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1. 6. 28. 11:43

은혜(카리스)를 깊이 묵상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엡 2:1-10)

 

주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까?

까닭 없이 찾아오는 고통,

까닭 없이 처해지게 되는 삶의 현실을 생각하며,

그와 동시에

까닭 없이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을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데,

우리가 무엇이관데,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

그들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함부로 대합니까?

주여,

‘은혜’를 깊이 묵상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가 은혜로, 까닭 없이 구원받았다는 깊은 진리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선한 일로 열매 맺어져야 하는지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이 진리를 묵상하며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자칫 우리가 악인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구원을 눈에 보이도록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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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28. 11:41

죄와 은혜와 구원

(에베소서 2:1-10)

 

(요즘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 기독교 신앙(우리의 신앙)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데, 첫번째 시간에는 ‘공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두번째 시간에는 ‘성령을 통하여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되살려 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성경과 우리 시대는 2천년이라는 간격이 있는데, 그 간격을 메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발견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쉬운 작업은 아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제목’을 정하는 일은 늘 어려운 과제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 ‘죄와 은혜와 구원’은 정말 무거운 제목이다. 이는 단순히 ‘죄와 은혜와 구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죄와 은혜와 구원’이 오늘 우리가 사는 21세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인간론(인간이란 무엇인가)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구원론(구원이란 무엇인가)기독교 윤리(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종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과히, 기독교 신앙의 종합선물세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인문학 공부 열풍이 불었는데, 사실 인문학이란 단순한 ‘교양쌓기’가 아니라 ‘인간공부’이다. 인문학은 그 끝에서 ‘종교’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종교의 가르침을 제외시키면서 인간이해를 깊이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인간론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준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인다. 본문에서도 보면, 인간이 처한 상태는 매우 비참해 보인다. 다음 한 마디가 인간이 처한 상태를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본질상’이라는 말은 헬라어 ‘휘시스’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태생으로 결정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을 해석하면, 마치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원죄(original sin)’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매우 큰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진노를 받게 되는 존재는 마치 아무렇게나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격이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허가증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네 죄를 고백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어!” 이는 마치 구원이란 스스로 인간성을 짓밟는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신의 은총인 것처럼, 구원을 호도한다. 성경의 언어가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못 알아차리고, 그냥 문자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실수에 얼마나 많이 희생당했는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진노의 자녀’로’, 마치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진다. “내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해. 나는 진노의 자녀이니까.” 그러면서 내가 당하는 고통에 한 마디 저항도 못하고, 그 고통을 순응적으로 감내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해진다.

 

과연, 성경의 언어는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기력하게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말면, 우리는 우리에게 임하는 고통의 이유를 모두 우리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고 만다. 이런 시가 있다.

 

다리 위의 아가씨

 

우리 아버지는 왜 부자가 아니고

우리 엄마는 왜 미녀가 아니었을까?

 

저녁 강물이 어룽어룽

밀물져 돌아온다.

 

(황인숙의 시집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에 수록)

 

현대사회에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는 시이다. 어떤 차별을 당하는 아가씨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차별의 이유를 부모님에게서 찾는다. 참 슬픈 장면이다. 부자 아빠를 두지 못한, 예쁘지 못한 엄마를 둔 이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라, 이 아가씨를 차별하는 사회(사람들)의 잘못인데, 아가씨는 그 고통의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의사들이, 또는 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unknow(이유를 알 수 없다)”이다. 우리는 이유 없이 병에 걸리고, 이유 없이 사고를 당하고, 이유 없이 죽는다. 우리는 살면서 이유 없이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겪는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내 죄 때문에’이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내 삶이 이리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어떠한 고통이 발생하면, 그 고통이 주는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깊은 죄책감 때문에 더 힘들어 한다.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을 고르라고 하면, 단연 <욥기>가 뽑힐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장 심오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인간 실존과 관련해서,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가장 고민하는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심오한 이야기는 욥기가 풀어내고 있다. 욥은 남부러울 것없이 부자로 살았다. 부자는 단순히 물질이 많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풍요롭고 건강했다는 뜻이다. 왜 욥은 그렇게 부자로 살았을까? 그가 의인이어서? 의인이어서 보상으로 부자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욥이 부자로 산 것은 그저 ‘은혜’이다. 까닭이 없다.

 

부자로 살던 욥은 하루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된다.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지 못한, 비참한 상태에 처해졌다는 뜻이다. 욥은 왜 고통 당하고 있는가?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통해서 전개되는, 욥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통의 이유를 죄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친구들의 논리를 거부한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를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은 왜 고통을 받는가? 답은 “까닭 없이”이다. 그래서 욥기는 고통 또한 “까닭 없이” 주어진 “은혜”라고 말한다. 우리는 은혜를 대개 좋은 일이 발생했을 때만 쓴다. 까닭 없이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우리는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기는 좋은 일만 ‘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일도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가 가진 기본적인 뜻은 ‘까닭 없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욥은 말한다. 자신에게 까닭 없이 고통이 왔고, 나중에 욥기서 42장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또한, ‘까닭 없이’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 그는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다(은혜를 입는다).

