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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06.17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는 예수 2
  3. 2016.06.17 누가 크냐
  4. 2016.06.17 이혼 문제
  5. 2016.06.17 영생이란 무엇인가? 1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5:14

오병이어 이야기

(메시아적 만찬)

(마가복음 6:30-44)

 

두 명씩 짝지어 파송 받아 나가 복음 전했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두 명씩 짝지어 나가는 방법은 주로 성경에 충실한이단들이 쓰는 방법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원래 가짜일수록, 가장하기 위해 성경에 충실한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여호와의 증인, 또는 몰몬교 등)

 

돌아온 제자들은 선교 보고를 한다.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우리는 매주일 세상으로 파송 받아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돌아와 주님께 예배 드리며,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의 의미이다.

 

선교 보고를 끝낸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받는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쉼은 굉장히 중요하다. 쉼은 열광과 헌신을 구분해 준다. 분주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마르다는 너무 분주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얻는 것도 없었다. 그 입에서는 불평만 나왔다. 멈출 줄 알았던 마리아가 칭찬 받았다.

 

쉬러 간 제자들과는 달리, 무리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다니는 데 열광했다. 열광은 자기 자신에게 향한,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이런 자는 쉴 줄 모른다. 멈출 줄 모른다. 이건 열심히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다. 자기 만족을 이루지 못하면, 금새 폭도로 변해 버린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열광과 헌신은 다르다. 헌신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헌신은 일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헌신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주님이 멈추고 쉬라시는 데, 그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광신도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그렇게 열정적으로몰려든 큰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그렇게 열정적인 이유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목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맹목적으로 열정적이지 않다. 그들은 목자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 자신을 헌신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기도 한다.

 

인간은 영적인 돌봄과 인도가 꼭 필요하다. 삶이라는 것은 망망대해와 같고, 광야와 같아서 돌봄과 인도를 받지 않으면 표류하거나 신기루를 좇아 가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다. 우리를 이용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먹이신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돌보시다, 시간이 흘러 식사 때가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제안한다. “이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6).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이게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펼쳐진다. 이 이야기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옛날, 성서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성경말씀을 전했던 설교자들은 그저 이 이야기를 기적이야기로 전했다. 어린 시절, 동네에 뻥튀기장사가 자주 왔었다. 쌀 한 바가지 가져다 주면, 뻥튀기 장사 아저씨는 뻥을 튀켜그것을 몇 배로 부풀려 주었다.

 

그러한 예를 들며, 무엇이든 예수님께 가져가면 예수님이 이렇게 뻥튀기튀겨 주는 냥 말씀을 전했다. 물론 똑같이 순진했던 사람들은 그 말씀에 아멘했다. 이러한 순수한 믿음도 과히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과제는 본문이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를 최대한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파악하는 일이다. 그래야, 본문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장난치지 않을 수 있다.


들으면 무조건 은혜 되는 말씀이 좋은 말씀이 아니라, 본문의 의미를 온전히 짚어주는 말씀이 좋은 말씀이다.

 

마가복음서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밝혀내기 위함이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뻥튀기 장사가 아니라, ‘메시아이다.

 

떡과 물고기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일상 음식이었다. 그 일상 음식을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는 것은 메시아적 만찬이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신 뒤,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다. 여기에 나오는 네 개의 동사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매)는 엠마오의 식사와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푸른 잔디는 메시아적 만찬의 식탁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푸른 잔디위에 사람들을 앉게하신다. 여기에 쓰인 앉게는 헬라어 아나클리노가 쓰였는데, 이는 누군가를 초대하여 식탁에 앉게 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리들을 초대하여 당신의 식탁에 앉히신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구약성경 가운데 만나 이야기와 엘리사가 떡 이십 개로 백 명을 먹인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만나를 다시 먹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만나를 먹이시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다름 아닌, ‘그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고 증언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 먹는 게 아니라, 함께 먹는 것은 하나 됨을 뜻하고, 오병이어의 식사는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상징한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푸는 잔치인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는 매주일 공동식사를 한다. 주일 공동식사는 메시아적 만찬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메시아)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결코 그냥 놓아두지 않으시고, 먹이신다는 것이다. 그냥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이다.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신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고백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준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그분이 베푸시는 메시아적 만찬에 초대되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예수님은 메시아시다. 이것을 믿는 자 만족하게 될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 ‘만족을 모르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으시는가? 그분의 메시아적 만찬을 누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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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5:10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는 예수

(마가복음 6:45-56)

 

