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1'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04.11 믿음이란 무엇인가 1
  2. 2016.04.11 교회의 터 (바울의 교회론)
  3. 2016.04.11 부활이란 무엇인가 1
  4. 2016.04.11 눈감고 눈뜨기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34

믿음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5:1-8)

 

성경에서 개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란 구원에서 필수 요소이다. 의는 신체의 피와 같다. 피를 다 흘리면 죽는 것과 같이, 의가 없으면 죽는다. ‘저 사람은 피가 달라할 때 쓰는 것처럼, ‘란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의 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다. ‘신적인 의를 말한다. 문제는, 를 어떻게 감지하고,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삼느냐이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다. 피를 몸 속에 유지하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인 것과 같다.

 

로마서에서는 의가 세 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서, 둘째는, 율법에서,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로마서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58절에 드러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선, 죄인이라는 개념을 보자. 죄는 매우 신학적인 개념이다. 죄는 매우 아슬아슬한 개념이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관련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거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통상적인 개념에서는 이 모두 죄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일을 말하고 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는 아브라함이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이는 다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을 오히려, 의인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다말의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롭도다)”라고 말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아브라함과 다말의 이야기가 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인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 죽여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그러거나, 간음을 해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이러면 안 된다. 그래서, 죄라는 개념은 아슬아슬 한거다.

 

여기서 핵심은, ‘란 철저하게 신학적 용어라는 뜻이다. 죄는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에서의 죄는 참으로 비참하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한다.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어둠 속에 내던져진 상태이다.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한국의 전례 동화 중에, <해와 달>이라는 전례 동화가 있다. 엄마가 시장에 가서 아이들을 주려고 떡을 사오는데, 그만 산길을 걷는 중 해가 지고 말았다. 얼마나 불안한가. 죄의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컴컴한 밤에 산 길을 헤매는 것과 같다. 밤 중에 산길을 걷는 엄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호랑이가 나타나서 엄마를 위협한다. 호랑이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하면서 엄마를 괴롭힌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들이 난무한 가운데, 그 거짓말에 의해 인생이 망치게 된다. 호랑이는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계속 엄마에게 떡을 요구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엄마는 호랑이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고, 그 말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얼마나 가련한가? 호랑이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호랑이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런데, 어떠한가? 호랑이가 떡을 자신에게 건네준 엄마를 살려주는가? 결국,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는다. 죄란 이런 것이다. 죄 가운데 있으면, 거기에서 어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속임수에 넘어가 그곳을 떠돌다, 결국 죄 속에서 죽게 된다. 죄의 끝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위협, 호랑이의 위협은 계속된다.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과 딸은 어둠 속에서 가슴 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엄마가 왔다. 아이들은 엄마가 떡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호랑이였다. 그들도, 어둠 속에서 호랑이에게 꼼짝 없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호랑이도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내려온 동화줄은 튼튼한 동화줄이었고, 호랑이에게 내린 줄은 썩은 동화줄이었다. 아이들은 튼튼한 동화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구원 받았고, 호랑이는 썩은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다 허공에서 그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

 

아이들에게 동화줄은 구원이지만, 호랑이에게 동화줄은 심판이었다. 왜 그런가? 아이들에게는 가 있고, 호랑이에게는 가 있기 때문이다.

 

의의 속성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우리가 캄캄한 밤 가운데에서,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동화줄을 내려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동화줄을 내려 주실 거라고 믿었다. 의심하지 않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다. 믿음이란 바로 이 안에서 작동한다. 믿음은 그에 대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랑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동화줄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화줄이 내려오기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사랑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호랑이처럼,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 아이들을 잡아 먹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동화줄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듣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여러분의 욕망을 믿음이라는 것에 덧입혀 낭비하지 말라. 호랑이의 마음을 버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가지라.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그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바로 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참으로 의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셨는가? 그 사랑 안에 거하시겠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 있는 자이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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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9

교회의 터 (바울의 교회론)

(고린도전서 3:16-23)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600장에 보면 <교회의 참된 터는>이라는 찬송이다. 거기의 첫 가사는 이렇다.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 흘려 샀으니 땅 위에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이 찬송은 우리가 오늘 살펴볼 고린도전서 3장 중에서 11절을 가사화한 찬송가이다. 고린도전서 311절은 이렇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린도교회는 파당이 여럿 있었다. 하나는 바울파, 다른 하나는 아볼로파, 또 하나는 게바파이다.