 

원인 모르게 우리의 삶은 아프다. 까닭 없이 아프다. 지난 목요일(6월 24일 새벽 1시 30분쯤)에 플로리다에 있는 한 콘도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다. 샌드위치처럼 건물이 내려앉아 구조작업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다치거나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까닭 없이 고통을 겪는다. 원인 모르게 우리의 삶이 아프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 모를 구원 아니겠는가. 까닭 없는 구원 아니겠는가.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고통도 은혜고, 구원도 은혜다. 이것은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심오한 진리이다.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바로, 보이지 않는(영이신)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성육신 하신) 은혜’의 징표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구원을 눈으로 본다. 누가복음은 노인 시므온의 입술을 통해서 그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29-32).

 

구원론. 기독교의 구원론은 아주 신비한데, 구원이 눈에 보인다(구원을 우리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눈으로 보게끔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 이게 참 이상한 거다. 돈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은 있어도 예수가 곧 구원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보면서도! 기독교의 구원론은 한 가지 단어로 설명된다. 은혜(카리스)”. 은혜’는 ‘감동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까닭 없는”이라는 뜻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은 까닭이 없다. 즉, 은혜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해서 우리가 고통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은혜로 우리의 삶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착한 일을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좋은 일을 해서 구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이유 없이 은혜로 우리의 삶에 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정리): 기독교의 인간론. 우리는 까닭 없이 고통 당한다. 우리는 은혜로 고통 당한다. 기독교의 기독론. 구원이 눈에 보이게 임했다(우리의 감각이 알아볼 수 있게 임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게 임한 구원을 못 알아본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눈에 보이게 임한 구원을 눈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론. 우리는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믿는 자들을 어떠한 특별한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 그것을 기독교 윤리라고 부른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삶이 바로 ‘포이에마의 삶’, 즉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삶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절).

 

기독교 윤리. ‘포이에마’의 삶. 그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모호한 것은 ‘무엇이 선한 일(선한 삶)인가’이다.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 <Dogville>을 예로 들어보려 한다. 니콜 키드먼 주연인 이 영화는 매우 독특한 배경과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일단 영화의 배경은 로키산맥의 어느 시골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실제로 로키산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트장처럼 꾸며져 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그레이스Grace/니콜 키드먼)’가 마피아에게 쫓기다 도착한다. 그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복장과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피아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라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그녀를 처음 발견한 톰(폴 베타니)은 그녀를 마을로 데리고 와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주자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외부인이었던 그레이스에게 적대감을 갖고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마을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레이스와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그레이스를 찾는 현상금 수배 전단이 붙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전복된다. 그녀가 현상금이 붙은 ‘죄인’으로 인식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녀를 부당하게 착취하기 시작한다. 일감을 몰아주어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평소에 상냥하게 굴던 마을 남자들은 그녀를 겁탈하기 시작했고, 탈출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사람은 배신하고 그녀를 겁탈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누명을 씌워 그녀의 목에 쇠사슬을 감게 만든다.

 

그런데 사실, 그레이스는 어떤 죄를 지어서 현상금 수배가 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현상금 수배 전단을 붙인 마피아 집단의 두목의 딸이었다. 아빠와 딸 사이에 있었던 갈등 때문에 마피아 두목인 아빠로부터 도망친 딸을 적극적으로 찾기 위해 아빠는 현상금 수배 전단을 배포한 것이었다. 마피아 아빠는 부하들과 함께 딸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레이스에게 저지른 만행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그레이스에게 못된 만행을 저지른 마을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놓아두고 마피아 두목 아빠와 그의 딸이자 주인공 그레이스 간의 대화와 해결 방식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는 지 궁금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라.)

 

까닭 없이,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눈에 보이는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포이에마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Dogville>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선한 일’이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복장과 외모를 하고 있던 그레이스에게 처음에 ‘선’을 베풀었다. 그들은 그레이스를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선하게 대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레이스에 대한 현상금 수배 전단이 붙은 후에 발생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스를 ‘죄인’으로 인식한 순간, 그녀를 더 이상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선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레이스에게 각종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다고 하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묻는다.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너는 사람들에게 까닭 없이, 은혜를 베풀 수 있는가?” 죄는 상태방의 부패함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부패함을 드러낸다. 상대방이 죄인(약자)이라고 생각되고 인식되면, 바로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 우리는 갑자기 그 사람보다 의로운 사람이 된다. 우월한 인간이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유린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갑질을 마구 해댄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은 그것과 사실 정반대의 이야기다. 우리는 죄인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 약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지 못한다. 견디지 못한다. 죄인을 정죄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그의 생명을 좌지우지해야만 속이 시원하다. 약자에게 갑질을 해야 시원해 한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정말로 부패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죄인을 견딜 수 있는가? 우리는 약자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즉, 그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심지어 그를 나보다 귀한 존재로 섬길 수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실 의로워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 부패한 사람,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상태인데 하나님의 은혜(까닭 없이)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죄인을 보면, 약자를 보면(죄인이라는 말보다, 약자라는 말이 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내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처럼 돌변한다. 내가 마치 그보다 우월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정죄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그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 약자에게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까닭 없이)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바로 그때 증명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약자를 우리와 동등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그들을 오히려 섬겨야 할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포이에마(하나님의 작품)’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 아니겠는가.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운동’을 보면서, 사회적 약자와 배려는 없고 그들에 대한 정죄만 있는 그들의 기독교는 어떤 기독교인가, 좀 답답하고 궁금하다.)