본문의 이야기는 오병이어 이야기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 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병이어는 메시아적 만찬이었고, 오병이어는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었고, 오병이어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자꾸,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진짜로(과학적으로) 일으켰는지 아닌지, 그리고, ‘예수님이 진짜로(과학적으로) 물 위를 걸으셨는지 아닌지에 가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별로 이롭지 못하다. 성경의 이야기는 과학적인 증명을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이 쓰인 시대는 과학적 세계관의 시대도 아니고, ‘신화적 세계관의 시대였다. 성경이 쓰인 시대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이야기,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접하며, 예수가 정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어?’, ‘예수가 정말 물 위를 걸었어?’라는 것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고대인보다 상상력이 한 참 떨어지는 듯 하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자꾸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해?’를 따지지 말고, ‘이게 무슨 뜻이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전하고 있는 본질을 놓칠 수 있다.

 

마가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차적으로, 마가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그렇다고, ‘메시아는 물 위를 걸을 정도로 초능력을 지닌 분이어야 한다를 말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만약 메시아는 초능력을 지닌 분이야를 말하고 싶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 분명히, 십자가에서도 초능력적인 무엇인가가 발휘되었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십자가에서 무능하게 죽었다. 아무런 초능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성경을 보면, ‘메시아는 초능력자라는 것을 마가가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 이야기가 메시아적 만찬오병이어의 이야기다음에 나오는 것을 주목하라고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잔치를 벌인 뒤, 즉 예배 뒤에,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제자들과 예수님은 잠시 떨어져 있는 듯하다. 제자들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다’.

 

시간이 지나,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셨다. 여기서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 가운데있었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사명을 받고 파송은 받은 예수의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바다 가운데, 즉 삶의 현장 가운데 있다. 그런데, 그 삶의 현장, 바다 가운데는 잔잔하지 않고, “바람이 거스르므로 힘겹게 노를 저어야하는 곳이다.

 

우리 삶의 현장은 힘겹다. 얼마나 힘겨운가. 너무 힘겨워서 헉헉댄다. 우리는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가지 바람 때문에 힘들다. 더 이상 세상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은 다른 이들보다 힘겨울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마가복음이 쓰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이 정말로 힘겨웠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자유의 제약을 받았고, 생활이 불편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얼마나 힘겨운 삶의 현장인가!

 

이렇게 힘겨운 삶의 현장을 예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신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헉헉대며 힘겹게 노 젓고 있는, 바다 한 가운데, 삶의 현장 한 가운데로 오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제자들도 자신들의 배가 떠 있는 바다 한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유령인줄로 착각했다. 유령인줄로 알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은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얼마나 위로되는 말씀인가.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배 위에 올라 타신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힘겨워 하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올라타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렇다. 그들을 힘들게 했던 바람이 그쳤다. 주님이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면, 바람이 그친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주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모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제자들은 방금 전에 오병이어를 나누며, ‘떡을 뗐는데’, 그것을 금새 까먹었다. “이는 그들이 그 때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도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 예배 드리며,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고, 우리는 주님께 세상으로 파송 받아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서면, 우리도 금방 까먹는다. 우리의 마음이 둔해져서, 우리가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조차 마음이 둔해져서 깨닫지 못한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이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슬러 우리의 삶,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을 막아 주시기 위해, 우리와 동행하기를 꺼리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언제든지 오신다. 그것이 바다 건, 산이건, 광야 건 상관 없이,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님과 함께 한 그들의 사역을 보자. 그들은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 도착한다. 그곳에서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실패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게로 왔고, 예수님에게로 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 “사람들이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5-56).

 

마음을 열라.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감격,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는 도전들, 어려운 일들, 여러분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일들을 모두 그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주님은 결코 우리를 혼자 세상으로, 삶의 현장을 보내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삶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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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59