1) 바울파: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철학에 거부감을 가졌던 그룹

2) 아볼로파: 엘리트 그룹, 인간의 지혜와 세상 학문 강조

3) 게바파: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의 그룹, 율법중심주의

 

, 고린도교회 분열의 근본 원인은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그 터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볼로파는 세상이 지혜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거시고, 게바파는 율법을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터로 삼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교회의 터로 삼는 우매함을 보인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교회 내에 존재하는 신령한 자들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신령한 자들이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다. 사실, 교회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평안하겠는가? 그런데, 현실교회에는 육신에 속한 자들도 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란 믿기는 하지만 성령보다는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게 고린도전서 31절과 2절의 내용이다.

 

신령한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살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산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522절에 아주 잘 나와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와는 대조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들이 맺는 육신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19-21절에 잘 나와 있다. “육신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들은 안 믿는 자들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믿기는 믿되, 아직도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을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런 자들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어린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 자라지 못한 존재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함이지만, ‘어린아이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스도 안에서 망나니’.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주목하는 육신의 열매시기와 분쟁이다.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가장 큰 문제가 시기와 분쟁이었다는 뜻이다. 각 파당끼리, 서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에 평안이 있었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내세우고 있는 원리가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기를, 각 파당이 추종하고 있는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는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사역자들이라고 한다. 사역자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이는 주의 복음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서로 경쟁이나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마시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새로운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라. 주의 복음을 위해 서로 섬기고 봉사하시라.

 

사도 바울은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 세워져 가는 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9). 여기서 하나님의 밭은 수많은 곡식과 열매를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의 집은 가족과 평안과 보호를 생각하게 하는 비유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곡식과 열매를 맺는가?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가족, 평안, 보호’, 이러한 단어가 떠오르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 더 쉬운지 아시는가? 사실, 사역자를 추종하는 것이 더 쉽다. 그리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사역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게 가장 어렵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로 하더라도, 각기 다른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생각해 보자. 건축의 질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건축자재로 결정 난다.

 

<돼지삼형제>라는 동화를 아실 것이다. 돼지삼형제가 살았는데, 각자 집을 지어 살았다. 첫째 돼지는 초가집을 지었고, 둘째 돼지는 나무로 된 집을 지었고, 셋째 돼지는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집을 지었다. 늑대가 돼지삼형제를 잡아 먹으러 왔을 때, 첫째 돼지의 초가집과 둘째 돼지의 나무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에 훅 날아가버리다. 그러나,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셋째 돼지네 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을 견뎌내고, 결국 돼지삼형제를 늑대로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준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비유를 쓴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의 건축 자재를 말한다.

1) ,,보석: 이것은 최고의 건축재료이다.

2) 나무: 이것은 보통의 건축재료이다.

3) 풀이나 짚: 이것은 임시 건축재료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건축 자재는 성도들의 교회생활의 질 또는 믿음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건축 자재인 금,,보석으로 집을 짓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건함과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 가운데 기쁨으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보통의 건축 자재인 나무로 집을 짓듯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임시 건축 재료인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듯이,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지금 내가 어떠한 건축 자재로 성전을 지어 신앙생활(교회생활)하고 있는지는 위의 돼지삼형제의 이야기에서처럼, 바람이 훅 한 번 불면, 하나님의 불(시험, 연단)이 한 번 임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4, 15).

 

엉성한 건축 자재로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6, 17).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있는 교회공동체 최고의 적으로 자기 자랑 그리고 자기기만을 지목한다. ‘자랑은 고린도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자랑의 핵심은 세상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이는 현상이 자기기만이다. 기만이란 속이는 행위인데, 자기기만이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신앙생활(교회생활)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파당을 짖고 분쟁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스스로 속이는 자들, 즉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 자기의 지혜, 지식이 얼마나 형편 없고 조잡하고 어리석은지 모르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가 맞다고 착각하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런 자들을 자기기만에 빠진 자들이라 한다.)은 약도 없다. 전형적인 사람들이 기독교 이단들이다. 그리고 스스로 도를 깨우친 양 공동체와 섞이지 못하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18절에서 20절의 말씀에 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우리가 알듯이,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지혜가 되고 구원이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교회의 터를 삼고 있는가? 우리는 때로, 교회는 이래야 돼, 저래야 돼, 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토대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한다. 교회의 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앙은 절대적으로 이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를 세워 나가는가? 금은보석?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나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풀이나 짚?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로 신앙생활 하는가?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자.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평안 가운데 살게 될 줄로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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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3

부활이란 무엇인가?