 

우리는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죄와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까닭 없음(은혜)”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에 까닭 없이 닥치는 고통(까닭 없이 처해지는 삶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까닭 없이 임하는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까닭 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살면서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까닭 없이 구원받았으니,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죄인이라 할지라도, 더군다나 그 사람이 사회적 약자라면 우리는 온마음을 다해 ‘까닭 없이’ 그들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까닭 없이 받은 구원을 값지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갑자기 의로운 자로 돌변하여 사회적 약자를 정죄하고 착취하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세심하고 깊은 묵상이 수행되지 않으면,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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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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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6. 21. 17:03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에베소서 1:15-23)

 

주님,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진리들에 대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까지 혹시 안목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노력했다면

이제 그 부질없는 삶을 내려 놓고,

마음의 눈을 밝히기 위하여 노력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육신의 눈이 밝은 것은 우리에게 불안과 절망을 안겨 줄 뿐이지만

마음의 눈이 밝은 것은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불안할 때, 또는 절망에 빠져 들려 할 때,

오히려 눈을 감고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진리들 안에 거하게 하소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주님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이 진리들 안에 거하게 하셔서

불안과 절망을 떨쳐내고, 평안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바로 지금,

마음의 눈이 밝아진 줄로 믿사오니,

마음 가득 기쁨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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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21. 17:01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에베소서 1:15-23)

 

바울에게 에베소교회는 마음이 많이 가는 교회였을 것이다. 그곳에 두란노 서원을 세워 두 해 동안 머물며 많은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가르쳤던 곳이기 때문이다. 정성을 많이 쏟은 만큼 애정이 많이 가는 법이다. 에베소교회를 떠나온 바울은 에베소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곳에 머물며 함께 나누었던 복음에 대해서 다시 상기시키며 그들을 축복하고 있다. 특별히,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행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참 흐뭇한 장면이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15-16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예수를 주님(퀴리오스/로마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주님이다는 고백)으로 믿는 믿음과,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믿음은 언제나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주 예수가 믿음의 근거다. 주 예수 안에 근거를 둔 믿음은 사랑을 불러 일으킨다. 믿음은 수직적이고, 사랑은 수평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감격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함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한다. 이웃을 향하여 선하고 좋은 마음을 갖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것은 믿음 있는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는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 머물며 그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헬라어 원문에서 15절에서부터 23절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기도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의 눈들이 밝아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길성남, 117쪽)

 

이 기도문에서 우리는 매우 낯선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는 이야기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받아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길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마음의 눈’이라는 말은 참 생소한 말이다. 우리는 그저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뿐이기 때문이다. 시력이 흐려지면 우리는 더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거나, 또는 라식/라섹 수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는 생각을 한다. 그 이상, 아니면 이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익숙해 있다.

 

헬라어에서 ‘마음(누스)’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본문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의 마음은 굉장히 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 인간 존재의 어느 부위보다 ‘마음’이라는 곳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인간 존재 안에 있는 굉장히 신비스러운 공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그리고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세 가지 영적인 진리를 알게 된다. 그것이 바울의 기도가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이다.

 

기도를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으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알게 되는 세 가지 영적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는 것

2)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아는 것

3)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것

 

2세대 종교개혁자 칼뱅은 에베소서를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스승인 성령이 우리를 가르쳐 주기 전에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무지와 어리석은 것뿐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밀의 계시로 알려 주실 때 비로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다.”(칼뱅) 그러면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세 가지 진리, 즉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씩 풀어가보자.

 

첫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 부르심의 소망은 다음 세 가지를 포함한다.

ㅡ 나는 하늘 나라에 기업이 있어. 거기에 상속재산이 있어. (나 실은 부자야.)

ㅡ 나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신부야. (신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태에 대한 비유다: 나는 주님께 사랑 무지하게 받는 존재야)

ㅡ 완전한 평화와 아름다움은 회복될 거야. (지금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고 볼품없지만,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산다.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소망 가운데 산다. 얼마나 멋진 소망인가!

 

둘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된다. 여기서 기업(클레로노미아)는 상속 재산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하늘 나라에 재산을 많이 쌓아두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를 넘어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이었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 즉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의 존재가 그냥 볼품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인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되면 발생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것의 소유로 있는 것은 시시한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외적인 것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나는 구글 다녀. 나는 구글의 소유야. 나는 스탠퍼드 나왔어. 나는 스탠퍼드 소유야.’ 내가 속한 어느 것을 통해 나의 존재를 뽐낸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땅의 그런 것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처럼 여겨진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 3:7-9a)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기업이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영광스러운 존재야.” 이미 하나님의 기억이 되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사람은 주님 나라를 위해 자기 삶을 누추한 곳에 놓아도 개의치 않는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하듯이,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알게 된다. 그 말은 겉 형편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자신의 겉 형편으로 인하여 일희일비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기업이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영광스러운 존재야”라는 신앙고백 속에서 존재를 확인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형편을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진리이다.

