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개혁주의 유감]

 

공부를 하다 보면 여러 책을 읽게 되고 그 책들의 특징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그런데, 복음주의나 개혁주의에 속한 학자들 또는 작가들, 목사들의 책을 읽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들에게는 '침대'라고 하는 자신들의 스탠다드, 또는 교리가 있다. 그 교리에 맞춰 이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함께 머물며 '그것으로부터의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이미 형성된 시선을 통해서 그것을 재단한다. 그래서 그들의 해석은 '해석'(hermeneutics)이라기 보다 '판단'(judgement)일 때가 많다.

 

시를 읽다 보면 좋은 시와 별루인 시를 구분하게 되는데, 좋은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이고, 별루인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실패하는 시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참 어렵다. 이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눈이 얼마나 복되지 못한 지, 우리는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왜곡한다. 좋은 시는 왜곡해서 보고 있는 그것을 바로잡아 있는 그대로 다시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좋은 학자들의 책은 언제나 한 편의 시를 읽은 것 같다. 이렇게 한 편의 시와 같은 책들을 읽어야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 또는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 그것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에 익숙한 것에 머물려는 습성 때문에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재구성하여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여주려고 하는 시 한 편과 같은 책 읽는 것을 두려워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책과 개혁주의자들의 책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의 성서해석은 정직하지 못하고 그들의 세상해석은 판단(judgement)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죄가 심하다. 그들은 사물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들이 말해주는 것에 귀 기울이기 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때가 많다. 소통이나 교감, 또는 관계 맺음이 없고, 일방적인 강요와 종속, 또는 복종이 있을 뿐이다.

 

복음주의, 즉 미국의 백인 남성 중산층의 시선이 기독교의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개혁주의, 즉 칼뱅의 신학적 견해가 기독교의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딱 맞는 신체를 갖고자 하는 것은 그 신화적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 침대에 누웠던 모든 이들이 잘려 죽거나 늘어나 죽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을 멈추게 한 것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였다.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발전을 이루려면 스스로 테세우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학적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부수고, 좀 솔직하고 정직하게 성경 텍스트나 이 세상을 들여다보며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주류 신학자들(사상가들)과 활발한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다행이 기독교 신학자들/목회자들 중에는 테세우스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만들지 않고, 그것을 깨부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을,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과 건강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책을 만나면 하나님께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읽은 것처럼 영혼이 맑아진다. 그리고 영웅 테세우스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우쭐하다.

 

우리 모두,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질 때까지 분발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