누가 크냐

(마가복음 9:30-37)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지나 가버나움을 가시는 중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차 수난 예고를 하신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서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31).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어 2차로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음에도, 그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일,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일,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사람들은 일단 자기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직 그들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안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들의 이권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관심은 이것이었다. “누가 크냐?” 이러한 관심은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가 크냐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상의 작동 방식이 그렇다. 큰 자가 되어야만 섬김을 받고 무시 안 당하고 성공했다고 칭송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이들보다 큰 자가 되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학벌 없는 사회라는 사회단체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벌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생겨난 단체였다. 그러나 최근 이 단체가 스스로 해단식을 가졌다. 더 이상 한국 사회는 학벌 사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벌이 없어져서 학벌 사회가 아니라, 학벌보다 더 무서운 요인이 학벌 문제를 집어 삼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본이다. , ‘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학벌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누가 돈을 더 많이 가졌느냐, 부모가 얼마나 경제력이 있느냐에 따라 사회의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한국 사회는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의 학벌을 가지고 있으면 사회적 지위 상승이 꽤나 보장되던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학교를 나와도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으면 신분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 즉 돈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사회가 된 것이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의 문제를 도상에서 토론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메시아상 때문이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다. 예루살렘은 왕의 도시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르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될 거라 믿었다.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면 제자들 중 큰 자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크냐의 문제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들이 이렇게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이며 누가 크냐의 문제를 따지고 든 이유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세 명의 제자만 따로 데려 가신 일 때문인 것 같다. 일종의 시기질투인 것이다. 예수님과 따로 변화산에 올라갔다 온 이들에게 높은 자리를 빼앗길 것이 두려운 다른 제자들이 변론을 주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잘못 이해한 결과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제자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신다. 이번 제자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거스르는 혁명과도 같은 말이다.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적당하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누가 크냐의 질문에 대한 답은 보통 학벌, , 지위, 명예 등이 결정한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큰 자가 되기 위해, 학벌을 쌓고, 돈을 모으고, 지위를 얻고, 명예를 추구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전혀 그러한 것을 말하기 않고, 큰 자의 덕목으로 오직 섬김을 말씀하고 있다.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국회의원이 설거철만 되면 시장에 나가 몸을 굽신대며 장사하는 분들의 손을 잡아주고, 장보러 온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일 등이 섬기는 일일까? 섬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은 섬김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우리는 대개 섬김도 나를 위한 섬김을 알 뿐이다. 예수님이 말하는 섬김은 이런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는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여기서 영접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자. ‘영접하다는 말은 영어로 ‘receive’라는 단어를 쓴다. 풀어서 설명하면, ‘시인하다, 사랑으로 대접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다른 말로 하면, 상대방(타자)을 나와 동급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영접은 모든 차별이나 장벽을 없애고,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방과 나 사이에 벽을 세우고, 상대방을 차별하고, 무시하면서 나의 존재를 기뻐한다. 상대방이 나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면 큰 일 날 것처럼 여겨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멀리한다. 그런 자는 큰 자가 아니다. 그런 자는 찌질한 자이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전혀 모르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오히려 예수님의 적이다.

 

누가 크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본질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벽을 허무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그분의 형제로 인정했다. 그야말로, 영접했다. 사랑으로 대접했다. 섬긴다는 것은 저 사람보다 큰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저 사람보다 작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큰 자가 아니다. 반대로 나이가 어리고 건강하다고 그래서 나이 많은 이를 이런저런 면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해서 큰 자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큰 자가 아니다. 학벌이 좋다고 큰 자가 아니다. 유러피언이라고 해서 큰 자가 아니다. 잘 생겼다고, 예쁘다고 큰 자가 아니다.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큰 자가 아니다. 사회적 명예가 크다고 큰 자가 아니다. 큰 자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또는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큰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니, 누가 크냐의 문제로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는데, 그 사람을 나의 형제로 자매로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제자도란, 바로 이렇게 모든 이들을 섬기는 것, 즉 그들을 나와 똑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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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54

이혼 문제

(마가복음 10:1-16)

 

제자도의 틀에서 생각해 보자. 제자란 이제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들이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요단강 동편의 베레아 지역으로 가셨다. 거기에서 바리새인들과 다시 한 번 대결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Testing Him’,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사람이(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 여기서 버리다이혼하다의 뜻이다. , 이혼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는 질문이다.

 

이들이 이혼에 관하여 묻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것을 뚝 떼어 놓은 채, ‘이혼에 관한 문제를 들여다보면 엉뚱한 말씀을 전하게 된다.

 

일단 이들이 이혼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구절은 신명기 24 1-4절의 말씀이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또한 그 당시 로마 사회에서 이혼은 쉽게 행해지던 일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풍습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처치할 죄목을 찾고자 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헤롯 안티파스는 형제의 아내를 취했고, 이 일(이혼한 일)로 인해서 세례 요한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요한은 그 일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이혼 문제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민간한 사안이었다. , 어떻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그 당시는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가부장적 사회(남성중심적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성 이외의 존재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이혼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는 도구 밖에 되지 않았다.