 

그렇게 살았던 훌륭한 신앙의 선배가 있다. 최근 이준익 감독이 영화 <자산어보>를 통해서 새롭게 조명된 인물, 바로 정약전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더 반가운 이유는 내가 <자산어보>에 대한 글을 쓴 뒤 나온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나의 글과 영화 <자산어보>가 겹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본 영화 <자산어보>는 참 따스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삼형제도 신유박해를 피해갈 수 없었는데, 이 박해로 인하여 정약종은 순교를 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어쩔 수 없는 ‘배교’로 인하여 목숨을 건지지만,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이준익 감독이 훌륭한 것은 순교자 정약종이나, 실학자 정약용에 비해 덜 유명한 정약전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눈과 마음을 이끈다는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도 송몽규 조명 / 윤동주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인 인물). 정약용은 체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지배계급이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들을 돌보도록 “목민심서”를 통해 지배계급을 다독이는 방법을 택하지만, 정약전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그는 아예 민중들이 스스로 깨어나 빈곤에서 탈피해 자립하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실용 서적 <자산어보>를 집필한다. 정약전(설경구 분)은 그의 제자이자 <자산어보>의 공동저자 격인 창대(변요한 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않는 자산(흑산도를 일컫는 말)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즉, 정약전 자신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양반이라는 신분으로 인하여 존재감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존재의식을 통하여 존재감을 찾았기에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멋진 인생 아닌가!

 

셋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 잃게 말한다. “그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절). 여기에 쓰이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는 네 개이다. 1) 힘(이스퀴스): 힘을 행사하는 것, 2) 위력(크라토스): 가는 길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하는 힘, 3) 역사하심(에네르게이아): 내재된 힘, 4) 능력(뒤나미스):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 능력.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힘이 무한히 크다는 것 강조하는 말이다.

 

에베소서를 주석한 성서학자 부르스(Frederick Fyvie Bruce)는 이런 말을 했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다.” 하나님의 능력은 새생명을 주는 능력이며 새 창조의 능력이다. 우리가 지금 팬데믹 때문에 여러 가지 멈추어 섰다. 불안이 늘어서 정신과 치료 약 소비가 폭등했다. 많은 이들이 소멸할까봐 망할까봐 전전긍긍하는 하며 산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사실, 교회가 타격이 가장 큰 집단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힘이 무한히 크다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것, 믿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2020년 정말 멋지게 출발했다. (기억이 희미하겠지만) 교회가 아주 새롭게 출발했다. 역사 청산(아픔을 덜어내고) / 빚 청산(재정적 부담을 덜어내고), 그리고, 세화비전 2020을 향해서 출발했다. 그런데, 그게 딱 멈춰 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불멸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회는 더욱더 그러하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장엄한 언어로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귀(승천)을 통해 하나님께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은 주님이시다. 그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인 교회는 그 생명력이 무한하고 충만하다. 그 어느 것도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기운을 회복해 나간다면, 교회는 다시 활력을 찾아 주님의 몸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세 가지의 진리! 요한복음이 선포하고 있듯이,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우리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사는 이유는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그렇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여 안목의 정욕을 채우도록 혈안이지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눈이 밝아져 진리 안에 거한다.

 

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는 것

ㅡ 나는 하늘 나라에 기업이 있어. 거기에 상속재산이 있어. (나 실은 부자야.)

ㅡ 나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신부야. (나는 주님께 사랑 무지하게 받는 존재야)

ㅡ 완전한 평화와 아름다움은 회복될 거야. (지금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고 볼품없지만,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산다.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므로!)

 

2) 성도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아는 것
ㅡ “나는 하나님의 기업이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영광스러운 존재야.” 겉 형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줄 아는 사람!

 

3)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아는 것

ㅡ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능력, 새생명을 주시고, 새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삶.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을 거라는 믿음. 모든 것이 주 안에서 회복되고 형통할 거라는 희망.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알게 되는 이 진리들 안에서 멋진 인생 사는 하나님 나라의 소유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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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라 쓰고 경쟁이라 읽는다]

 

경쟁 -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설법.

공정 - '나는 너를 미워해'의 간접화법.

