서 새긴 담이나 국가적 싸움에서 생긴 담과는 질적으로 다른 담이다. 그것이 왜 질적으로 다른 담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계시는 한 특별한 사람, 즉 선택된 사람에게 드러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그 계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전해져서, 한 민족, 한 나라에게 계시된 것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그 한 민족, 그 한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알고 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만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고, 그를 축복의 통로하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서부터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닌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나셨는지 궁금해한다. 하나님이라면 굳이 유대인이 아니라 한국인을 사용하셔서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도 있을 텐데, 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셔야 했는가? 바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인류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이 하나님 계시의 보편성으로 전환되는 국면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계시가 이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비하신 분이지만, 즉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지만, 그리고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시는 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이 눈에 보이도록,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셨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의 몸(자기의 전체)을 내어놓으셨기 대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유대인(할례 받은 자 / 하나님의 계시를 담지하고 있던 자)과 이방인(할례 받지 않은 자 /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던 자) 사이에 쌓여 있던 담은 부부싸움으로 생긴 담이나 국가간 싸움으로 생긴 담처럼,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담이 아니라, 저 하늘에 속한 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담은 오직 하나님만 허무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담을 허무셨다.

 

이것(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담이 허물어졌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을 가져다 준다. 자칫 잘못하다간, 유대인들이 갑자기, 오히려 이방인이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을 가진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주 보편적인 이름으로 전환을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은 나라와 민족을 초월한 매우 보편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클레시아/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문에서 처음에는 ‘이방인’으로 불린 것을 억울해할 필요 없는 상황을 가져오는 ‘복음’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이제 이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이 이룬 화해 덕분이다. 이제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인류를 이룬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습니다”(엡 2:15-16).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할례자, 이방인, 구원에서 멀리 있던 자에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선포한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엡 2:19).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나는 더 이상 소외된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즉 구원받는 자가 되었다는 선포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랴. 아무도 이제 그런 권리를 가진 사람/나라는 없다.

 

이것은 요즘 교회를, 요즘 그리스도인을 부끄럽게 만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요즘 교회에서는 이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것 같고,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을 보편적 복음으로 전환시키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온데 간데없고, 요즘 교회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본인들이 이방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화해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는 양 새로운 유대인이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일이다.

 

성경은 보편적 복음을 통해 탄생한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키는 다음과 같이 은유적 표현을 쓴다. 1) 그리스도의 몸(자기를 내어주는 존재 / 구원이 발생하도록 하는 존재), 2) 하나님의 성전(구별된 존재 / 존귀한 존재), 3) 그리스도의 신부(사랑 받는 존재), 4) 새로운 인류(다르게 사는 존재 / 모험적 존재 / 세상의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존재). 자기를 내어주어야 할 존재가 다른 이들의 몸(삶)을 착취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존귀한 존재가 비천한 존재로 전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르게, 모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존재가 이 세상의 일에 몰두하느라 삶을 낭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화해사역을 통해 평화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그러니, 어디에서든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되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눈으로 본 자 답게,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모든 이들이 눈으로 우리들처럼 구원을 보도록, 자기를 내어주고, 존귀한 자로, 사랑하며, 무엇보다 모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사는 자가 되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복된 삶인가. 이런 삶을 얼마나 흥미진진한 삶인가.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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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