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홉스의 사상으로 보는 남북관계


근대는 전쟁을 통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유럽에서 발생한 30년 전쟁(1618-1684)은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며 자신의 사상을 키운 토마스 홉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every man against every man. 왜 인간은 서로를 향해 투쟁할 수 밖에 없을까?


토마스 홉스가 주목한 것은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이다. 여기에서 홉스의 독특한 인간론이 발견되는데, 그는 인간에 대해서 비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비관론은 어거스틴이나 루터, 또는 칼뱅이 말하는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다. 앞의 신학자들은 죄의 개념을 인간에게 가져와 인간에 대한 비관론(죄에 의한 타락)을 전개하지만 홉스에게서 발견되는 비관론은 신학적 비관론이 아니라 경험적 또는 철학적 비관론이다.


홉스는 사람의 정신과 몸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더 뛰어난 몸이나 더 뛰어난 정신이 없고, 모두의 몸과 정신은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평등성이 인간에게 고통과 비참함을 가져다 준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몸,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것을 바라고 소망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때 발생한다. 서로 같은 것을 얻고자 할 때 거기에서 긴장이 발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서로를 파괴하려는 열망이 생긴다.


남한이나 북한, 그리고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같다. 그것은 국가의 안전이다. 홉스의 평등성에 기대서 말한다면,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다스리거나 간섭할 수 없다.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모든 나라가 같은 것을 향해 경쟁할 때이다.


홉스는 이러한 상태를 자연 상태(the state of nature)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투쟁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홉스는 여기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바로 그 죽음의 위협이 인간들 간에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을 통해 서로 투쟁 관계에 있던 인간들은 생명을 보존하고 평화를 일구어 낸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은 서로 간에 평화 계약을 맺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 전쟁이 일어나면 공멸하기 때문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자연 상태에서 서로 간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 내는 가장 큰 원동력은 홉스가 말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the fear of death’이다. 이처럼 남한과 북한은 21세기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연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홉스가 발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오는 사회 질서는 굉장히 원시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심오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그대로 적용되는 실제적인 정치 이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남한과 북한이 평화 협정을 맺게 되는 계기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크고 위대한 가치가 없을까’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심리적 압박이 아니라, 보다 위대한 긍정적 가치가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일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측면에서 기독교는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위해서 어떠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장준식

해방의 끝은 어디인가?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미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흑인여성해방신학, 남미여성해방신학(Mujerista), 퀴어신학, 탈식민지신학, 그리고 장애인신학,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악들과 맞서 싸우느라 참 고생이 많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분명히 느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지목하는 일 보다(물론 이것도 중요하다)는 어떤 악이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생산되고 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차별하게 되었는지, 왜 차별하고 있는지 모르고 차별한다. 일례로, 장애인신학에서 말하는 근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주체이다. 근대는 경제적 관심에 의해서 인간의 주체를 파악하지,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성이 없는 인간은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거부된다. 그러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거부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장애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탈근대(Post-Modernity)를 살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탈근대는 근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를 더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들어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런데,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보면, 내 생각에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가 아닌가 싶다. 모든 분야에서 자기 자신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어필하느라 모두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일 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상품화시키는 현대인은 그렇게 사회에서 소비되다 쓸모가 없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뿐이다. 이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가 주장하고 실천했던조화로운 삶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며 이 거대한 소비사회를 돌파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메시아를 더 갈망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메시아 사상이 할리우드에 히어로 물들과 만나 판타지로 치닫고 있지만, 판타지가 아닌 희망(궁극적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은 깊고, 내 발걸음은 너무 느리다.


Posted by 장준식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 그리고...

마음의 고향 같은 작은 숲(리틀 포레스트),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작은 숲을 가지고 있는가. 그 숲은 치유와 회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게 없다면, 인생의 아픔을 어디에서 달랠 수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 느낌,
스캇 &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읽는 느낌,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는 느낌,
그리고,
나영석 PD의 <삼시세끼>를 시청하는 느낌이었다.

아프면서도 그 아픔을 치유(힐링)할 공간과 방법을 모르는 현대인의 삶에
작은 숲이 되어 작은 힐링을 제공하는 <리틀 포레스트>,
결국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자연과 그 자연에 깃든 추억과,
무엇보다 인생의 이야기를 함께 써나갈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작은 숲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숲을 함께 거닐며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행복을 완성한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말한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괜찮아’의 위로가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권하는 영화,
그리고,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도 일독을 권한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를 살리고 싶다

Christianity is Platonism for the masses.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처방약을 보면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의사가 이 약을 당신에게 처방해 준 이유는 이 약이 부작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명을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장)


초대교회부터 기독교인들은 이 사명을 열심히 지켰다. 유대땅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세계로 뻗어나갔고, 땅과 사상의 경계를 넘어 서기 위해서 그 땅과 그 땅의 사상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한복음만 봐도, 로고스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로고스는 유대 개념이 아니다.


유대 땅을 넘어 헬라 세계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차용한 것은 헬라인들의 철학인 플라토니즘(플라톤 철학)이다. 그런데, 그 플라톤 철학은 기독교를 설명하기 매우 좋은 사상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원론이다. 플라톤 철학의 특징은 이 세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로 이원화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적, 가치적 우위를 부여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차용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부작용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를 전하기 위하여 플라톤 철학이 더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용한다.


현재 기독교에서 유통되는 소위 기독교의 교리는 대개 플라톤 철학을 차용한 교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등장하는 두 왕국 이론도 그렇고, 그의 원죄 개념도 그렇고, 그의 종말론적 시간 개념도 그렇다.


중세에 가면, 플라톤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더해져, 더 복잡한 기독교 교리가 생성된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낸 성만찬 교리가 대표적이다. 가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생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섞인 교리이다. 형상(Form)과 질료(Matter)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중세의 보편 논쟁은 모두 플라톤 사유의 반영이다. 보편의 개념(이데아)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 철학이 실재론이고, 그것에 대항하여 보편은 존재하지 않고 개별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철학이 유명론이다. 중세의 가톨릭이 교회를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한 것은 교회가 보편의 개념으로 교회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야, 보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한 교회는 영토와 사상을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복음의 훼손을 가져왔다. 복음의 이원론적 해석이 불러온 가장 큰 재앙은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몰이해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더 이상 현실을 정의롭게 정화시키는 원동력을 잃었고, 오히려 사회의 적폐가 되었으며, 여전히 몰역사적인 구원만 외치고 있는 데 머물고 있다.


니체가 외친 구호,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토니즘이다”는 옳다. 그리고 그가 말한, “오직 한 명의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도 옳다. 니체가 도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왜곡한 교회의 파렴치한 역사와 권력이다. 치료를 위해 처방한 약이 그 부작용 때문에 오히려 해를 끼친 격이다. 교회가 지금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떻게 그 부작용을 걷어내고, 약효가 온전히 발휘될 수 있게 끔 만들 수 있을까? 교회를 살리고 싶다.


Posted by 장준식