 

공정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을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정당화한다. 아주 부드럽게. 설득력 있게. 합리적으로. 경쟁, 또는 공정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숭고한 삶을 짓밟는 행위에 불과하다. 경쟁은 잔인하지만, 공정은 교묘하다. 그러나 마찬가지 결과다. 경쟁과 공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 저지르게 되는 결말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를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 이것만큼 불경한 죄가 어디에 있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경쟁, 또는 공정은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갈 뿐이다. 임계점에 이르면, 경쟁과 공정의 논리는 생명을 찌르는 칼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또는 누군가에게 사랑 받아야 할 인간 존재가 경쟁과 공정 속에서 모든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존재를 무겁게 만든다. 무거운 존재는 가볍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모든 술수들은 단호히 구분하고 구별하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경쟁과 공정의 논리이다. 가벼운 존재는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고 착취하고 자신의 무모하고 잔악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법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적'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죽음'의 그림자가 길고 짙고 깊게 드리운 이유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내면을 지배하는 경쟁과 공정의 논리 때문이다. 경쟁은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설법이고, 공정은 '나는 너를 미워해'의 간접화법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경쟁의 논리에서 공정의 논리로 그 이슈가 바뀌었지만, 공정을 '공정하다' 즉 'just'하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배자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것에 불과하다. 경쟁의 논리를 감춘 것이 공정의 논리다. '나는 너를 미워해'를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저항하고 적대적으로 나오니까, '나는 너를 싫어해'를 간접화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상처를 덜 받으니까. 자신이 나이스해 보이니까.

 

그러나, 그러한 화법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는 공정을 통해서 '나는 너를 미워해'의 관계를 내면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보다 '나는 너를 미워해'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고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더 많은 욕심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공정의 덫에 빠져 있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한국 보수당의 새로운 젊은 총수가 '공정'이라는 가치를 들고 나왔다는 말은 사회가 '공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공정의 덫'이 더 강력해졌다는 뜻일 뿐이다. 공정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덫'이라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하고, 그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는 너를 미워해'의 직접화법인 경쟁과 그것의 간접화법인 공정의 말에 귀를 닫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여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직접 보여주신 '나는 너를 사랑해'의 새로운 말과 세상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일이 더 많은 세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먼저 '공정의 덫'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 할 것!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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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브라보! 그렇습니다. 희락당 덕에 다시 한번 사람과 세상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를 돌아봅니다.

    2021.06.21 18:12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6. 13. 19:04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인의 삶을 살기 간구하는 기도

(엡 1:1-14)

 

주님, 우리는 공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선 존재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화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능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사로운 개인의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공인으로서의 삶으로 부름 받았으니,

주여, 우리를 거룩한 무리, 신실한 자들로서

찬양하는 언어, 감사하는 언어, 세워주는 언어를 쓰며

생명이 형편없이 망가져가고 있는 이 세상을 치유하는

공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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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13. 19:03

누가 공인(公人/public figure)인가?

(에베소서 1:1-14)

 

나는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얼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얼굴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인기인’이지 ‘공인’이 아니다. 공인이란 공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연예인은 대중들에게 널리 인기가 있을 뿐이지 그들이 하는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사적인 일이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이지, 대중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면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공무원을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무원은 국가라는 제한된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뿐이지, 존재의 보편적 차원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공인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공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말씀은 왜 그리스도인이 공인인지, 그리고 공인이란 무엇인지, 공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公人)’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자기 인식이 꼭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라는 자기 인식이 흐려지면,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익집단(이익집단/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집단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는 바울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것은 바울의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우리는 바울의 이름 논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은 바울의 이야기를 은혜롭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을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히브리 사람이다. 히브리 사람으로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인으로서 바울은 로마식 이름(Roman surname)인 ‘바울(파울로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고정해서 사용한 이유는 그가 예수의 부르심으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서 겸손의 표현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사명 때문인데, 본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이름인 ‘바울’을 사용한 것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삶을 공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그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선포였던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지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동안에 그와 함께 있었고, 또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가리킨다(행 1:21-22; 고전 15:4-5).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다른 열 두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동행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바울의 등장은 성령강림절 후, 예수님의 승천 후,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해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 칭한 것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때문에 그렇고, 무엇보다도, 그 체험으로 인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즉, 자신의 삶이 사사로운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공적인 삶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사도’로 부른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공인’이다. 그는 더 이상 개인의 사사로운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의 인생, 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행동이나, 그가 하는 말은 사사로운 개인의 말, 행동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적인 말, 공적인 행동이 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안에서 자기 자신의 인생을 공적으로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특수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삶이 공적인 삶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공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바울의 이야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편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표현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바울이 수신자인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헬라어 원문에는 ‘편지하노니’라는 말이 없다. 이것이 그냥 편지이기 때문에, ‘편지하노니’라는 말을 덧붙인 것 뿐이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성도’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하기오이/saints)’라는 뜻이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도덕적으로 성결하다는 뜻이 아니다. ‘거룩한’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거룩한 무리’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무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가 거룩한 무리라고 불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때문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과 관련된 용어이고,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난 인간인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의 삶을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생득적으로 ‘공인’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에 ‘관계(relationship)’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적 용어, 관계적 삶, 공적인 삶을 낯설어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의 삶, 사사로운 삶’을 강조하고, 그것이 자유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어 놓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공공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 알고 그것을 강화시키지, 자기의 삶을 공적인 삶으로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삶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다니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발생하고 있는 슬픈 현상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을 ‘성도’라고 부르는 동시에,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신실한 자들’이라고 번역된 ‘피스토이’라는 헬라어는 수동적 개념으로 ‘신뢰할 만한’이라는 뜻도 있고, 능동적 개념으로 ‘신뢰하는’이라는 뜻도 있다. 수동적인 개념을 생각해 보면, 성도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거룩한 무리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서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러한 신뢰 없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겠는가. “나는 여러분을 신뢰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우리는 서로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지난 달에 한국갤럽에서 한국종교에 대하여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17%, 불교 인구는 16%, 가톨릭 인구는 6%로 집계됐다. 무종교인은 60%로, 한국갤럽이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무종교인 중 82%가 말하기를 ‘종교는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호감가는 종교는 불교가 20%, 가톨릭이 16%, 그리고 개신교가 6%였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이 ‘공인’으로서의 삶을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스스로를 ‘공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들(피스토이)의 능동적 의미는 ‘신뢰하는’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신실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믿음은 관계적 용어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을 사사롭게 개인적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관계적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적인 삶, 공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은혜와 평강(grace and peace)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 ‘은혜(카리스)’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가 주어지면, 우리에게 평화가 임한다.