(고전 15:12-19)

 

일단, 부활이란 무엇인지를 오늘 다 말할 수도 없고, 평생을 다 말해도 알 수 없는 것임을 먼저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안다기 보다,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부활을 알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우리는 금요일에 성금요일 예배를 드렸다. 성금요일을 영어로 ‘Good Friday’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오면서, 엄마가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Good Friday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다.” 그랬더니, 작은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Good이야?”

 

아이가 똑똑한가? 사실, 똑똑하다기 보다, 순진한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도 아이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봐야, 세상은 더 잘 보이는 법이다. , 아이처럼 우리는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질문할 줄 모른다와 동의어다. 나이를 먹으며 질문이 줄어드는 이유는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눈과 귀를 닫기 때문이다.

 

어떤 분과 카톡으로 나눈 대화인데, 좋은 교육 교재가 될 수 있기에 사용한다.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마시라. 이분을 정죄하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순전히 교육용으로 쓰는 것이다. 오타는 내가 수정한 것이다.)

 

잘 보았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인데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부활이 아닌 것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의 풍습으로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진정한 참 숭배가 아님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승인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기념하라고 부탁하심을 그저 따르기만 해도 되는 것을 구태여 온갖 불필요한 것들로 대신하는게 과연 올바른 숭배일까요? 부활절이란 성서에도 없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교행위인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죠. 예수의 생일도 기록되지 않아 고대 태양신을 섬기던 날로 예수 생일이라 만들어 행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자중해야 할 일입니다. 원래 하느님 백성은 생일을 지내지 않았습니다. 성서에도 생일 때 살해사건이 두 번 나오는데 그 왕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부처는 생일이 기록돼 그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예수의 생일을 경축하기을 원했다면 성서에 그날이 기록되어 있었겠지요. 성탄절을 만들어 지키는 일은 하느님을 모르는 불교와 뭐가 다르겠어요. 성서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알려준다고 봐야죠. 보내주신 카톡 고마웠어요. 성서와 하느님에 관한 토론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이 도전하고 있는 문제는 첫째, 부활절 달걀 사용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부활절기와 성탄절기 같은 것을 왜 만들어서 지키느냐 이다. 모두다 이교도들이 하던 일이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나는 이분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지 모르겠다. 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으면 좋겠다.

 

부활절에 달걀을 사용하게 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실 때 잠시 십자가를 대신 져준 구레네 시몬의 직업이 달걀장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암탉들이 낳은 달걀이 모두 무지갯빛으로 변해 있었기에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꼭 이런 전설때문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나라가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지도 않는다.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가 부활절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데는 구한말에 있었던 독특한 경험 때문이다.

 

구한말 가장 흔한 병이었던 학질(말라리아)에 특효약인 키니네(quinine·한자로 금계랍·金鷄蠟)를 당시 무역상사가 수입을 했고 이를 다시 전도사들이 사들인 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방에 되팔기도 했다. 약을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닭이 그려진 약병과 복음서를 함께 샀기 때문에 복음서나 예수교를 생각하면 닭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금계랍을 먹고 병이 나으면 복음서를 읽게 되니 닭은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 닭이 가져다 준 달걀이야말로 하나의 큰 선물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가난하던 시절, 달걀 하나만 먹어도 영양이 보충되던 때에 달걀이 가져다준 의미는 매우 컸다. 옛날 옛적 어린 시절, 달걀은 그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다.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라도 들어있으면 행복했다. (소풍 갈 때 빼놓지 않은 메뉴가 삶은 달걀이었다.)

 

복음은 언제나 이렇게 그 지역의 문화를 그릇 삼아서 전파된다. 이것을 복음과 문화(기독교와 문화, 또는 토착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성례전신학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성례전은 두 가지 (가톨릭은 7가지)인데, 그것이 세례와 성만찬이다.