 

신명기서의 말씀은 이혼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혼으로부터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여자가 싫어졌다고 마음대로 이혼하지 못하게 법적으로 구속하는 것이다. 신명기서 문구에서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은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법이다. 그런 사유가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여자에게 꼭 써줘야 한다. 이것은 이혼을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여자가 이혼에 의해서 버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근거한 대답을 내어놓으신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6-9). 여기서 짝지어 주셨다는 것은 멍에를 함께 씌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함께 곁에서 멍에를 멘이라는 뜻이다. 멍에를 함께 멨기 때문에, 이제 결혼한 두 사람(남자와 여자)는 함께 가야 하는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평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는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이지, 여자가 남자의 멍에를 멘 것이 아니다. 남자 마음대로 여자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다. 옛날에는 그랬다. 여자의 운명은 남자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여자의 존재, 여자의 인권이 거의 없었다. 모두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깨시고 있다. 남자의 편의대로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름과 같이 결론을 내신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1-12). 우리가 알다시피, 십계명에 이혼죄는 없지만, ‘간음죄는 있다. 간음을 범한 자는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 그만큼, 중한 죄라는 뜻이다. 그만큼, 남자가 마음대로 여자를 무시하는 죄는 크다는 뜻이다. (물론 그 반대로 똑같이 해당된다.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면 안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인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인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시며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윤리를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어린 아이에 관한 가르침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혼 문제에 이어 곧바로 나오는 이야기가 어린 아이에 관한 교훈이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다. 그것을 본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가르침을 주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4-15).

 

그 당시, 여성보다 더 존재감이 없던 존재가 어린이였다.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중의 약자였다. 요즘처럼 아이를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세대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나이 드신 분 중에는 어린 시절에 자신들이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는지 기억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예수님은 존재감이 전혀 없던 아이들을 가리켜, 그들과 같이 받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파격적인 선언이다. 그 당시 그 누구도 어린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들은 그저 무시만 당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 말을 깨달은 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시당하고 거절당한 사람들, 즉 병든 자, 소외된 자, 이방인, 여자,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인정받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나라이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여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모두 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다.

 

제자도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와 좀 다르다고, 나보다 힘이 약하다고, 나보다 좀 못나 보인다고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적 가치관에 갇힌 자들은 아직까지 차별과 무시와 거절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제자는 모든 사람을 나와 같은 이로 받아들이며,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 것이다.

 

여러분은 제자인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고 있는가? 혹 세상적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말씀은 단순히 이혼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들은 여전히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로 갈라서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들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곁에서 멍에를 멘자들 답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평화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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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49

영생이란 무엇인가?

(10:17-31)


진시황은 인생 말년에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권좌를 지키려는 욕심때문에 국고를 낭비해 불로초를 사들이고, 백성들의 노동을 낭비하며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Eternal Life)란 우리의 욕심 또는 욕망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물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어로, “Good 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여기서 영어의 ‘inherit’가 히브리어의 클레로노메오를 잘 표현해 준다. ‘내가 만약 영생을 상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의 뜻이다. 히브리어의 클레로노메오는 오직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 ‘약속’, ‘축복을 목적어로 취한다.

 

무엇인가를 상속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인가를 하면 상속 받을 수 있나? 상속은 행위의 관점에서 볼 수 없다. 상속은 관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 사람은 행위의 관점에서 상속을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라고 묻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관점에서 상속을 접근하는 그에게 이런 행위할 것을 말씀하신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예수님을 떠나 갔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때문이다.

 

영생을 행위의 관점,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부자 청년처럼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갈 수 밖에 없다. , 그는 결코 하나님나라, 영생을 상속받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워하며 서로 수군댄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본문에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 들으면 완전히 이상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위험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바로 이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이 쓰여진 시대는 박해시대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다. 그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였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전토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이민과 같다. 또는 죽음과 같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를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는가?

 

대답은 이것이다. 바로,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 때문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서게 하였을까?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이단사이비가 된다. 실제로, 이 말씀 들이대면서, 신도들에게 형제자매와 부모 자식을 떠나게 하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강요하는 이단사이비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들을 현혹시키고, 영생과 구원에 집착한 어리석은 신도들은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행위소유의 관점에 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오류이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은 행위로 상속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개념이다. 관계사랑이 개입되고, ‘변화를 동반한다. 행위와 소유는 사랑과 변화가 동반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와 만나서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 그저 영생을 자기의 재산처럼 소유하려고만 했다. 그렇게 영생을 얻으려는 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즉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인가를 경험했다. 그것이 부활인데, 그 부활이란 이 세상의 것에서 완전히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필요하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상속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욕심 내지 욕망에서 벗어나, 예수에게 나타난 또다른 현실(하나님나라)를 경험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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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