 

성서학자들은 개정개역에서 ‘평강’이라고 번역된 우리말을 평화(에이레네)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강’은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말하는 것인데, 히브리어의 ‘샬롬’을 표현하고 있는 헬라어의 ‘에이레네’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평안을 넘어 관계적 의미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적 평안을 나타내는 우리말은 ‘평화’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는 관계적 평화를 이룬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너와 나 사이의 관계적 평안’이 임한다. 그렇지 않은가? 값없이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값없이 베풀지 않겠는가? 그렇게 서로 값없이 베푸는 관계에는 텐션(tension/긴장감)이 흐르지 않고, 평안이 흐르는 법이다.

 

그러나, 이 은혜와 평화의 가치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형편없이 무너져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의 열매로 생각하려 한다. 열심히 일해서 내가 모은 재산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간 것이고,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이고 등…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자기의 성취에 근거한 것이고, 그래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야 사랑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그렇다. 자녀가 부모의 자랑이 되어야 자녀는 사랑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성장하면서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차별비교경쟁 속에서 서로 간의 관계적 평화를 잃어간다.

 

이와 달리, 거룩한 삶, 신실한 삶, 공인으로서의 삶(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 삶일까? 그것은 3절 이하에 등장하고 있는 ‘영광송’이 가르쳐 주고 있다. 바울은 편지의 시작을 ‘영광송’으로 하고 있다. 공인으로서의 삶은 영광송(doxology)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송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3-6절은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 선택과 예정(계획하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7-12절은 성자 하나님이 하신 일, 구속(redemption)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고, 13-14절은 성령 하나님이 하신 일, 인치심과 보증(성령 하나님이 성도들 안에 내주하신다: 구원의 완성과 풍성한 삶에 대한 보증)에 대하여 영광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이제 공인으로서의 삶이 된 것은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에 관계적으로 엮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이제 개인적인 사사로운 삶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간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이제 더 이상 사사로운 개인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영광송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일상의 언어가 모두 기능어로 전락하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을 지적하는 학자가 있다(<After Writing>, 캐서린 픽스톡). 우리 일상언어를 보면 서로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언어만을 쓸 뿐이다. 작업지시언어. 마치, 컴퓨터의 자판처럼 무엇인가를 기입하고 나서 엔터를 치면, 그것대로 실행하는, 기능어 말이다. “빨리와. 밥먹어. 공부해. 피아노쳐. 밥차려. 설거지해. 씻어. 문닫어. 불꺼. 컴퓨터 그만해. 운전해. 전화해. 예약해. 빨리자. 일어나. 등등등” 이런 기능어 외에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고 사는가?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언어인가? 서로를 찬양하는 언어인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언어인가? 서로를 세워주는 언어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서로에게 쓰는 언어는 너무너무 기능적인 언어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제 ‘공인’으로서 기능어를 쓰지 않고 영광송(doxology)의 언어를 써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에 은혜와 평화가 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그리스도인의 공적 삶이 너무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기능어만 사용하다 보니, 관계가 메말라 있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끼리 너무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사람은 자연을 착취하고, 자연은 사람에게 반격하여 해를 입힌다. 평화가 없고, 근심과 걱정과 절망과 한숨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을 치유하라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누가 공인인가? 연예인이? 공무원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공인이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성취하신 구원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그 구원이 종말까지 보증되는 우리의 삶은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능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광송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상처주고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워주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해를 입히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공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찬양하는 언어, 감사하는 언어, 세워주는 언어를 쓰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들로 인하여 생명이 더 풍성한 세상이 될 거라 믿는다. 공인으로서의 그 거룩한 삶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자.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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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1. 6. 6. 19:02

자기로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삼상 8:1-19)

 

주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남처럼 살면 안 됩니다.