 

성례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은혜의 경험을 말한다.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경험이란 아주 절대적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 즉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보거나 하지 않은 것을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오해한다. 가장 오해가 많은 기독교 용어가 믿음이다.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그렇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한 오해이고, 틀린 말이다. 기독교는 망상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경험의 종교이다. 왜 그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성육신 한 하나님이다. 성육신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헛되이 믿는 허망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믿기 때문이다. 그것을 욕심 또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어른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니, 벌거벗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야 임금님에게 벌 받지 않으니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이는 어린아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복된 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활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 허망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통해 눈에 보이게 끔 드러난, 하나님의 생명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인류는)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에서 활동 하시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한 사람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했다.

 

성경에 ‘yadah(야다)’라는 단어가 있다. ‘안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경험하다’, ‘성관계를 맺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통달하다는 뜻과도 같다. 누가 나를 가장 잘 알까? 부모님과 남편(아내)이다. 부모님은 나를 통달하고 있다. 나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남편(아내)는 나를 통달하고 있다. 서로 알몸을 드러내놓고 서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메타포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부부관계(결혼관계)로 표현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경험한다, 통달한다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간다. 부모님은 우리를 통달하기만 하셨는가? 부부끼리는 경험만 하는가? 아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부부끼리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통달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경험하고, 그리고 그 경험한 것을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상대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나느냐?”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예수의 부활이 전파되었다.” ‘전파되었다는 것은 15절 전반부에서 말하고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는 뜻이다. , 제자들과 몇몇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다.

 

부활의 증언을 듣는 우리들도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부활한 예수의 몸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는 위에서 어느 누가 제게 카톡으로 문제제기를 했듯이 이교도의 풍습을 지키는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 경험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그것을 눈으로, 모든 감각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야로밀의 질문이라는 글이 있다.

야로밀이 물었다.

"네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니?"

.

.......

.

"내 안의 세계?"

.

나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묻는 사람은 있었어도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

야로밀이 말했다.

"너는 불쌍한 아이로구나."

.

한 번도 나는 나를 불쌍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안에 어떤 세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안에 있는 세계 대한 목마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

"네 바깥 세상은 네 안에 있는 세계에 비하면 누추하고 재미없단다. 네가 만약 네 안에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나면 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거란다. 네 안에 있는 세계 이외의 세계는 모두 신기루란다."

야로밀이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나면, ,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하고 나면, 이 세상의 일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거다. 여기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다. 눈으로 보여주는 데도 믿지 못하는 믿음 없는 자들이 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눈에 보이게 끔 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해 보시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라.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정말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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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1:02

눈감고 눈뜨기

(행 9:1-6 / 21:15-17)


우리는 예수의 부활 이후의 삶을 산다. 부활 이전의 삶과 부활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세상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지난 주에 말했다.

 

잠시 눈을 감아보자. 다시 떠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아무 것도 안 보이는가? 이번에 다시 눈을 감아보자. 다시 떠보자.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예수님이 보이는가?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설교를 마쳐도 된다.

 

어디에 눈뜨고 있었는가? 대개 우리는 자기 일에 눈 뜨고 산다. 대개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먹고 사느라 바쁘다. 다른 곳을 돌아볼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자신도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위안을 한다.

 

1년 동안 한 권의 책 이상 읽은 비율을 따지는 것을 독서율이라고 한다. OECD 국가 중 한국의 독서율은 74.4%(2013년 기준)이다. 이것은 15세 이상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성인을 기준으로 하면, 독서율은 65% 정도다. 다른 말로 하면, 성인 10명 중, 3-4명 정도는 일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읽는다. 그런데, 서점가에서 유독 잘 팔리는 책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서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다 보니, 남들보다 더 뛰어난 그 무엇인가를 계발하기 위해서, 자기계발서를 줄기 차게 읽는다. 자기계발서의 기본 철학은 자기 자신을 들들 볶아서 남들보다 한 수 위의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자이다. 그러면서, 성공은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 자기 의를 부추긴다.

 

자기 의라는 말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자기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 구원을 실현한 만큼 자신이 행복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기 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다.

