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0. 12. 9. 23:52

나는 여기서 2천 년을 살았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 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는 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망하지 않았다, 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들이 신기해 하는 것은

내가 단순히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썩은 음식을 먹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안다.

썩은 음식을 먹는 나를 보면서

썩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나, 생각 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왜 썩은 음식을 먹는지.

기껏 생각해봤자, 돈이 없어서, 그야말로 거지여서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천 년을 로마에서 살아온 나는

돈이 없어서, 그야말로 거지여서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2천 년을 로마에서 살아온 나에게

가장 정다운 냄새는 바로 썩은내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도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썩은 음식을 먹는 나를 보면서

신기한 듯 그냥 지나쳐버리고 있지 않는가?

당신 손에 들려 있는 빵조각을 더 힘차게 움켜쥐면서.


* 떼르미니 역은 이탈리아 로마의 중앙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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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