주님,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산다는 것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오니,

주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나에게 주신

주님의 생명을 온전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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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6. 6. 19:01

자기로 살기

(사무엘상 8:1-9)
 

오늘 본문은 위로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다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1-3절).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위로가 된다. 사무엘이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이면서 사사이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굉장한 영성과 굉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지도자 중의 지도자였다. 게다가, 그의 엄마는 어떠한가? 그렇게 유명한 엄마를 두는 게 쉽지 않다. ‘한나(Hannah 해나)’. 얼마나 유명한지, 그녀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여성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사무엘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유명한지, 그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남성의 이름도 너무 많다. 너무 유명해서, 그의 이름은 ‘개’에게도 잘 붙여진다. 내가 기억하는 나 어릴 적 우리집 개의 이름도 사무엘이었다. ‘Sam/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 한나의 손자와 사무엘의 아들답게 이름도 멋지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개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서 짓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한나와 사무엘의 자손답게, 요엘과 아비야는 ‘요와 야’, 즉 여호와의 약자, 여호와의 이름을 담아낸 이름이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가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아서 지었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 이름을 짓는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찬양이고 영광이었는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름이 곧 꿈이고 욕망이다. 이름에 꿈과 욕망을 담기보다 신앙고백이 담기면 좋겠다.

 

위대한 할머니와 위대한 아버지를 둔 요엘과 아비야, 그리고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을 가진 요엘과 아비야, 그런데 이들은 아버지처럼 훌륭한 제사장과 사사가 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버지에 한참 미치지 못한 아들들로 역사에 기록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아무리 위대한 할머니라도, 아무리 위대한 아버지라도 그 자식들은 마음대로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자식 낳아서 기르는 것을 ‘자식 농사’라고 표현한 것 같다. 농사는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하늘이 제때 비와 햇볕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풍년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원래 농부들의 신앙이 깊은 것이다.

 

사무엘이 여러가지 면에서 스승 엘리 제사장보다 뛰어난 지도자였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함께 지냈다. 사무엘은 스승 엘리 제사장의 두 자녀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은 스승님보다 자식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나중에 자신의 자식들이 스승님의 자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그때 비로소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위대한 사무엘이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도 자식 문제만은 어떻게 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몰라도 자식 문제만은 더욱더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패러디해서 자식에게 적용하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무릇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자식한테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모두, 맡길 만한 것보다 더욱 자식을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다.

 

사무엘의 두 아들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이어서 장면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라마에 살고 있는 사무엘에게 찾아가 엄청난 요구를 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요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5절).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이유를 두 가지 대는데, 하나는,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는 달리 듬직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이유이다.

 

이들의 요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즉, 왕을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떼를 쓰며 표면적으로 댄 이유는 사무엘과 사무엘의 자식들 때문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겉으로는 사무엘의 연로함과 그의 두 아들의 부족한 지도력 때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에 들어 있었다. 즉, 그들은 나른 나라에 있는 ‘왕 제도’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무엘은 마음이 불편했다. 첫째,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말해서 빈정이 상했고, 둘째, ‘왕을 세워 달라는 것’ 자체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빈정상하고 속상할 때, 사무엘이 보인 반응이 참 은혜롭다. 그들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누구의 위로보다 하나님에게 위로 받을 때, 진정 마음에 평안이 오는 법이다. 빈정상하고 속상했던 사무엘도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내를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절). 사무엘은 자신의 연로함과 자신의 자식들을 탓하며 왕을 세워 달라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으며 ‘이제 사람들이 나를 내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서운했을 그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들의 속내를 알게 되면서 위로 받는다.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사무엘을 내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사무엘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며 ‘모든 나라와 같이’라고 할 때 ‘모든 나라’는 주변국들이었다. 특별히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다섯개의 도시들(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이 연합해서 만든 블레셋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주변국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렸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원수처럼 굴었는데,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어놓으면 어김없이 와서 약탈해 갔다. 정말 못살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자신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강력한 왕정 체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요구가 정당해 보인다. 누구든지, 안전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엘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욕구, 즉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했다”는 문자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그것은 사무엘의 눈에 악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무엇이 악한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그 소임과 특권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처럼’ 되려고 한 것이 악한 것이다.

 