 

그런데, 자기 의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특별히 무한경쟁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신기루같은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경제체제에서 자기 의를 통한 자기 구원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토대로 권세 잡은 자들이 일반대중에게 던져주는 떡밥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속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의는 한마디로 헛일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소위 영적인 일이라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특별히 신약성경)은 이 점을 줄기차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르고, 아직도 현실 생활에서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자기 의를 쌓는 데 여념이 없다.

 

자기 의가 헛일이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각 나라에서 통용되는 돈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에서는 원화를 쓰고, 미국에서는 달러화를 쓴다. 각 나라마다 자신들이 쓰는 돈이 다르다. 한국에서 원화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그것을 미국에서 쓸 수 없다.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리가 모아야 하는 것은 달러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미국에 살기를 바라면서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원화를 모으기만 한다면, 그것은 헛일이다. 원화를 아무리 많이 싸 짊어지고 미국으로 와도 그것을 달러로 바꾸지 못하면, 그가 모은 원화는 종이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헛일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이다. 예수 만난 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는 사울은 자기 의를 쌓는 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혈통이 좋다),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으며(학식이 좋다), 바리새인이었다(권력이 있다). 게다가 그는 열정이 넘쳐났다. 혈통 좋고, 학식 있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열정이 넘쳐나면, 그가 어떠한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예상치 못한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역량을 나사렛 예수 일당들을 때려 잡는 데 썼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일을 하는 중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 일당을 모두 때려 잡고, 지방에 숨어 있는 예수 일당을 때려 잡기 위해 대제사장(공의회)에게 공식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났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굳게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의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 받은 백성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에게 참으로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자신에게 비추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눈이 먼다(눈을 감게 된다). 그 상태에서 그가 들은 음성은 이런 것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 이 음성을 들은 사울은 질문한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가 들은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 이 사건을 겪은 이후에, 사울은 자신이 행하던 헛일자기 의를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한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 사울의 이 사건도 예수의 부활이 있은 후에 벌어진 일이다. ‘자기 의를 쌓기에 열심이던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데, 우리에게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있는가?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가? 그러한 일은 먹고 살기 바쁜데 방해가 되는 쓸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부활의 사건 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눈감기의 순간이 꼭 있어야 한다. 이전의 것에 대하여 눈을 감지 못하면, 새로운 것에 대하여 눈을 뜰 수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이전 것을 보고 있으면서,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새로워진 세상을 보기 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의 부활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에 눈을 떠야 한다.

 

사울을 보라. 눈감기 전과 눈감았다 떴을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눈감기 전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 일에 아주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에게 구원은 어떻게 왔는가? 눈을 감았다 떠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게 되었을 때에 왔다. 그는 눈을 뜬 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열심이 그도 구원하고, 다른 이도 구원했다.

 

오늘 또다른 본문인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눈감기 전과 눈을 떴을 때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눈감기 전에 그는 그물을 던져도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1:3). 헛일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눈을 감고 헛일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히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5-6).

 

사울이 자기 의를 쌓는 헛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도로 거듭나 참된 구원을 실현한 것, 그리고 제자들이 밤새도록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도 못 잡는 헛일을 버리고 수많은 고기를 잡게 되는 일이 어느 때 발생하는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될 때이다.

 

우리는 어디에 눈을 뜨고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헛일이 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헛일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헛일에 대하여 눈을 감으라. 그리고, 나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뜬 후의 삶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목양이라는 것이다. 대개 목양은 목사들이 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목양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베드로와 예수께서는 이러한 대화를 나누신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21:15-17). 예수께서는 이것을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것을 세 번 반복했다는 것은 목양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깊이 새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양을 잡아 먹는 자들이 아니라, 양을 먹이는 자들이다. 아직도 눈감고 눈뜨기를 못한 자는 양을 잡아 먹으며 자기 자신을 살찌우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지만, 눈을 감았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뜬 자들은 양을 먹이는 일에 자기 자신을 헌신할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어디에 눈을 뜨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자기 의’, 헛일을 하는가? 양을 잡아 먹고 있는가? 아니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 눈을 뜨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의 양을 먹이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아보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기 의’, 헛일에 대하여 이렇게 눈을 감으라. 이제 눈을 떠보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 지금 여러분들이 눈을 떠 보고 있는 그 예수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이시다. 그러니, 예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의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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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