뉴스에서 중국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중국의 인구가 13억 정도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구가 너무나 많다 보니까, 1980년도부터 중국은 산아제한 정책(birth limits policy)를 강제해왔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많아 짐에 따라서 경제활동이 가능한 연령대의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기에, 인구가 13억 정도되니까,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가 엄청 많을 거라고 짐작하는데, 13억 인구가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폐지하고, 노동 가능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은퇴 나이를 올리기로 했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가 씁쓸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중국이 그러한 정책을 펴는 이유는 중국 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굴기 정책’ 때문이다. 중국은 나라를 ‘성공적인/번영하는 소비 사회’와 ‘세계적인 기술 선두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입장에서 인구의 고령화나 노동인구의 감소는 그러한 정부의 정책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구가 망가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비사회’와 ‘무분별한 기술개발’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이 바로 그 지구를 멸망하게 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다른 나라들’처럼 되겠다고, 그래서 이 세상의 최고 강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쉽다. 중국이 중국답지 못하고, 그저 다른 나라들, 그것도 지구를 망치는 나라들을 따라하겠다는 것 자체가 실망인 것이다. 만약 중국이 중국의 유서 깊은 유가나 도가, 또는 묵가의 사상에 따라, ‘소비사회’나 ‘기술사회’가 아닌 ‘덕의 사회’를 세워 나가겠다고 자신들의 길을 걸었다면, 이 세상의 판도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미 멸망해가는 다른 나라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을 추월하겠다고 하니, 지구가 망가지는 속도는 더 가팔라 질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필요한 나라가 아니다. 왕정 제도가 있더라도 ‘나른 나라들’처럼 왕정 제도를 두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선택받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세우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미’ 계시기에, 다른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두지 않아도 된다. 만약 이스라엘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자기들의 소임과 책임을 다했다면, 오히려 주변 나라들이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기어코 왕정 제도를 갖추었고, 왕이 있으면 그 왕을 통해서 더 안전한 나라, 더 번영하는 나라가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열왕기상하의 말씀이 전해주고 있듯이, 바로 그 왕정 제도 때문에 망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했다가,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도 ‘자기로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살려고 하면, 나를 지키지 못하고 만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조에/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내어놓으시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생명)’를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이들처럼’ 살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왕이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살면 된다. 자기로 살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이 가르쳐 주고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사무엘이 다른 것은 다 주님께 맡겼는데, 자식 문제만큼은 주님께 맡기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있는가?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는 했지만,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나라도, 민족도, 개인도 모두 자기로 못살고 누군가를 따라가려 한다. 부탄 같은 나라, 얼마나 멋진가? 그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 왜? 다른 나라를 따라가려 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보라, 얼마나 힘든가?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을 따라가느라 모든 게 종속되어, 거기가 한국인지, 아니면 미국의 51번째 주인지 모를 정도로 나라 자체의 정체성이 위기를 겪고 있다. 요즘 개인들의 삶을 보라. 얼마나 다른 이들을 따라 사는가? 다른 이들과 동일한 의식주를 누리지 못하면 수치스러워 한다. 남을 따라 사느라, 남 신경 쓰느라, 자기로 살지 못해, 행복하지 못하다.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지금 모든 면에서 자기로 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나라를 따라서’, ‘다른 사람을 따라서’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냥 ‘자기로 살면’ 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사는’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는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지금 내가 힘쓰고 애쓰는 바로 그것,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을 위해 걱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주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들고 어려웠더라도 그들의 삶의 문제를 더욱더 주님께 맡겼다면, 사무엘이 늙었어도, 사무엘의 두 아들이 사무엘처럼 듬직하지 못했더라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사무엘과 같은 지도자를 저들에게 보내주실 것을 믿고, 그 문제를 주님께 맡겼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 열방들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그 실패의 역사가 구약성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담은 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주님께 맡기는 것을 실패하고 있는가, 성공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자기로 산다는 것은 곧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자기도 지키고, 주변의 사람들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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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이 토모아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를 다시 읽다

ㅡ 신학은 종말론적 지성이다.

 

"신학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그때까지 인간을 잠정적인 존재로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적인 작업은 가설이며 언제나 상대화될 수밖에 없음을 신학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역사도, 현실도 끝나지 않은 이때, 죄인인, 불완전한 인간은 진리의 일부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신학적 지성'이며 달리 말하면 '종말론적 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194쪽)

 

3년 여 전, 일본학자가 쓴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의 학문도 성장한 바, 다시 읽어본 이 책은 '여전히' 참 좋은 책이었다.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를 묻는 책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 신학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기독교의 사회사를 심도 있게 보여준다.

 

실전에서 목회하는 이들에게는 제7장 '실용주의로서의 신학'이 매우 도움될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기독교 신학이 청교도 DNA에 따라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실용주의'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는지, 그리고 '쓸모'에 방점을 두는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 안에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실제적' 도움이 될지, 상당한 통찰을 전해준다.

 

그러나 '미국적 기독교'가 가져다준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기에,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은 미국적 기독교를 마냥 환영하고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 또한 떠맡게 된다. "즉 시장화된 신학계에서 그 신학의 좋음과 나쁨, 진리성을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교파의 지도자, 대학교의 신학자들,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비자들, '대중(교인/나의 첨가)'이다."(174쪽). 이 말은, 곧 시장화된 교회에서 목회자가 '장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될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적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성공은 '시장화된 교회'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다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목회의 성공 신화'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먹히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자본가적 스펙/교회 운영을 잘 할 것 같은 스펙)을 쌓으면 시장화된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청빙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 원리를 아는 목회자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을 쌓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고, 목회 성공의 기회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스펙 쌓기 때문에, 그렇게 스펙을 쌓은 목회자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바람에 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교회와 목회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 '신'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시장의 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할 것인가. 목회란 시장의 개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하는 것인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시장이 보장해 주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삶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시장의 권력은 강력하고, 우리는 벌거벗었고.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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